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제국, 최대 전성기를 만든 쿠빌라이 칸
1279년 쿠빌라이는 당대 최고 부국 남송을 멸망시켰다. 칭기즈칸을 비롯한 역대 몽골 제국 칸들의 염원이었던 중국 대륙 통일의 대업을 완수했다. 17년간 몽골에 머물며 생생한 기록을 남긴 마르코 폴로가 쿠빌라이를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뛰어난 군주이다"라고 기록했다.
중앙아시아, 중동, 유럽까지 천하를 호령하며 몽골제국 역사상 세상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한 쿠빌라이는 몽골제국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쿠빌라이 시대 몽골제국의 영토는 3,300만㎢이며 한반도 면적의 150배 정도이다. 쿠빌라이는 무역을 통해 경제를 활성화시켰고 몽골 고유 문자를 창제했다. 남송의 수도는 임안(현재 항저우)이었다. 쿠빌라이는 중국 남부지역의 높은 경제력 확보가 큰 과제였다. 당시 세계 1위 부국은 남송이었다. 몽골 인구는 100만 정도였고 중국인구는 1억 명이었다. 쿠빌라이가 남송을 점령하고 나서 100만 명으로 1억 명을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는 쿠빌라이의 중요한 과제였다.
쿠빌라이는 칭기즈칸의 손자다. 쿠빌라이 형 뭉케는 제4대 칸이었다. 1259년 뭉케가 남송 침공에 나섰다가 갑자기 전염병에 걸려서 사망한다. 쿠빌라이가 차기 칸 후보자로 거론되기 시작한다.
쿠빌라이 동생 아릭 부케도 후보자로 거론되고 있었다. 뭉케 칸은 4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너무 어렸다.
그래서 뭉케의 동생 두 명이 차기 후계자로 부상했다.
뭉케 칸이 남송정벌에 나서기 전에 아릭 부케에게 자신의 울루스와 몽골 군대를 위탁했다. 뭉케 칸의 가족들과 몽골 초원의 귀족들은 당연히 아릭 부케가 5대 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쿠빌라이를 지지하는 세력들은 초원의 전통도 중요하지만 정주국가 문화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쿠빌라이가 다음 칸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수도와 몽골 초원 지역은 아릭 부케를 지지했고 남쪽지역, 중원지역은 쿠빌라이가 우세했다. 이때 몽골 칸 후계자를 결정짓는 데 영향을 미치는 고려가 등장한다.
고려 태자는 뭉케 칸을 만나기 위해 몽골로 향했다. 30년 가까이 이어진 몽골과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뭉케 칸의 사망소식이 전해지고 다음 칸의 후계자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남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고려 태자는 쿠빌라이를 만나 항복 의사를 표시한다. 고려 태자 원종과 쿠빌라이의 운명적 만남이 몽골 차기 칸의 향방을 결정지었다.
쿠빌라이는 고려 태자를 매우 환대했다.
"고구려는 당 태종이 친히 정벌했는데도 굴복시키지 못했는데 지금 세자가 스스로 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 -고려사
쿠빌라이는 아릭 부케보다 정통성이 부족했다. 다음 칸 후계자로 내세울 만한 것이 필요했다. 몽골은 약 30년 가까이 고려를 복속시키려고 전쟁을 벌였지만 복속에는 실패했다. 강하게 저항했던 고려가 쿠빌라이에게 항복을 한 것이다. 쿠빌라이는 자신이 고려 복속을 받아냈다고 과시할 수 있었다. 다은 칸의 후보자로서 자질을 인정받을 수 있게 된다.
쿠빌라이는 당시 뭉케를 따라서 남송과 전쟁을 하고 있었다. 뭉케가 죽었으니 모든 군대가 본토로 귀환해야 하고 큰 이변이 없으면 다음 칸은 아릭 부케였는데 쿠빌라이는 군대를 유지한 채로 북쪽으로 진군한다.
이것은 반란인 셈이었다. 이때 하늘의 뜻인지 고려 태자가 나타나서 복속을 청하니 쿠빌라이에게 명분을 주었다. 쿠빌라이는 수도 카라코룸까지 가지 않고 쿠빌라이 근거지 개평에서 쿠릴타이를 개최한다. 쿠빌라이 근거지에서 지지 세력만 모여 쿠릴타이를 개최해서 스스로 칸이 된다.
고려 복속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아릭 부케의 정통성에는 역부족이었다. 뭉케 가족. 주요 귀족들이 아릭 부케를 지지하고 있었다. 정식으로 수도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를 열면 승리할 가능성이 낮았기 때문에 개평에서 열고 스스로 칸이 되었다.
아릭 부케는 쿠빌라이가 칸이 되고 한 달 후 초원에서 쿠릴타이를 열고 칸이 되었다. 몽골제국 역사상 최초로 2명이 대칸이 탄생했다. 1260년 내전이 발발하고 4년 간 지속된다. 전투는 막상막하였지만 전쟁이 끝난 후 쿠빌라이가 외교전에서 승리했다. 쿠빌라이는 러시아, 중앙아시아, 중동 지역 울루스를 포섭한다. 쿠빌라이는 포섭의 대가로 그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해 줬다. 쿠빌라이의 제안을 수락한 러시아, 중앙아시아, 중동 지역 울루스때문에 아릭 부케가 고립된다. 고립이 된 아릭 부케가 스스로 와서 항복을 하게 된다. 이것은 몽골제국의 완성이기도 하고 동시에 분열이기도 한다. 아릭 부케는 의문사당한다. 독살이라고 추정된다.
고려 태자 원정은 쿠빌라이에게 복속을 청하면서 요구를 한다.
"의관은 본국의 풍속을 따르며 고치지 않는다.
개경환도를 재촉하지 않는다.
고려에 있는 몽골군을 철수한다.
고려에 머무는 몽골 관리인 다루가치를 철수시켜라
사신은 몽골 조정에서만 보낸다
전쟁 중 몽골에 항복한 고려인들을 돌려보낸다."
놀랍게도 쿠빌라이는 마지막 조항만 조정하고 다 받아들인다. 몽골에 이미 들어온 사람들은 어쩔 수 없고 앞으로는 고려인은 받아주지 않겠다고 한다. 몽골에 들어간 사람들은 몽골에 항복한 다음 몽골군의 고려 침략을 안내했던 고려인들이었다.
1267년 쿠빌라이는 새로운 수도 '대도'를 건설하겠다고 발표한다. 제국의 새로운 수도에는 온갖 진귀한 물건을 들고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새 수도 천도에 이어 1271년 새로운 국호를 제정한다. 몽골의 새로운 국호는 '대원'으로 한다. 유목민의 국가를 넘어선 새로운 몽골제국이 탄생했다.
몽골식 나라이름 "예케 몽골 울루스"였는데 자신이 통치할 중국인들에게 인식하기 어려운 몽골식 국호였다.
1271년 중국 유학자 제안을 받아들여서 중국식 왕조 이름 대원(大元)을 선택한다.
쿠빌라이는 중국의 전통적 개념을 이용해 국호를 선정했다. 대원(大元)이라는 국호는 한문이 통용되는 지역에서만 사용한 국호이다. 제국의 공식 이름은 여전히 '예케 몽골 울루스'였다. 한문으로 번역을 한다면 대원(大元)이 된다.
쿠빌라이는 대도에 성을 지었지만 대도 성 마당에 게르를 짓고 거주했다.
몽골사람 쿠빌라이는 실내 거주가 불편했다. 대도 성은 통치할 중국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궁궐이었다. 쿠빌라이는 죽을 때까지 한문도 중국어도 배우지 않았다. 몽골인으로 살다가 몽골인으로 죽었다.
황실 제단을 조성할 때 몽골 초원의 풀, 흙을 사용했다. 중국식의 도성을 세운 이유는 한족을 안정적으로 통치하려는 수단이었다. 쿠빌라이는 영토를 약탈하고 넓히기에만 집중하지 않고 그 이상을 생각하고 있었다. 정복 이후 그 지역을 어떻게 안정적으로 통치할까를 고민한 군주였다.
수도를 카라코룸에서 대도(현재 베이징)로 옮긴 이유
몽골의 기존 수도 카라코룸은 초원지역에만 치우쳐 있었다. 대도는 유목지대와 정주지대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어 전략적 중요 지점이었다. 유목민과 정주민 모두 통치 가능한 중요한 전략적 지점이 된다. 대도는 바다와의 거리가 가까웠다. 바다부터 대도 성까지 이어지는 운하를 건설하여 수로를 구축한다.
대도는 식량, 물 자원이 풍족하지 않았다.
드디어 쿠빌라이는 남송을 공격한다. 1268년 남송군과 쿠빌라이군은 남송의 요충지 양양에서 맞붙는다.
하지만 10만 쿠빌라이군은 본격적인 전투 대신 토목공사를 시작했다. 남송군이 손 놓고 보는 사이 양양을 둘러싼 흙벽이 섰고 100km의 포위선이 이어졌다. 몽골군은 5년간 포위작전을 지속했다.
몽골군은 처음부터 기존의 속도전이 아니라 지구전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 전쟁은 몽골 전쟁사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기병이 동원되지 않았고 몽골군이 아니라 항복한 여진족, 거란족, 한족 등으로 구성된 보병부대에 중점을 두었다. 몽골군은 양양 성을 포위하고 고립시키는 공성전을 전개한다. 몽골군은 지난 전쟁에서 타국의 전투기술을 적용한다.
남송은 큰 하천이 많이 흐른다. 몽골이 이전에 점령한 지역은 건조한 지역이었다. 몽골의 기마부대는 초원지역에 제격이었다. 남송은 큰 하천이 흘러 습지와 숲이 많은 지형으로 몽골의 말도 견디기 힘든 더위와 습기가 있었다. 남송은 인구가 많고 경제력이 풍부했고 방어시설이 훌륭했다. 몽골군의 기존 전술로는 양양 성 함락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놀랍게도 몽골군은 재빠르게 전술을 변화시킨다. 양양 성을 둘러싸 남송 군을 5년이나 고립시킨다. 그러면서 몽골군은 자유롭게 왕래하고 시장도 열고 먹고 마신다. 오히려 성에 갇혀 있는 남송군은 답답해했다.
쿠빌라이는 남송지역을 파괴하고 싶지 않았다. 남송의 경제적으로 번화한 도시들을 보존해서 자신이 가지고 싶어 했다. 길어지는 소모전 끝에 쿠빌라이는 결단을 내린다.
쿠빌라이는 이슬람교도 기술자 2명을 전장으로 파견한다. 쿠빌라이는 정부 요직에 수학에 능통한 이슬람교도를 등용했다. 7~8세기부터 이슬람교도들은 삼각함 수 등 수학에 능통했다. 이슬람교도들은 하루에 다섯 번 무함메드 탄생지인 메카를 향해서 절을 해야 하는데 기도시간, 방향이 중요하다. 삼각함수를 통해 시간과 방향을 계산한다.
살라트는 하루에 다섯 번 몸을 깨끗이 하고 무함마드의 탄생지인 메카를 향해 행하는 이슬람의 예배로 무슬림의 5가지 의무 중 하나이다.
수학 실력을 바탕으로 놀라운 기계까지 발명한다. 12세기 이슬람교도들이 발명한 물 따르는 오토마타(자동기계장치)이다. 물이 한 방울 씩 떨어져서 탱크에 담기면 7분 후에 인형 팔이 기울어져 물을 따른다. 일정한 양의 물을 일정한 속도로 떨어뜨려서 작동한다.
이슬람 과학자들은 양양 성으로 가서 수학적 사고를 통해 신무기를 발명했다. 기존의 투석기와 다른 회회포를 발명한다. 기존 투석기는 사람이 줄을 끌어당겨 돌을 던진다. 많은 인력이 소모되고 짧고 일정하지 않은 사거리였다. 회회포는 사람대신 무거운 추를 활용해서 돌이 날아간다. 기존 투석기는 돌 50Kg으로 비거리는 약 100m 정도였다면 회회포는 돌 90Kg으로 비거리 약 600~700m였다. 회회포는 양양 성 전투에서 큰 역할을 했다.
쿠빌라이는 인종, 국가, 민족을 가리지 않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했다. 남송정벌에도 다양한 민족으로 된 군대를 활용했다. 쿠빌라이는 종교에서도 유연한 태도를 보인다.
쿠빌라이가 마르코 폴로를 만나서 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기독교들은 신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고
이슬람교도들은 마호메트라고 하고
유대인들은 모세라고 한다
또 우상 숭배자들(불교도)은 석가모니 부처라고 한다
나는 이 넷을 모두 존경한다"
-마르코 폴로 '동방견문록'
몽골은 회회포를 20여 대 동원해서 격렬하게 남송을 공격한다. 돌만 날린 것이 아니라 벌집도 날리고 전갈도 날렸다. 죽은 동물 사체도 날렸다. 결국 회회포의 위력에 1279년 남송은 무너진다. 정통성 논란이 늘 따라다녔던 쿠빌라이에게 남송 정벌은 큰 성과였다. 중국 전체 장악이라는 몽골제국의 염원을 달성했다.
유목민족 최초의 중국 전체 점령이었다. 남송을 정복하면서 몽골제국은 바다를 차지한다. 말을 타고 달리던 몽골인들이 바다로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몽골제국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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