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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몽골제국, 칭기즈칸의 정복 전쟁

by 소시민스토리 2024.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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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 칭기즈칸의 정복 전쟁

몽골 약소 부족이었던 테무진은 위기를 극복하며 초원을 통합해 나갔다. 1206년 드디어 통일에 성공하고 신으로부터 새로운 이름 '칭기즈칸'을 받는다. 아시아를 넘어 러시아와 유럽까지 공포에 떨게 만든 이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몽골제국, 테무진의 등장

 

몽골제국, 테무진의 등장

몽골제국, 테무진의 등장 13세기 유라시아 대륙에는 몽골군의 말발굽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죽음의 군대로 불리는 그들은 뛰어난 기동력을 바탕으로 세계 인구의 절반을 지배하며 아시아를 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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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의 탄생일은 정확하지 않다. 몽골에서 공식적으로 1162년 설을 채택하고 있어서 칭기즈칸에 즉위한 나이는 44살이 된다. 칭기즈칸의 통일은 1206년 단기 3539년, 불기 1750년, 이슬람력 602년이 되는 해이다.

 

 

이때 유럽은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틴 노플을 점령해 라틴 제국을 세운 지 2년 째였다. 중국은 송나라가 남송으로 밀리고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화북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시기였고 고려는 희종 2년 째였다. 1170년 고려는 무신정변이 일어나 정중부가 권력을 잡았다. 오래가지 못하고 이어 경대승이 정중부를 죽이고 권력을 찬탈했다. 경대승은 젊은 나이에 사망하면서 소금장수 아들 이의민이 권력을 장악한다.  최충헌이 이의민을 죽이고 권력을 잡는다. 1206년 고려 희종 2년 최 씨 무신정권이 10년째 이어지고 있었던 시기였다.

 

칭기즈칸은 유목민들의 금기들을 바탕으로 '자사크(법령)'를 정리한다. 법령이라는 뜻의 자사크가 사형과 동의어로 인식될 만큼 대부분 사형에 처해졌다. 형량 규정이 존재하지 않은 시기였다. 칭기즈칸은 자신이 정리반 자사크를 매우 중시했고 본인에게도 엄격하게 적용했다. 죽기 전에 후손들도 법령을 준수할 것을 유언으로 남기기도 했다. 

 

"간통한 자 

거짓말을 한 자

다른 사람을 몰래 훔쳐 본 자

남의 싸움에 개입해 한쪽을 편드는 자"는 모두 사형에 처한다. 

"술을 끊을 수 없으면 한 달에 3번만 마셔라"

 

칭기즈칸은 법을 통해 군사력을 키운다. 유목민들은 풀을 찾아 이동하면서 소, 말을 키우면서 항상 물자 부족에 시달린다. 약탈을 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이런 초원의 습성을 잘 알았던 칭기즈칸은 힘의 중요성을 터득했다.

 

 

몽골은 금나라에 대한 오랜 원한이 있었다. 금이 초원 부족들의 싸움을 유도해 그 과정에서 칭기즈칸의 할아버지, 아버지 형제들이 금으로부터 피해를 입었다. 집안의 복수, 몽골 울루스의 복수, 풍부한 물자 확보를 위해 금나라를 쳐야겠다고 생각한다.

 

몽골말은 서양의 대마보다 지구력이 좋다. 대마와 몽골 말의 차이는 대마를 탈 때의 박자는 다닥 다닥이다. 몽골 말을 탈 때는 박자는 당당당당당당이다. 

나담축제는 매년 7월 몽골의 독립기념일과 칭기즈칸의 건국을 기념하는 몽골 최대의 민속 축제로 씨름, 말 경주, 활쏘기 대회 등을 개최한다.

 

유목민은 말을 중시한다. '모린치'라고 부르는 전담 관리도 존재한다. 모린은 몽골어로 '말'이고 치는 '사람을 나타내는 접미사'이다. 

우리가 쓰는 말 장사치, 갖바치, 이치 저치 등 사람을 낮잡아 일컫는 말이며 고려 말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서 생긴 말이다. 

자사크 법령에는 "말을 훔친 자는 한 마리당 아홉 마리를 변상해야 한다, 만약 변상할 말이 없다면 아들을 내주어야 한다, 아들이 없다면 본인이 양처럼 도살될 것이다"라고 되어 있을 만큼 말을 중요시 했다.

 

 

칭기즈칸 당시 말 훈련을 혹독하게 시켰다. 뭉쳐 있어도 조용하게 만들었고 기수가 타거나 내릴 때 동요하지 않게 했다. 기수가 없어도 기다리게 했다. 

얕은 우물을 파서 말 4~5마리가 순서대로 마시게 한다. 몽골말은 자기 순서를 기다렸다가 마시도록 훈련을 시켰다. 몽골인들은 말에 대해 굉장히 잘 알았다. 전쟁 시에는 부족한 수분과 영양을 말의 피로 보충했다. 

 

 

실크로드 교역의 중심지였던 사마르칸트, 13세기 이슬람 세계 패권을 장악한 호라즘 왕국이 수준 높은 문명을  자랑했다. 그러나 칭기즈칸이 출현하기 전이었다. 호레즘 왕국은 의학, 언어, 문화, 신학, 제도학 등이 발달해 있었다. 하지만 몽골이 침략하면서 이런 문화는 파괴되어 사라졌다. 150만 주민이 살았던 이 광대한 영토가 재로 변한 것이다. 그 시대가 마치 없었던 것처럼 완전히 유적이 사라졌다. 칭기즈칸의 군대가 넓은 영토에서 번영을 이루었던 호라즘 왕국을 초토화시키는데 2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호라즘 (1077~1231) 은 사마르칸트 중심으로 동서 무역을 독점, 번영했으나 칭기즈칸 군에 패하여 멸망했다. 

중앙아시아는 이란 고지대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고대 제국 페르시아의 튀르크 문화의 주요 거점이었다. 

튀르크는 민족의 명칭이며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활약했던 민족으로 셀주크 튀르크와 오스만 튀르크 등의 제국을 건립했다. 여러 학문, 다양한 문화가 발전한 터전이어서 호라즘 왕조가 있던 일대는 세계사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호라즘은 지금의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을 걸치고 있던 큰 지역이다. 몽골이 원한을 가지고 있었던 금나라는 먼저 치지 않고 서하를 먼저 공격한다. 1207년은 서하, 1211년은 금나라, 1218년은 서요, 1219년은 호라즘을 친다. 

 

몽골의 활은 각궁으로 나무, 쇠뿔 등 다른 성질의 재료를 결합한 활이다. 양궁은 세 손가락으로 시위를 입술까지 당겨서 발사한다. 앵커링(당긴 활시위를 고정하는 동작)이라고 한다. 

몽골과 우리나라 활쏘기의 특징은 엄지손가락으로 당긴다. 엄지손가락이 뒤에 있어 더 많이 당길 수 있다. 귀 뒤쪽에서 앵커링을 할 수 있다. 예민하고 힘이 많이 필요하여 연습이 필수이다. 칭기즈칸은 전쟁이 없을 때는 사냥을 하라고 강조했다. 사냥은 실전 전투와 유사하게 훈련할 수 있다. 

 

칭기즈칸은 전투 중에 태만한 병사, 사냥중에 짐승을 놓친 병사는 사형시켰다. 사냥과 전투를 동일 시 해서 중요하게 생각했고 실전 훈련 기회로 삼았다. 포위하고 쫓고 일사불란하게 포획하는 사냥 방식이 호라즘 침공에 실제로 적용된다. 

칭기즈칸 자사크(법령)에 등장하는 천호, 백호, 십호는 몽골의 핵심적인 군사제도, 천호제 용어이며 칭기즈칸이 정비한 강력한 중앙집권 조직이었다. 

초원에 흩어져있던 열 명을 묶고 그중 한 명을 십호장으로 선출한다. 십호장이 10개가 모이면 100호가 되고 100호가 10개가 더 있으면 1,000호가 된다. 천호제의 장점은 명령을 열 명에게만 전달하면 된다. 위에서 아래까지 일사불란하게 명령이 하달되는 피라미드식 조직이었다. 이런 체제는 오늘날 군대의 소대, 중대, 대대. 연대, 사단 체제와 같다.

 

십진법 단위로 부대 편성은 칭기즈칸 이전부터 유목민들 사이에 존재했다. 

칭기즈칸의 천호제가 위력을 발휘한 까닭은 지휘관(노얀) 임명 방식이 달랐다. 기존의 혈연관계를 없애고 선발기준은 오직 충성심과 능력으로 임명한다. 그러다 보니 노예 출신 천호장들도 존재한다. 

칭기즈칸의 강력한 전투력의 배경이 된다. 

※케식은 천호장, 백호장 등 귀족의 아이들을 모아 구성된 칭기즈칸의 친위대이며 밤낮으로 왕실 가족을 호위하게 했다. 

케식은 인질 겸 칭기즈칸의 생각을 공유하는 엘리트 집단이 된다. 고려의 왕자가 몽골에 인질로 간 것은 케식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다. 

 

칭기즈칸의 천호제가 강력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십호 중 한 명이라도 도망자가 나오면 나머지 9명은 모두 처형한다. 전쟁 중 포로가 된 전우를 두고 오면 전원 사형시킨다. 전사자나 부상자도 끝까지 데려와야 한다. 

이러한 군율은 전우와 함께 끝까지 싸워야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초기 칭기즈칸 기병은 공성전과 수전에 약했다. 제일 먼저 공격했던 서하는 축성술이 발달해서 높은 방어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공성전에 취약한 몽골 기병은 일단 성 주위를 포위해서 고사 작전을 펼친다. 성 주변에는 강이 흐른다. 강을 성 주변으로 물길을 내어 성을 침수시킨다. 그러면서 동시에 적이 항복할 때까지 공격을 퍼붓는다. 칭기즈칸은 항복하지 않는 적은 섬멸한다는 전쟁 원칙이 있었다.

 

서하를 점령한 후 성안의 모든 사람을 살해한다. 하지만 기술자들, 의사, 천문학자, 성직자, 가수 등 전문가는 우대했다. 정복지의 기술자를 동원해 전쟁 물자를 만들게 했다. 서하의 기술자들이 만든 것은 투석기, 운제 등 공성무기들을 만들었다. 전쟁을 하면서 자신들의 약점을 보완해 채워나간다. 1209년 서하를 점령하고 1211년 금나라와 전투를 벌인다. 1215년 금나라 수도 중도(베이징)를 점령한다. 

칭기즈칸은 심리전을 활용한다. 항복하면 평화를 보장하지만 저항하면 철저하게 살육하고 파괴시킨다. 이 소문이 퍼저나 가면 주변의 적들은 싸울 의지를 상실한다. 

 

호라즘은 몽골에 항복하지 않고 싸우려 했다. 호라즘은 독특한 지형과 기후를 가지고 있었다. 칭기즈칸은 정복 과정에서 만난 상인들을 통해 교역의 필요성을 느낀다. 

 

 

칭기즈칸은 이슬람 상인을 통한 교역을 시도했다. 호라즘 술탄에게 상인들을 보낸다. 그러나 상인들의 물건을 탐낸 국경도시 오트라르성의 성주가 상인들을 첩자로 몰아 죽여버린다. 분노한 칭기즈칸은 호라즘 정벌을 결심한다. 

칭기즈칸은 금나라를 정벌하고 서쪽과 교역을 시작하려고 했었다. 피살된 이슬람 상인들은 칭기즈칸이 통행의 안전을 보장했던 상인이었다. 칭기즈칸은 권위가 무너진 것으로 분노가 치밀었지만 사신을 호라즘에 보내 항의하고 성주를 보내라고 하지만 호라즘은 무시한다. 호라즘은 몽골 사신들을 또 살해한다. 

 

몽골이 상인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기도 하고 첩자로도 이용을 하기도 했기 때문에 오트라르 성주의 의심이 합리적인 면도 있었다. 전쟁 명분을 위해 칭기즈칸이 일부러 상인들을 보냈다는 분석도 있다. 

 

칭기즈칸은 대군을 이끌고 출병을 한다. 칭기즈칸의 아들들이 호라즘 정벌에 참여한다. 칭기즈칸 사후 몽골제국 확장의 발판이 된다. 저항하는 지역민들을 잡아다 최전방에 배치한다. 살아있든 죽었든 저항한 사람들로 해자를 메워 밟고 지나간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칭기즈칸은 모든 전쟁의 시작은 자신이었다. 칭기즈칸이 휩쓸고 간 자리는 수많은 사람이 죽고 수많은 도시와 문화가 파괴된다. 

 

전쟁의 원인이 된 오트라르성은 반년도 안 돼 함락당하고 성안의 사람들은 살육당한다.  오트라르성이 함락당하고 성주가 칭기즈칸 앞에 잡혀온다. 칭기즈칸은 오트라르성 성주 눈과 귀에 끓는 수은을 부어 살해한다. 

입에 돌을 채워 죽이기도 하는 등 칭기즈칸의 살해 방식은 야만적이었다. 오트라르성 함락 이후에도 호라즘을 계속해서 공격한다. 호라즘 술탄 무함마드는 수도 사마르칸트를 지키려고 11만 병력을 모집한다. 추가로 20마리의 코끼리까지 동원한다.

 

몽골군은 코끼리 습성을 이용해 공격한다. 아수라장이 된 틈에 호라즘의 술탄은 도망간다. 결국 성문이 열리게 되고 몽골군들은 마음껏 약탈하고 사마르칸트는 초토화된다. 

몽골 부대는 도망간 무하마드 술탄과 그의 아들 잘랄 웃 딘을 끝까지 쫒는다. 

도망자를 쫓으면서 전장이 확대되어 끝날때까지 끝나지 않는 전쟁이 된다. 그래서 몽골 주변의 모든 국가들이 전쟁의 공포에 휩싸인다. 

'쇠'라는 뜻의 테무진에서 위대한 지도자라는 '칭기즈칸' 이름(1206)을 얻은 칭기즈칸은 결코 멈출 생각은 하지 않았다. 

 

몽골제국 이야기는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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