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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몽골제국, 사돈이 된 고려

by 소시민스토리 2024.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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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 사돈이 된 고려

역사상 최고 정복자 칭기즈칸과 후예들은 아시아와 유럽 대국에 걸친 드넓은 영토를 지배하며 팍스 몽골리카 시대를 연다. 몽골제국 5대 칸 쿠빌라이는 1271년 국호를 대원으로 변경하고 남송정벌에 이어 바다 건너 일본으로 눈길을 돌린다. 쿠빌라이는 1차 일본 원정에 앞서 중대한 결정을 한다. 고려의 태자를 사위로 맞이하기로 한다. 고려와 몽골 황실 최초의 혼인으로 두 나라 관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몽골제국, 최대 전성기를 만든 쿠빌라이 칸

 

몽골제국, 최대 전성기를 만든 쿠빌라이 칸

몽골제국, 최대 전성기를 만든 쿠빌라이 칸 1279년 쿠빌라이는 당대 최고 부국 남송을 멸망시켰다. 칭기즈칸을 비롯한 역대 몽골 제국 칸들의 염원이었던 중국 대륙 통일의 대업을 완수했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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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4년 5월 원나라에서 열린 결혼식은 쿠빌라이의 딸 16세 쿠틀룩켈미쉬 공주의 결혼식이 열렸다. 몽골제국의 황제의 금지옥엽 딸과 결혼한 남자는 고려 태자 왕심이었다. 훗날 고려 제25대 충렬왕이 된다. 

왕심은 39세로 1남 2녀를 슬하에 둔 유부남이었다. 23세 연하 몽골 공주와 결혼했다. 

 

고려는 무신 집권기로 고려 왕권은 불안했다. 임연이 원종을 폐위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원종 폐위 사건은 1269년 6월 고려 무신 임연이 원종을 폐위시키고 안경공 왕창을 왕위에 옹립한 사건이다. 

당시 고려 원종의 태자 왕심이 원에 머물고 있었다. 쿠빌라이에게 고려 원종의 폐위 소식을 알린다. 쿠빌라이는 임연에게 압력을 넣어서 고려 원종을 복위시킨다. 복위하자 원종은 쿠빌라이에게 찾아가 군대를 주면 무신정권을 무너뜨리고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돌아오겠다고 하면서 내 아들과 당신 딸을 결혼시키자고 한다.

 

쿠빌라이는 지금은 청병 때문에 왔으니 다른 날 사신을 보내서 요청을 하면 그때 생각해 보겠다고 한다. 

청혼 후 원종은 태자 왕심을 몽골제국으로 보낸다. 몽골 '숙위'에 들어간다. 

숙위(宿衛)는 몽골 황제 호위 명목으로 속국의 왕족들을 볼모로 머물게 하는 제도이다. 경호 임무이므로 몽골황제의 측근이 될 기회이기도 했다.

고려 왕위 후계자의 통과 의례로 몽골 숙위 생활을 했다. 쿠빌라이는 태자가 숙위 생활을 하던 중에 고려와 국혼을 허락했다. 

 

쿠빌라이는 일본 원정을 생각하고 있었다. 일본 원정을 위해 고려의 도움이 필수였다. 아직 남송을 정복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남송과 고려의 연합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국혼을 결심한 배경이 될 수 있다. 고려와 몽골 이해관계가 일치해서 국혼이 성립됐다. 

쿠틀룩켈미쉬는 쿠빌라이가 45세에 낳은 딸이다. 늦둥이 딸을 고려로 보내는 큰 결정을 했다. 

몽골 황실은 한 번 맺은 혼인 관계는 대대로 이어간다. 1270년~1274년 청혼에서 결혼까지 걸린 시간은 4년이었다. 고려 원종이 몽골 황실에 청혼 당시 고려 무신정권의 시절이었다. 무신정권을 무너뜨리고 삼별초가 진도, 제주도로 가면서 항쟁을 하는데 항쟁이 끝난 다음에 고려와 국혼을 수락한다. 

삼별초 대몽 항쟁(1270~1273)은 원종의 개경환도 명령에 반발하여 삼별초 군대가 일으킨 반정부. 반몽골 항쟁이다. 

 

고려 왕실은 충렬왕부터 공민왕까지 몽골 공주와 혼인한다. 쿠다(사돈 관계) 관계를 통해서 정치적 동맹을 맺는 몽골사회에서 칸의 가문과 결혼한다는 것이 놀랍다. 대칸의 친딸이 타국인과 혼인을 한 것은 고려가 처음이었다. 태자 왕심은 국혼 결정 후 고려로 귀국한다.

 

1272년 3월 쿠빌라이에게 혼인을 허락받고 고려로 돌아온 태자 왕심은 몽골인 모습으로 등장했다. 몽골식 개체 변발을 하여 앞머리와 좌우 머리만 남기고 정수리 부분을 삭발했다. 양쪽 머리를 두 가닥으로 땋아 내렸다. 이와 같은 태자의 모습을 본 고려 백성들은 엄청난 충격에 빠졌고 모두 탄식하였고 심지어 우는 사람도 있었다. 1274년 5월 쿠빌라이의 사위가 된 고려 태자 왕심은 같은 해 제25대 충렬왕으로 즉위했다. 

 

몽골은 태자 왕심에게 몽골식를 강요하지 않았고 태자 스스로 변화했다.

태자 왕심은 자신이 몽골 지배층과 동화된 모습을 보이면서 몽골의 후원과 지지를 고려 관리들에게 보이려는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다. 

고려 신하들의 충성을 이끌어 내기 위해 충격적인 개체 변발을 한 모습으로 귀국했다.

 

고려에 시집온 제국대장공주는 본명은 쿠틀룩켈미쉬였고 음역어로 '홀도로게리미실'이었다. 제국대장공주는 사후에 받은 시호이다. 대장공주는 황제의 고모에게 붙이는 칭호다. 제국대장공주가 사망 후 조카였던 원나라 무종이 올린 시호이다. 당시 고려에서 가장 힘이 센 여성이었다. 몽골 대칸의 딸인 대장공주는 고려로 시집와서 충렬왕의 첫 부인을 밀어내고 정비가 되었다. 

제국대장공주의 아들 출산을 축하하는 잔치에서 다툼이 벌어졌다. 자신이 왕비이며 자신의 아들이 다음 후계자라고 될 것이라고 하며 충렬왕의 첫 부인과 다툼을 벌인다. 제국대장공주는 1279년 충렬왕 첫 부인의 아들을 출가시킨다. 

 

제국대장공주와 충렬왕이 사찰을 방문했다. 시종들의 숫자가 기대보다 적었다. 제국대장공주는 지팡이로 남편 충렬왕을 때렸다. 사냥에 빠진 충렬왕에게 간언 하기도 했다. 민폐를 끼치니 사냥을 줄이라고 충고한다.

고려에 대한 몽골의 직접적인 통제가 드러난다. 고려의 정치제도 2성 6부를 첨의부 4사로 격하시킨다. 왕실의 용어들, 태자를 세자로 폐하를 전하로 격하시킨다. 

 

25대 충렬왕~30대 충정왕까지 충忠이 들어간 고려 왕들의 이름이다. "왕'으로 격하된 시호를 쓰게 된 것이다. 이전에는 왕의 이름을 정할 때 조 祖, 종 宗의 묘호를 썼었다. 

 

충렬왕은 몽골제국 황실의 사위로서 고려 왕의 위상에는 변화가 있었다. 황실의 사위 '부마'는 결혼한 공주 혈통으로 결정한다. 제국대장공주는 대칸 쿠빌라이의 딸이며 칭기즈칸의 증손녀이다. 몽골제국에서 충렬왕의 서열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칸 선출 등 중요 안건을 논의하는 몽골의 부족 회의, 쿠릴타이에 충렬왕도 참석 권한을 갖게 된다. 몽골 황실의 주요 일원이 되었다. 기록에는 황제가 마련한 연회에서 7위 서열이었고 공주 곁에는 감히 앉는 자가 없었다. 고려는 '사위의 나라'로 대접을 받았다. 고려에 흉년 등 재난상황에서 중국 강남쌀 10만 석을 보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쿠빌라이는 고려를 일가一家처럼 여겼다. 

 

"지금 짐은 고려를 일가一家처럼 여긴다, 너희 나라에 만일 환난이 있다면 짐이 어찌 감히 구원하지 않겠는가?" <고려사> 열전 이장용 원종 8년 (1267년)

 

충렬왕은 스스로 변발까지 하며 몽골제국의 부마의 지위를 이용해서 고려 국왕의 지위를 높인다. 몽골에서 고려의 사신이 왔을 때 사신을 대할 때는 몽골의 부마로서 대하고 '실리 외교'를 한다. 충렬왕이 왕으로 즉위한 지 4년 만에 원나라를 방문해 쿠빌라이와 회담한다. 

고려에 주둔하고 있는 몽골군을 전부 철수시키라고 요구했고 쿠빌라이는 요청을 수락한다.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기 위해 파견한 '다루가치'를 폐지하라고 요구했고 부마로서 할 말을 다한다. 

몽골은 고려의 호구조사 결과 보고를 요구했었다. 몽골이 고려에서 세금을 걷으려는 목적이었다.

담판을 지어 호구 조사 보고를 폐지한다. 너무나 무리한 요구를 하면 들어줄 수 없다고 한다.

 

고려의 지위를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원나라 황제 무종이 말을 한다.

"지금 천하에서 백성과 사직이 있고 왕 노릇을 하는 것은 삼한(고려)뿐이다"

-<고려사> 세가 충성왕 2년 (1310년) 7월 

강대한 몽골제국을 상대로 고려가 국가 체제를 유지하면서 독립성을 지키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 원 세조 쿠빌라이의 외손자이며 칭기즈칸의 고손자이다. 이름은 '왕원', 몽골식 이름은 "이질부카'였다. 충렬왕의 아들, 고려 제26대 충선왕이 된다. 

1278년 고려 세자 왕원은 4세에 원나라를 방문한다. 1292년 18세부터 원에서 숙위 생활을 한다. 고려를 오가며  24세까지 원에서 생활했다.

 

 

 

이때는 몽골 쿠빌라이의 전성시대였다. 고려 세자 왕원은 원의 최전성기를 목격했다. 쿠빌라이 등 원 황실은 고려 세자 왕원을 총애했다. '이질부카' 몽골식 이름도 원 태자비가 직접 지어준 이름이다. 고려 세자 왕원의 결혼 상대는 몽골 황실 직계 여성, 원 황태자로 책봉됐다가 요절한 쿠빌라이의 차남 친킴의 맡아들의 딸이었다. 침킴의 손녀 '부다시리'였다. 한자로는 '계국대장공주'이다.

고려 세자 왕원은 쿠빌라이의 외손자, 몽골 황실의 부마가 된다. 

 

몽골제국의 최대 전성기를 이끈 5대 칸 쿠빌라이는 1294년 79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쿠빌라이 사망 전 그이 아들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 황위를 이을 아들이 없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몽골제국의 6대 칸으로 쿠빌라이의 손자 테무르가 원나라 성종으로 즉위한다. 성종 테무르의 즉위는 고려 왕실의 중대한 변화를 초래한다. 

 

몽골제국 6대는 몽골식 이름으로 '카안 테무르'이고 중국식 칭호는 원나라 성종이다. 

성종은 칭기즈칸 후손들의 내분을 정리하고 쿠빌라이가 하고 싶어 했던 일본 원정을 중지한다. 국내외적으로 평화를 이룬 황제이다. 고려 세자 왕원의 외사촌형이 원나라 황제가 되었다. 

 

성종은 즉위 후 고려 세자 왕원을 고려로 돌려보낸다. 세자 왕원을 높은 관직에 임명해서 보낸다. 고려 최고 정치기구 도첨의사사의 최고 관직은 '판사'였다. 판사 위 '영사'라는 관직을 신설해서 세자 왕원을 임명한다. 영사는 명예직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세자 왕원은 출근을 해서 일을 한다. 그러자 국왕 충렬왕의 역할, 지위가 위협을 받게 된다. 더구나 충렬왕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던 쿠빌라이가 죽었고 3년 후 충렬왕 부인 제국대장공주가 사망했다. 새 황제 원나라 성종과 충렬왕은 서먹한 사이였다. 성종은 1294년 즉위 당시 30세였고 충렬왕은 59세였다. 나이 많은 고모부였다. 게다가 피 한 방울 안 섞인 고려사람이었다. 

 

충렬왕은 고려 국왕의 지위를 이용해 외교적 실리를 추구하기 시작한다. 조카 원 성종에게 가서 몇 가지 요구를 한다. 삼별초 항쟁 이후 원이 지배하고 있던 탐라(제주도)를 돌려달라고 하여 돌려받는다.

요동 지방 고려인을 귀환시켜 달라고 요구하고 원의 최고 관직 태사 중서령을 내려 달라고 요구한다. 

성종은 충렬왕의 요구들이 불편했고 고려 국왕을 바꿀 시기라고 생각한다. 

 

충렬왕 교체 계기는 1297년 제국대장공주의 죽음에 있었다. 어머니 제국대장공주의 장례 직후 세자 왕원이 행동에 나선다. 아버지 충렬왕이 총애했던 무비를 처형한다. 어머니의 죽음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무비 때문이라고 하면서 무비뿐만 아니라 충렬왕의 수족들을 모두 제거하고 귀향을 보내버린다.

 

"무비 때문이었다고 생각하여 그를 죽였다, 또한 환관 도성기와 최세연, 전숙, 방종저, 중랑장 김근을 죽이고 그들 무리 40여 명을 유배 보냈다"

-<고려사> 세가 충렬왕 23년 (1297년) 7월 

 

63세였던 충렬왕은 아들에 의해 무비와 측근들을 잃게 되자 환멸을 느끼며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충렬왕의 양위를 성종은 쉽게 수락한다. 아버지 충렬왕은 양위를 했고 아들은 고려 제26대 충선왕으로 24세 나이에 즉위한다. 충선왕은 8개월 만에 폐위당한다. 몽골 계국대장공주와 충선왕은 혼인했었는데 남편으로서 부부의 도리를 저버렸고 폐위당했다. 

 

"사람들은 "왕께서 공주에게 장가들 고부터 부부의 도리를 꺼렸다"라고 말하였다"

-<고려사> 후비열전 충선왕비 계국대장공주

 

충선왕은 계국대장공주와 혼인 전 이미 4명의 부인이 있었다. 그중 가장 총애한 고려 여인은 조비였다. 계국대장공주의 질투를 불렀다. 원나라 태후에게 일러바친다. 

 

'그 편지에 이르기를 "조비가 계국대장공주를 저주하기 때문에 왕께서 공주를 사랑하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고려사> 후비열전 충선왕비 계국대장공주 

 

원나라로 조비 일가족이 압송당한다. 충선왕의 인장을 몰수하고 충렬왕에게 왕의 자리를 건네준다. 

충선왕의 폐위의 표면적 원인은 '조비무고사건'이다. 이면에는 정치적인 이유가 있다. 충선왕은 즉위한 후 아버지 충렬왕의 측근을 숙청했다. 고려의 정치 제도 개혁을 시도했다. 하지만 원과 상의하지 않고 진행했다. 원의 입장에서는 충선왕의 독단적인 행동이 불안했던 것이다. 

충선왕은 즉위 8개월 만에 폐위되고 이후 10년간 원나라에서 생활한다. 

 

1307년 원나라 수도 대도에서 원 황제 성종과 성종 황후 '불루간', 성종 형수 '다기'가 엃힌 사건이 발생한다. 성종은 마음속 비밀이 있었다. 자신의 둘째 형이 죽은 뒤로 혼자 남겨진 형수 '다기'가 신경 쓰였다. 

몽골유목 사회에서는 수혼제가 있었다.

수혼제는 사망한 남자 가족 (아버지, 형, 숙부 등)의 아내들을 자신의 아내로 거두는 제도(친모는 제외)이다. 

수혼제의 배경은 혹독한 몽골 초원 생활에서 여성 혼자 가정을 꾸려나가기 어려운 상황을 감안해 생긴 제도이다. 

 

성종의 아내 불루간 황후는 수혼제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때마침 병약한 성종이 몸져눕자 블루간 황후는 실권을 장악하고 다기와 그의 둘째 아들을 멀리 유배 보낸다. 갈등으로 치닫고 있던 두 여인 사이에 한 남자가 나타난다. 10여 년 전 폐위된 고려 충선왕이었다. 

원 성종과 황후 불루간 사이에는 아들이 먼저 죽어서 후계자가 없었다. 형수 다기에게는 아들이 두 명 있었다. 카이샨과 아유르바르와다였다. 성종이 아프니까 불루간이 섭정을 하면서 손윗동서 다기와 둘째 아들 아유르바르와다를 멀리 유배보낸다. 첫째 아들 카이샨은 멀리서 국경수비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1307년 원 성종이 사망했다. 이때부터 치열한 황위 쟁탈전이 벌어진다. 차기 카안으로  세명의 유력한 후보들이 떠오른다. 블루간 황후 측 성종 사촌 아난다, 다기의 두 아들 카이샨과 아유르바르와다였다.

아유르바르와다가 먼저 기선을 제압했다. 1307년 3월 쿠데타를 성공시킨다. 그러면서 블루간 황후와 아난다를 숙청한다. 형 카이샨과 황제 자리를 두고 경쟁하게 된다. 극적인 타협으로 형 카이샨이 황제로 즉위한다. 

원나라 3대 황제 무종, 몽골제국 7대 카안이다.

 

충선왕은 원으로 들어가 10년 동안 숙위했는데 무종(카이샨), 인종(아유르바르와다)이 황제로 즉위하기 전 충선왕과 함께 같이 자고 일어났으며 밤낮으로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 인종을 받들어 내란을 일소하고 무종을 맞아들여 옹립했는데 그 공을 제일로 삼아 충선왕은 심양왕에 책봉되었다. 인종은 황태자가 되고 충선왕을 태자태사(황태자의 스승)로 삼았다. 충선왕은 무종과 인종의 즉위에 어떤 역할을 했다.

 

충선왕은 고려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 심양에 심양왕으로 책봉된다. 1308년 7월 고려 충렬왕이 사망한다. 고려왕 자리도 차지했다. 심양왕이면서 고려왕이 되었다. 충선왕은 권력의 중심지 원의 수도에 머문다.

충선왕은 고려에 자신의 측근을 보낸다. 신하들에게 교지(명령문서)를 전해 고려를 통치하는 전지정치를 한다. 나중에 몽골 황실에서 두 가지중 하나만 선택하라고 압박을 했다. 내심 고려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하지만 충선왕은 뜻밖에도 고려왕을 그만두고 심양왕을 선택한다. 대신 아들 충숙왕을 고려에 왕으로 즉위시키고 뒤에서 조정한다. 그러면서 원 대도에서 머무르며 황실 정치에 개입한다. 원에 과거제도를 시행하게 한다. 수도인 대도에 지은 서재, 만권당을 설치해서 당대의 유명 학자들을 만권당에 집결한다. 충선왕은 한족 학자가 몽골 조정에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이 되어 줄 수 있었다. 원에서 충선왕은 자신의 입지를 넓혀 나간다. 

 

몽골제국 황제 계보 

태조 칭기즈칸 

태종 우구데이

정종 구육

헌종 뭉케

세조 쿠빌라이

성종 테무르

무종 카이샨

인종 아유르바르와다

영종 시데발라

태정제 이순 테무르

문종 톡 테무르

명종 코실라

문종 톡 테무르

영종 이린친발

혜종(순제) 토곤 테무르

 

 

 

무종은 즉위한 후 4년 만에 31세 나이로 급사한다. 1311년 원 인종이 즉위한다. 형 무종 즉위 당시 동생 인종과 협상한 내용이 있었다. 형 무종은 동생 인종을 황태자로 책봉하는 대신 자신의 아들이 그다음 황위를 잇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러나 인종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준다. 

 

원 무종 급사 관련해서 독살 의혹도 존재한다. 인종은 약속을 어기고 자신의 아들 영종에게 황위를 물려준다. 그러나 영종은 얼마 못 가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당한다. 무종부터 마지막 원 황제 혜종의 시기까지는 단 26년 정도이다. 그 사이 등장한 황제는 7명이다. 정치적 분열이 심화되고 원나라는 내리막길로 접어든다. 

 

고려 후기의 정치는 몽골제국과 긴밀한 연관을 가진다. 고려가 몽골제국의 부마가 되면서 왕실 권위를 회복했고 더 중요한 국체를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몽골에 의해 왕위가 마음대로 교체되고 몽골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몽골제국의 붕괴는 고려에 큰 변동을 가지고 올 가능성이 높아진다.

 

몽골제국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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