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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몽골제국, 칸의 명령 끈질긴 추격

by 소시민스토리 2024.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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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 칸의 명령 끈질긴 추격

1219년 칭기즈칸은 몽골 상인들을 죽인 중앙아시아 호라즘 왕국을 공격한다. 순식간에 초토화된 호라즘 왕국, 국왕 무하마드 2세는 수도를 버리고 서쪽 카스피해로 도망친다. 

이에 저항을 용서치 않는 칭기즈칸의 추격 명령이 내려진다.

 

"술탄 호라즘 샤를 추격하라, 그를 손에 넣을때까지는 돌아오지 말아라, 누구라고 반역하고 거역하는 자가 있다면 그를 제압하라, 이 일을 3년 안에 완수하고 킵차크 초원을 경유해서 돌아와라"-<집사>

 

 

몽골제국, 칭기즈칸의 정복 전쟁

 

몽골제국, 칭기즈칸의 정복 전쟁

몽골제국, 칭기즈칸의 정복 전쟁몽골 약소 부족이었던 테무진은 위기를 극복하며 초원을 통합해 나갔다. 1206년 드디어 통일에 성공하고 신으로부터 새로운 이름 '칭기즈칸'을 받는다. 아시아를

bringbacon.tistory.com

 

몽골 최고의 장수 제베와 수베데이는 3만 정예병과 함께 무함마드를 뒤쫓는다. 이에 몽골군은 카스피해 서쪽을 돌아 조지아와 크림반도 러시아 남부까지 휩쓴다. 이 추격전은 훗날 몽골제국의 유럽 정벌 첫 발판이 된다. 

 

 

호라즘 국왕 추격전은 유럽 원정의 첫걸음이 되었다. 칭기즈칸의 집념과 우연한 사건으로 시작된 몽골의 1차 유럽 원정이었다.  무함마드 추격전은 이후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는다. 

무함마드를 뒤쫓는 몽골군은 무시무시했다. 무함마드가 어디에서 하루만 묵어도 몽골군은 그를 추격했다. 

호라즘 수도 사마르칸트에서 시작된 추격전은 카스피해까지 이르렀고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카스피해 섬으로 피신한 무함마드를 몽골군은 섬까지 쫓아간다. 무함마드는 섬에서 8개월간의 도망 끝에 풍투병을 얻어 병사한다. 한때 중앙아시아의 강국이었던 호라즘은 무함마드 죽음으로 멸망한다. 

 

몽골군은 칭기즈칸의 명령대로  카스피해 북쪽 킵차크 초원으로 향한다. 몽골의 장수 제베와 수베데이 귀국길에 유럽 원정이 시작된다. 칭기즈칸이 왜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 왜 몽골군이 계속 서쪽으로 갔는지는 학계에서 정설은 없다. 몽골인들도 왜 갔는지 상대국가에서도 왜 왔는지 기록한 것이 없다. 당시 몽골군 병력은 3만 명으로 본격적인 지역을 정벌하려는 목적보다는 약탈품, 전리품을 챙기려는 의도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지나가는 길에 조지아 왕국이 있었다. 

 

조지아 왕국(1008년~1490년)은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 캅카스 지역에 위치하며 오늘날의 조지아에 해당하는 지역에 건국된 중세 왕국이다. 

이 시기 조지아는 기독교 국가였다. 몽골이 지금까지 싸운 국가는 이슬람국가였다. 기독교 국가는 몽골이 처음 만난다. 캅카스 지역의 맹주는 조지아였고 동양 최강은 몽골이었는데 몽골군이 대승을 거둔다. 조지아 왕국은 몽골군에게 패배하고 멸망 수준의 타격을 입는다. 

 

조지아 옆, 아제르바이잔은 항복한다. 몽골군은 서쪽으로 크림반도 일대까지 공략한다. 다시 북쪽으로 진격하여 러시아 남부까지 진격한다. 러시아 공국의 수장 키예프 공국을 중심으로 8만 여 명의 연합군이 몽골군을 공격한다. 몽골군의 후미를 공격하여 천여 명의 몽골군을 전멸시킨다. 

 

러시아 연합 8만과 몽골 3만이 붙게 된다. 칼가강 전투이다. 칼가강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전멸됐다. 

 

"일주일간 전투가 벌어져 마침내 킵차크인과 러시아인들이 패배했다, 몽골은 그들을 추격했고 도시들을 파괴하여 그들 지방의 대부분에서 인적이 사라졌다."

-<집사>

 

당시 유럽 기독교 국가들의 적은 이슬람 세력이었다. 동쪽에서 온 어마어마한 군대가 이슬람을 공격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과거 동쪽으로 건너간 기독교 세력이 유럽을 도와준다고 착각했다. 

그런데 그 동쪽의 군대가 유럽까지 공격하자 유럽인들은 몽골군의 실체를 보고 경악한다. 

 

"우리들의 죄악 때문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부족이 찾아왔다, 그들은 도대체 누구일까? 누구 한 사람 알지 못한다. 단지 그들은 자신들을 '타르타르'라고 부르고 있다" -<노브고로드 연대기>1224년 조

몽골 부족 중 하나인 '타타르'는 중앙아시아를 통해 일찍부터 알려졌었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몽골을 '타타르' 혹은 '타르타르'로 불렀다. 마침 라틴어로 지옥이라는 말이 '타르타로스'였다. 그래서 몽골군을 지옥에서 온 사람으로 생각한다. 

 

강한 조지아.러시아군이 몽골군에게 진 이유

몽골군의 활은 복합궁이라고 한다. 다양한 재료들을 조합해 만든 활이다. 나무, 소의 뿔, 소의 힘줄이 있어 활의 탄성을 높인 제작방식이다. 정확성과 사거리도 뛰어났다. 복합궁의 사거리는 500~600m였다. 

칭기즈칸 돌에는 1224~1225년 사이 칭기즈칸의 조카 이숭게가 화살로 약 335알드(약 530m) 거리의 과녁을 맞혔다고 새겨져 있다. 

 

13세기 몽골군은 소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입었다. 소가죽 갑옷의 장점은 가볍고 겹치면 방어력이 높아진다. 비단으로 만든 속옷을 입어 화살촉이 몸을 완전히 관통하는 것을 막아줬다. 겉에는 소가죽 갑옷을 입었고 속옷으로 비단을 입어서 화살촉의 회전을 감소시켰다. 

 

몽골식 육포 '보르츠'는 보급부대 없이 병력을 이동 가능하게 했다. 보르츠는 양이나 소고기를 초원의 바람에 건조해 만든 몽골 음식이다. 잘 말린 고기를 소에 방광에 넣어서 말 안장 밑에 놓고 깔고 다닌다. 계속 고기가 눌려서 고기는 부드러워진다. 남은 육포 가루는 물에 불려 먹는다. 포만감이 좋아 전투식량으로 효과적이다. 

병사 10명 당 양 3마리 분량의 보르츠를 가지고 출정나간다. 말젖은 병사 1명 당 5~8마리의 말젖을 섭취한다. 겨울 풀이 없어 말의 영양 상태가 좋지 못한 경우에는 마유 분말을 겨울용 식량으로 활용한다. 오전에 출발할 때 물에 불려두면 저녁에는 죽이 되어있다.  몽골군은 전쟁 중에도 단백질, 유제품을 꾸준히 섭취했다. 

몽골군의 신출귀몰한 기습작전의 성공 원인이 된다. 

 

 

제베와 수베데이 3만 병사는 3년 동안 1만 Km를 돌파한다. 이 경험을 10년 뒤 동유럽 침공에 활용한다.

1차 원정에서 습득한 정보를 훗날 유럽 정복 전쟁에 활용한 것이다. 

1차 유럽 원정 이후 계획적인 전쟁 목표를 세우게 된다. 

 

호라즘 왕국 정복  1년 후 1226년 서하로부터 들려온 소식에 칭기즈칸은 분노한다. 복속되어 있던 서하가 배신했다. 서하는 금나라와 동맹을 맺고 나서 초원 각 부족과 연합해 칭기즈칸에게 맞선다. 배신을 절대 용서치 않던 칭기즈칸은 피의 복수를 시작한다. 1218년 서하는 몽골에 항복했었다. 직전 호라즘 원정에 서하에게 군사를 보내라고 요구를 했다. 서하는 군사 지원 요구를 거부했다. 당시 칭기즈칸의 나이는 60으로 서하를 치기 위해 나선다. 이때 몽골제국을 뒤 흔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칭기즈칸이 서하 원정 중이던 1227년 뜻밖의 사건이 발생한다. 칭기즈칸이 낙마했다. 죽음이 임박해 오자 칭기즈칸은 자신의 아들과  장수들에게 마지막 뜻을 전한다. 서하 왕이 시간을 정해 투항하러 오면 다시는 돌려보내지 말라고 하며 다 죽여서 후환을 없애라고 하고 자신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고 한다. 적이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곡을 하거나 애도하지 말라고 한다. 

 

칭기즈칸은 자식들을 위해 유언했다. 칭기즈칸 사망 당시 황하 이북에서 카스피해까지 몽골제국 영토를 확장했다.

 

"나는 창조주의 힘과 하늘의 도움으로 그 중심에서 어느 방향으로 가든 1년이나 걸리는 거리인 광대한 왕국을 너희 자식들을 위해 정복하여 완성시켰노라,,"

-<집사>

 

서하 원정 승리를 며칠 남겨둔 상황이었다. 서하 왕은 투항을 밝혔었다. 

인류 최대의 정복 군주 , 칭기즈칸의 죽음이었다. 

 

"서하 탕구트 사람들에게 칭기즈칸이 두 번째로 원정하여 무찌르고 돌아와 돼지해(1227)에 하늘로 올랐다"

-<몽골비사> 제12권 中

 

 

800년이 지난 지금도 칭기즈칸의 무덤은 알려지지 않았다. 

부르칸 칼둔 산은 몽골 헨티 지방에 있는 해발 2,445m의 산으로 칭기즈칸의 출생지이며 몽골인들에게는 전설의 산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묻혀 있다고 한다. 칭기즈칸과 함께 진귀한 보물들이 함께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칭기즈칸의 무덤을 세계 고고학자들이 찾아 나섰지만 찾지 못했다. 

 

"칭기즈칸의 관을 오르두들에 운반할 때까지 도중에 마주치는 모든 피조물들을 죽였다"

-<집사>

 

무덤을 조성한 후에 수백마리의 말을 달리게 해서 그 위를 평탄하게 만들고 나무를 심어서 숲을 만들어버렸다. 심지어 장례식을 지켜본 사람들을 다 죽였고 그들을 죽인 친위대 50명을 다른 친위대가 죽였다. 그 친위대를 또 다른 친위대가 죽였다. 무덤의 위치를 그 누구도 모르게 하기 위해서였다. 

 

미국, 영국, 독일 등에서 탐사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1992년부터 미국 변호사 모리 크라비츠는 20년 동안 약 400만 달러를 투자해서 무덤을 찾았지만 결국 실패했다. 몽골인에게 칭기즈칸은 신적인 존재이며 위대한 정복자로서 자랑스러워하는 한다. 몽골 국제공항은 칭기즈칸 공항이며 모든 지폐에 칭기즈칸의 모습이 있다. 칭기즈칸의 유언대로 무덤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에 발굴을 하지 않으려 한다. 

 

칭기즈칸은 1219년 호라즘 원정 직전 후계자 논의를 시작한다. 예수이카툰은 타타르부 출신의 칭기즈칸의 세 번째 부인으로 칭기즈칸이 가장 사랑했던 부인이다. 당시 금기였던 후계자 논의를 건의한다. 아직 죽기 8년 전, 칭기즈칸이 건강할 때였다. 칭기즈칸에게는 아들이 4명 있었다. 첫째 부인 부르테의 아들 4명 중 후계자를 결정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예수이카툰은 부담 없이 후계자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장남 조치, 차남 차가타이, 3남 우구데이, 4남 툴루이 였다. 조치와 차가타이가 싸움을 한다. 차남 차가타이가 장남 조치를 아버지의 자식이 아니라고 하며 불만을 제기했고 장남 조치는 근거 없는 비방이라 맞선다. 

부르테가 메르키트에게 납치됐다가 구조되어 낳은 장남 조치는 '메르키트의 사생아'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칭기즈칸은 장남 조치를 차별하지는 않았다. 두 아들의 싸움은 훗날 몽골제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거대한 싸움의 도화선이 된다. 

 

조치와 차가타이의 싸움은 칭기즈칸 손자들의 내분과 내전으로 이어진다. 

두 아들이 싸움을 하자 칭기즈칸은 아무런 말이 없이 지켜보기만 한다. 그러자 차남이 갑자기 3남 우구데이로 후계자를 정하자고 말한다. 우구데이는 온후하다며 지목한다. 갑자기 어부지리로 후계자가 된 우구데이는 차가타이와 손을 잡는다. 장남 조치는 막내 톨루이와 손을 잡는다. 네 아들이 두 세력으로 갈라지는 시발점이 된다. 

 

우구데이는 두 번째 대칸으로 즉위하자마자 아버지의 유언대로 즉시 전쟁을 시작한다. 임종 직전 칭기즈칸은 금나라 정벌에 대한 유언을 남겼다.  숙적 금으로 향한다. 칭기즈칸이 남겨둔 마지막 정복 전쟁의 시작이었다. 1211년 칭기즈칸이 생존해 있을 때 금나라를 공격한 적이 있었다. 1215년 수도 중도(베이징)를 점령하고 항복을 받아냈다. 금나라로부터 황금, 비단, 인질, 말 등을 제공받기로 약속받고 철수를 했다. 

 

몽골 철수 후 금나라는 수도를 황하 이남(지금의 개봉)으로 옮겼다. 황하를 방어선으로 몽골에 대항하겠다는 의미였다. 금나라를 배신에 화가 난 칭기즈칸이 다시 공격하려고 했을 때 호라즘에서 상인이 몰살되었다. 몽골군이 금나라를 다시 공격하지 못하고 호라즘으로 향했던 것이다. 

호라즘에서 돌아와 서하를 공격하던 중 서하전쟁에서 칭기즈칸은 사망했다. 

 

금나라는 지리적 이점에 의지했다. 금나라 수도 북쪽에는 황하, 서쪽에는 협곡사이의 천혜의 요새 동관이 있었다. 칭기즈칸은 동관을 우회하기 위해 남송과 연합해야 한다고 유언했다.  남송입장에서는 과거 금나라에 밀려 영토를 뺏겨서 금나라와 원수였다. 

 

금나라를 치기 위해 남송과 연합한다. 북, 서, 남 세 방향에서 협공한다. 금군은 우왕좌왕한다. 

삼봉산 전투는 1232년 2월 삼봉산에서 몽골군과 금나라 군이 맞붙은 전투이다. 삼봉산에서 금나라 군 15만 명이 전멸된다. 금나라는 무너졌고 마지막 금나라 왕, 애종은 자결한다. 1234년 1월 금나라는 멸망한다. 

20여 년간 몽골의 숙원 금나라 정벌은 우구데이가 완수한다.

 

칭기즈칸의 군주 호칭은 '칸'이었지만 우구데이 시대에는 군주 '카안'이라 호칭한다. 칭기즈칸은 유목민의 군주를 뜻하는 칸, 우구데이는 농경민을 아우르는 보편 군주 유일무이, 칸 중의 칸, '카안'이라 호칭한다. 

금나라 정벌 후 정주민, 농경민은 쓸모없다고 몽골 귀족은 주장한다. 한인들을 다 쫓아내고 목장을 만들자고 한다. 야울초재는 한인들을 살려두고 세금을 걷으면 이득이 된다고 말린다. 

 

우구데이 시대부터 몽골제국은 달라진다. 이전에는 약탈하는 유목국가였지만 이제는 정주지역을 관리. 통치하는 국가가 된다. 초원 유목지역과 농경 정주지역이 몽골제국을 이끌게 된다. 이렇게 되기까지 많은 조력자들이 있다. 거란 출신의 몽골제국 정치가이자 지식인 야율초재(1190~1244)는 몽골인에게 정주지역에서 통치하는 법을 알려준다. 무슬림과 위구르인들은 경제 지식을 알려준다. 재정의 계획과 운영 방법을 전수해 준다. 

외부인을 배척하지 않고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취한다. 

 

몽골제국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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