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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몽골제국 멸망과 고려 공녀 출신 기황후

by 소시민스토리 2024.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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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 멸망과 고려 공녀 출신 기황후 

"붉은 볼 보조개에 버들처럼 가는 허리

복이 바로 화근일 줄 그 어찌 알았으랴

고려의 기황후가 책봉하던 해에는 

6월 한여름에도 음산해 대설이 날렸어라"

 

한시의 주인공은 기황후이다. 고려 출신으로 원나라의 대원 황후가 되었다. 천하를 호령한 몽골제국 역사 속에서 한 획을 그었던 기황후의 몽골식 이름은 '올제이 쿠툭'이었다. 

 

몽골제국, 사돈이 된 고려

 

몽골제국, 사돈이 된 고려

몽골제국, 사돈이 된 고려역사상 최고 정복자 칭기즈칸과 후예들은 아시아와 유럽 대국에 걸친 드넓은 영토를 지배하며 팍스 몽골리카 시대를 연다. 몽골제국 5대 칸 쿠빌라이는 1271년 국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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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궁사는 원나라 궁중의 비사를 담은 작품이다. 살구꽃처럼 하얀 얼굴, 복사꽃처럼 윤기나는 붉은 뺨, 버들 같은 허리를 가진 기황후는 원나라 제왕의 마음을 훔쳤고 화근이 되었다. 6월에도 대설이 내리는 패망의 원흉으로 비난받고 있다. 

원사열전의 기록에는 기황후는 영리하고 교활해 나날이 총애를 입었다고 되어있다. 일반적으로 기황후때문에 원나라가 망했다는 이런 이야기는 한족들이 한 말이다. 원나라 멸망의 빌미를 제공한 사람의 이미지를 덧 씌운다. 몽골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몽골사학계에서 기황후에 대한 평가는 대원제국 말기의 권력 투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정국을 더 혼란하게 만든 인물로 평가한다. 

기황후가 권력 투쟁에 나선 이유는 극심한 권력 투쟁의 조정에서 고려 출신 혈통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노력한 것이다. 

 

 

기황후는 남편이 대원 순제이고 행주 기 씨 집안의 8남매(5남 3녀)중 막내딸이었다. 기황후는 고려에서 차출된 공녀출신이다. 

 

 

몽골제국은 4개 울루스의 연맹 형태로 칭기즈칸의 후손으로서 연대감, 일체성을 유지하면서 지속이 되고 있었다. 그중에서 카안 울루스(대원)는 4개 울루스의 종주국에 위치한다.  기황후가 카안 울루스의 공녀로 갔다. 

고려는 대원으로부터 정치적 관섭을 받았다. 여러 가지 물자를 수탈당한다. 인적 수탈, 환관과 공녀로 수탈당했다. 공녀는 고려에 주둔한 몽골군과 결혼할 여성을 징발했는데 반역한 사람들의 처, 과부, 승려의 딸 등이 공녀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가면서 일반 여성도 어린 나이에 징발이 된다. 

 

공녀가 하는 일은 운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다. 비참하게 노예같은 삶은 살 수도 있고 일부는 궁에 들어가서 궁녀가 되기도 하고 원 고위 관료와 결혼하기도 했다. 장래가 불안해서 공녀 징발을 피하기 위한 고육책으로 남장을 하거나 승려가 되기도 한다. 조혼을 선택하기도 한다. 고려 후기에 조혼의 풍습이 생겼다. 

전쟁 중에 약탈을 한 기록은 있지만 전쟁이 없을 때 다른 나라의 공녀에 대한 기록은 없는 것으로 보아 고려에서만 공녀를 징발한 것으로 보인다. 

공녀는 고려와 원 관계에서 고려의 가장 비참한 모습이다. 

시간이 지난 후 달라진다. 일부 계층은 딸을 공녀로 보내기도 한다. 일부가 고위 관료와 결혼해서 권세를 누리기도 하자 자기 딸을 공녀로 보내기도 했다. 특히 기황후가 등장한 이후로는 공녀를 보내려는 사람이 늘어났다. 

 

기황후가 황후가 될 수 있었던 이유

 

기황후를 간택한 사람은 대원 순제였다. 1333년 순제가 즉위한 해 기황후가 황궁에 들어온다. 황궁에 들어올 때 고려인 환관의 추천을 받았다. 순제의 차 시중을 담당했다. 순제는 즉위 당시 10대 소년이었다. 순제는 당시 권력이 부족해 신료들이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궁녀 기 씨는 순제의 안식처가 되어 주었을 것이다. 

1339년 고려 출신 후궁 기씨와 원대 순제사이에서 아들 아유시리다라가 탄생한다. 아들의 탄생으로 고려인 기씨는 제2의 황후자리에 오른다.

 

13년 뒤 기황후의 아들 아유시리다라는 제국의 황태자가 된다. 토곤 테무르 칸, 순제는 3명의 황후가 있었다. 기황후는 세 번째였다. 두 황후 소생 아들이 없었던 상황이었다. 기황후의 아들이 맏아들이 되어 황태자의 자격이 주어졌다. 쿠빌라이 이후 황태자 선택이 달라졌다. 쿠빌라이는 칸이 된 직후 맏아들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그런데 맏아들이 일찍 죽는다. 둘째 아들을 황태자로 책봉을 했는데 역시 사망했다. 몽골제국 황제 계보는 직계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복잡하다.

 

 

세조 쿠빌라이가 1294년 사망하고  혜종이 즉위한 해가 1333년이다. 그 사이 39년 동안 8명의 칸이 등장한다. 평균 재위기간이 5년 미만이었다. 칸이 암살되거나 독살되기도 했으며 30~40대에 죽었다. 대원제국은 황제 계승 원칙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다. 

 

기황후 아들 아유시리다라가 황태자가 되며 대원 제국 말기 대파란이 예고되는 순간이었다. 기황후는 제2황후가 된 이후에 자정원을 설치한다. 자신의 권력기반이면서 재정 기반이 되었다. 자정원은 원래 황태후의 휘정원의 보좌기구였다. 기황후는 휘정원을 흡수해 자정원으로 개편한다. 자정원은 기황후의 세력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 기황후는 고려 출신 환관들을 자정원에 배치한다. 

 

1356년 권신 카마를 앞세워 양위를 청한다. 순제에게 태상황 자리로 갈 것을 요청한다. 황태자의 나이는 16세였고 순제는 36세였다. 순제의 첫 번째 황후는 독살된다. 기황후가 남편 순제에게 양위할 것을 청한 일은  첫 번째 내선시도였다. 내선은 황제가 살아 있는 동안 아들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주는 일이다. 세 번이나 내선 시도를 했다. 첫 번째 내선 시도 이후 제안을 한 카마는 처형된다. 1359년  두 번째 내선을 시도했다. 화가 난 순제는 기황후를 두 달간 보지 않았다. 기황후가 제2황후가 된 지 25년 뒤 제1황후로 책봉이 된다. 

 

순제는 몽골제국 황제 중 재위 기간이 37년으로 가장 길었다. 하지만 순제의 황권은 세지 못했다. 기황후의 자정원의 힘을 이용해 황권을 보호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황후를 파면할 경우 황후의 적대 세력과 대항해야 했다. 황제를 보호해주고 있는 기황후 세력을 축출하지 못한 결정적 이유가 된다. 

 

순제의 권력에 견줄만큼 위세를 펼친 인물이 있었다. 순제 즉위에 결정적 역할을 한 권신 바얀이었다. 

황제의 스승이자 최고의 명예직 태사를 지냈고 대원의 최고관직 중서우승상, 군을 통솔하는 녹군국중사 등을 맡았다. 권신 바얀은 모든 권력을 독식하고 있었다. 권력을 독식한 권신에 의해 원나라는 국운이 쇠해진다. 

 

원 권신의 횡포는 바얀 한 사람뿐만 아니었다. 태자 제도가 유명무실해지고 서로 황제가 되려고 하는 극심해진 혼란 속에 누가 나를 황제로 만들어줄까를 보고 그 뒤에 줄을 서는 지경까지 오게 된다. 

황제보다 권신 정치의 힘이 세지는 원나라 말기가 되었다. 

 

또 다른 권신 톡토는 바얀의 조카이다. 바얀의 전횡에 위기를 감지하고 순제와 모의해 바얀을 축출한다. 

톡토는 순제 조정의 1인자로 올라선다. 톡토는 공녀 기 씨의 제2황후 등극에 조력하였다. 바얀은 고려인 기씨의 황후 등극을 결사 반대했다.

13년 후 아유시리다라의 황태자 책봉을 논의할 때 톡토는 미온한 태도를 보인다. 기황후와 톡토의 갈등이 시작된다. 

 

1330년부터 1369년까지 황하강 중하류에 7번의 제방이 터져 붕괴되었다. 주변 마을이 초토화되면서 사람들의 삶이 피폐해진다. 1351년 황하 범람은 황하의 물길이 바뀔 정도로 큰 범람이었다. 보수를 위해 백성 15만 명의 백성과 군 2만 명이 동원되었다. 동원된 농민은 한족이었다. 한족 농민의 반감이 증폭되었다. 설상가상 전염병이 창궐하여 몽골제국 전역으로 확대된다. 몽골 인구 1/3이 전염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때 머리에 붉은 두건을 쓴 농민, 홍건적의 난이 일어난다. 

홍건적의 난은 몽골의 지배에 항거하여 일어난 한족의 농민반란이다. 

순제는 홍건적을 진압하기 위해서 권신 톡토를 파견한다. 조정 최고 관료가 직접 출정할 만큼 급박한 상황이 되었다. 톡토가 난을 제압하고 있는 와중에 몽골황실에서는 톡토의 적대 세력 카마와 기황후가 계책을 세운다. 톡토가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는 와중에 톡토는 관직에서 파면된다. 

 

난을 일으킨 한족 입장에서는 홍건적이 아니라 스스로 홍건군이라고 칭한다. 톡토의 해임 후 몽골군은 괴멸된다. 800만 대군이 괴멸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몽골군은 홍건군에 대응하지 못한다. 홍건적이 세력을 키울 때 주원장이 등장했다. 

 

 

주원장은 명나라 태조이며 원나라를 몰아내고 명나라를 세웠다.

주원장은 전쟁의 와중에 주변의 홍건군을 규합해서 세력을 넓혀간다. 

몽골제국의 국운 쇠락을 대외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발생한다. 고려 공민왕과 기황후는 갈등을 겪고 있었다. 원나라에서 기황후가 득세하자 고려에서는 기씨 가문이 위세가 등등해졌다. 특히 기황후 오빠들의 횡포가 심했다. 특히 기철은 공민왕에게 시를 지어 올릴 때 자신을 신하라고 칭하지 않았다. 기원은 말을 왕과 나란히 타고 간다. 같은 위치로 동등하다는 것이다. 1356년 고려 궁에서 잔치가 열렸다.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은 기철을 포함해서 친원파 사람들이 주축이 되었다. 이들이 도착하자마자 매복해 있던 장사들이 망치로 때려죽인다. 공민왕은 친원파를 싹 제거해 버린다. 

 

 

홍건적이 원의 존망을 뒤흔들고 있을때 틈을 타서 기황후 인척을 제거했다. 이 소식을 듣고 기황후는 치를 떨며 복수를 다짐하며 고려를 치기로 한다. 기황후의 고려 침공은 참패였다. 고려에는 최영장군과 이성계 장군이 버티고 있었다. 기황후가 고려를 침공하는 데 걸린 시간은 무려 8년이었다.  군사를 끌어모으고 준비하는데 8년이 걸린 것은 군사력이 약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원 제국의 상황이 기황후의 고려 침공을 통해 대외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주원장은 무서운 기세로 원을 압박한다. 1368년 순제와 기황후, 황태자는 수도 대도를 떠나 북쪽으로 대피한다. 천하를 호령했던 대원제국은 종말을 향해 나아갔다. 

순제는 북쪽으로 1년 반 정도 도피생활을 하다가 1370년 응창에서 51세 나이로 사망한다. 

 

 

순제 사망 후 칸이 된 기황후 아들 아유시리다라는 1378년 8년 만에 사망한다. 기황후 행방은 관련 기록이 없다. 기록에 따르면 기황후는 북쪽으로 도망을 가면서도 고려를 언제 침공할 것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대원제국은 망했지만 몽골제국이 망한 것은 아니다. 몽골제국은 4개의 울루스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원(카안 울루스)은 멸망했고 나머지 3개의 울루스는 개별 역사를 지닌다. 

훌레구 울루스(1335년 해체)와 차가타이 울루스(1347년 분열)는 대원(카안 울루스)보다 먼저 멸망하거나 분열되었다. 러시아 지역에 있었던 주치 울루스는 오래 지속된다. 15세기 중반 1480년에 모스크바 공국이 러시아 제국이 등장할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킨다. 몽골의 잔재가 가장 오랜 기간 남아있는 곳이 러시아지역이다.

 

명나라가 중원에 들어서지만 몽골인은 완전히 멸망한 것이 아니라 북쪽으로 후퇴했다. 후퇴한 몽골인들은 명나라와 계속 대치한다. 심지어 15세기 중반 명 황제가 몽골의 포로로 잡히는 '토목의 변'이 일어나기도 했다. 

토목의 변은 몽골 오이라트족이 명 영종을 포로로 잡은 사건이다. 

청 제국의 초대 황제 홍타이지가 조선을 침략 하기전에 몽골을 점령한다. 1635년 그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몽골 칸으로부터 대원전국 이름의 금도장을 획득한다. 칭기즈칸 이후 전해지던 제국의 옥새였다. 

 

칭기즈칸의 정통성을 잇는 황제가 되겠다고 해서 황제에 즉위하고 나라 이름을 대청大淸으로 변경한다. 

주변 국가들은 다 인정을 했지만 청의 정통성을 조선만 인정하지 않았다. 병자호란의 원인이 된다.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유목국가가 명맥을 이어오다가 최후의 유목 국가 준가르가 18세기 청나라에 점령당하면서 중앙아시아 유목 역사는 막을 내린다. 준가르의 지역은 현재 중국의 신장 위구르 지역이다. 

 

몽골제국은 1206년 몽골 울루스가 건설되고 1388년 카안 울루스가 멸망했으니 182년 동안 지속됐다. 

몽골제국이 멸망 후 유라시아 대륙에 거대한 제국이 등장했다. 동쪽에는 명나라(1368~1644). 중아아시아의 티무르제국(1370~1507), 중동의 오스만 제국(1299~1922), 북쪽에 모스크바 대공국-레시아제국(1283~1917), 인도의 무굴제국(1526~1857)이 만들어진다.

 

거대 제국은 사라진 몽골제국과 경쟁한다. 몽골제국을 뛰어넘기 위해 끊임없이 영토를 확장하고 싸움을 한다. 그러면서  중앙아시아는 커다란 전쟁터가 되었고 몽골 제국과는 다른 새로운 환경을 만들지 못했고 바다로 진출하지 못하게 됐다. 몽골 제국 밖에서 몽골제국으로부터 여러 가지 정보를 얻고 문화를 교류했던 유럽의 나라들은 몽골제국 이후에 대항해 시대를 개척했다. 

 

반면 몽골지역 안에 있던 제국들은 내륙 지향적 정책을 펼치면서 새로운 방향을 잡지 못했다. 몽골의 자취를 밟은 거대 국가들은 다음 세기에는 유럽과의 경쟁에서 도태된다. 

몽골제국은 강력한 기마군단을 형성해 농경 국가.해양을 장악했다. 유례없는 광역 네트워크를 만들어내서 왕래하고 세계에 대한 정보를 축적했다. 

 

 

예를 들면 서아시아의 지리 지식이 몽골제국을 통해서 한반도에 전파되었다.  그 결과 1402년 조선에서 위대한 유산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탄생한다. 지도에는 한반도, 중국, 아라비아 반도, 아프리카 대륙까지 그려져 있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이 아프리카까지 방문할 일은 없었다. 몽골제국을 통한 지리 지식의 전파를 통해서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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