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제국, 끝없는 정복 전쟁 유럽 침공
몽골은 러시아를 침공한다. 1237년 러시아 랴잔 공국에 몽골군이 쳐들어왔다. 몽골군은 항복을 하라고 위협했고 랴잔군(러시아)과 몽골군을 전투를 벌인다. 랴잔 공국은 6일 만에 함락당한다. 랴잔 공국에 있던 루스(Rus)는 러시아의 어원이 된다. 몽골이 러시아를 침공한 이유가 있었다.
세금을 징수할 수 있고 물자를 징발할 수 있고 인력을 징발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서방으로 침공을 나선 것이다. 몽골군의 러시아 침공은 중요한 변화의 계기가 된다. 칭기즈칸에서 우구데이 칸 이후 세대가 교체됐고 전쟁 목적이 변화했다. 칭기즈칸 때는 약탈, 파괴, 살육이 목적이었다면 이제는 점령해서 통치하겠다는 태세 전환이 있었다. 통치를 위해서 약탈을 금지했다.
칭기즈칸은 제국을 만들지 않았다. 넓은 땅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통치는 하지 않았다. 칭기즈칸 사후 제국을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몽골군은 15만 병력으로 루스(현재 러시아)를 침공한다. 루스는 여러 공국으로 분열이 되어 있었다. 몽골군은 루스를 아주 쉽게 점령한다. 이어서 러시아 지역에 가장 큰 공국이었던 1240년 키예프 공국을 공격해서 3년 만에 전 지역을 점령한다. 몽골군의 키예프 점령은 러시아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당시 러시아 최강 공국은 키예프였지만 멸망하면서 바투가 지역을 통치하게 된다.
주치 울루스 (킵차크 칸국)은 몽골 제국의 분열 이후 설립된 4대 칸국 중 하나이며 서방 침공의 총지휘관 바투가 통치했다. 유라시아 대륙에서 몽골의 지배를 가장 오래 받은 러시아 지역이다. 지역에 따라 최장 240년 정도를 몽골의 지배를 받는다. 1480년 주치 울루스를 몰아낸 것이 모스크바 공국이다. 원래는 변방 공국 모스크바가 주치 울루스 치하에서 성장했고 대 공국으로 발전하여 지금 러시아의 수도가 되고 러시아의 중심이 되었다. 러시아 속담에 몽골이 등장한다. 다 나쁜 의미이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타르타르보다 나쁘다' 등 러시아인에게는 부정적 이미지의 몽골군이 남아있다.
러시아를 점령하고 몽골군은 동유럽 폴란드. 헝가리로 진격한다. 이미 유럽에는 러시아 난민을 통해서 몽골군에 대한 공포가 퍼져있었다. 몽골군에 대해 기록했다.
"단단한 가슴에 눈썹은 머리카락에서부터 코까지 뻗어있고 눈은 검고 불안해 보인다, 짧은 코는 일그러젔고 턱은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가는 곳마다 불을 지르고 살육을 한다"
-마튜 파리스 연대기 中
유럽은 항복하지 않고 싸우기로 한 배경에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유럽을 지키기 위해 최정예 유럽연합군 3만 명이 결성된다. 이 중에서 십자군 원정에서 활약했던 무적의 템플기사단이 참전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교도가 기독교 유럽에 쳐들어온다는 사실만으로도 유럽 연합군의 전투 의지는 활활 불타올랐다.
이전 전투에서 유럽 연합군은 겉모습으로 만으로도 위압감을 주었다. 유럽 연합군의 무장 핵심은 완벽한 방어구 체인메일이었다. 체인메일은 쇠사슬을 엮어 만든 고대. 중세 유럽의 갑옷으로 편한 움직임이 장점이었다. 특히 어깨의 움직임이 자연스러워 여러 가지 동작을 활발히 할 수 있다. 전신을 감싼 쇠사슬 갑옷으로 칼 등으로 베기 공격은 어렵다. 하지만 화살 등 찌르기 공격에는 취약했다.
무기는 긴 직선형의 검, 롱소드를 가지고 있었다. 사정거리가 길고 무게감이 나가서 쪼개는 힘이 강하다. 말과 기사를 한꺼번에 벨 수 있는 무시무시한 무기였다. 연 모양의 방패, 카이트 실드는 노르만에서 전통적으로 쓰는 방패로 찌르기에 취약한 체인메일의 단점을 보완했다.
강력한 무기와 전투 경험을 갖춘 유럽 연합군은 1241년 4월 9일 폴란드 레그니치 인근 평원에서 몽골군을 만난다.
몽골군의 무기는 곡선형의 곡도이다. '사브르'라고 많이 부르고 유목 기마민족.이슬람 지역 사람들이 주로 사용했다. 유럽에 영향을 줘서 펜싱 종목 '사브르'의 기원이 된다.
사정거리가 짧은 곡도는 체인메일을 베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몽골군은 활이 있었다. 전투 초반에는 유럽 연합군이 우세했다. 수세에 밀린 몽골군이 도망가자 유럽 연합군은 추격을 시작했다.
1241년 폴란드 인근 레그니차 평원, 사슬갑옷과 투구로 중무장한 유럽연합군이 러시아를 격파한 몽골군과 마주쳤다. 유럽연합군과 마주친 유럽연합군의 눈에는 소문에 듣던 악마의 군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한 발의 화살이 전투의 시작을 알리고 전투가 시작된다. 몽골군은 유럽기사단이 맞서 나오자 놀라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도망치는 몽골군에 모습에 기세가 오른 유럽 연합군은 뒤를 무섭게 추격한다. 유럽군이 오래 추격과 무거운 갑옷에 지칠 무렵 상황이 반전된다. 매복해 있던 몽골군의 기습이 시작된다. 후퇴하다 활로 갑자기 반격하는 전술, '망구다이' 였다. 유럽연합군과 몽골군의 대격돌은 몽골군의 승리로 끝났다.
몽골군은 전투 초반 실제 공격을 받으며 유럽군을 교란시킨다. 공격을 받고 나서 후퇴를 한다. 유럽군도 기만전술에 속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다. 유럽기사단은 전투에서 후퇴를 치욕스럽게 생각했다. 몽골군의 '망구다이' 생소한 전술에 속수무책 유럽군이 당한 것이다. 몽골군은 후퇴하는 유럽군의 양옆에서 함께 달린다.
마치 사냥감 몰이 하듯이 유럽군을 몰았다. 폴란드의 전투는 몽골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유럽 연합군 3만 명이 거의 전멸했다.
"몽골군은 시체에서 귀를 잘라 아홉 개의 큰 포대에 담아 헝가리에 있는 바투와 수베데이에게 보냈다"
"헨리크 대공의 머리는 창에 꽂혀 레그니차의 성벽 앞에 전시되었다"
-에릭 힐딩거 <초원의 전사들> 中
몽골군은 최강 군사 대국 헝가리를 공격한다. 헝가리는 10만 병력으로 결사항전한다. 몽골제국의 낯선 전술, 망구다이에 헝가리군은 대패한다. 몽골군은 어김없는 공포전술로 파괴를 자행한다. 헝가리 인구 1/3이 사망, 납치됐다는 얘기가 돌았다. 불과 한 달 사이에 동유럽은 초토화되었다.
유럽인들은 누가 왜 그러는지를 전혀 몰랐다. 중세 유럽은 기독교 세계였으며 다른 지역에 대한 정보가 없었던 암흑기의 중세 유럽이었다. 폐쇄적인 사회에 미지의 존재가 나타나서 만행을 저지르자 유럽은 패닉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유럽에 몽골의 공포가 퍼진다.
"전투가 끝난 뒤에는 시체를 먹고 목이 마를 땐 피를 마신다"
-마튜 파리스 <연대기>中
종말의 시대가 왔고 죽음의 사자가 왔다는 공포감에 할 일은 기도뿐이었다.
몽골군은 폴란드. 헝가리를 넘어 서유럽으로 진격한다.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까지는 지형지물이 없는 평야였다. 몽골군은 서유럽을 앞에 두고 갑자기 회군한다. 몽골로 돌아간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학계에서 말하는 가장 합리적인 추측은 1241년 몽골에서 우구데이 칸이 사망했고 차기 대칸 선출을 위해 각지에 파견되어 있는 몽골 주요 인사들이 소집되어 수도로 돌아갔다는 설이 유력하다.
몽골제국은 몽골 부족의 중대 사항을 협의하는 대회의, 크릴타이를 통해서 대칸 선출 시 쿠릴타이에서 만장일치가 되어야 한다.
우구데이가 죽고 다음 칸을 선출하는 데 3년이 걸렸다. 구육 칸이 선출되었지만 2년 만에 사망한다. 구육이 사망한 후 5년 끝에 몽케가 선출된다. 회군 이후 10여 년동안 서방 침공을 중단했다. 역사학자들도 몽골제국을 이해하기에 어려운 부분이다. 몽골제국은 멸망 때까지 왕위계승 원칙을 만들지 못한다. 칸 선출 때마다 권력 다툼이 반복되었다. 1225년 몽골 사신 저고여가 고려에서 피살되는 저고여 피살사건이 발생했고 몽골 침입의 명분이 되었다. 1227년 갑작스럽게 칭기즈칸이 사망했다. 1229년 우구데이가 칸이 되기까지 2년이 걸렸다.
1231년 우구데이 칸이 고려를 침략했다. 1241년 전쟁 중 갑작스럽게 우구데이 칸이 사망한다. 칸 사망으로 고려는 전쟁 중 휴식을 취하게 된다. 같은 이유로 서유럽은 몽골의 침입을 면할 수 있었다. 이때 유럽은 무시무시한 몽골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 미지의 적 몽골을 알기 위해 사람을 보내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당시 교황이었던 이노센트 4세는 몽골인들을 설득해서 개종시키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카르피니를 몽골수도 카라코룸으로 파견한다. 마침 구육의 즉위식에 카르피니를 보내서 구육에게 커다란 선물을 주려고 한다. '당신의 즉위를 저 멀리 이방인도 축하하러 왔습니다'라고 하니 환대를 받는다.
환대를 받고 돌아온 카르피니는 보고를 하지만 보고 내용은 실망스러웠다. 카르피니가 칸에게 하나님을 믿으세요 하니 하나님이 누군데라고 대답했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말하기를 "모든 땅이 짐에게 복종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신의 뜻이며 당장 몽골 제국에 항복하고 교황을 비롯한 기독교 국가의 왕공들은 나에게 친조하라, 그러면 무사할것이다"(1246년 구육 칸이 교황에게 보낸 서신 中) 이런 문서를 보냈다. 구육 칸의 답서는 바티칸 공문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교황의 체면이 구겨졌다. 신앙심이 돈독했던 프랑스왕 루이 9세가 1253년 수도가 루브룩을 파견한다. 똑같은 실패를 하지만 이번에는 뜻밖의 수확이 있었다. 카르피니 <몽골인의 역사>와 루브룩 <몽골 기행>이 몽골에 대한 책을 썼다. 두 수도사들의 몽골 여행기는 유럽인들에게 몽골을 알렸고 마르코 폴로의 선구가 되었다.
유럽인들은 몽골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고 몽골여행을 하고 견문록을 출판한다. 폐쇄적이던 중세 유럽이 세계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13세기 아바스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는 이슬람 문화의 성지와 같았다. 하지만 이곳도 몽골의 침공을 피할 수 없었다. 20년의 가까운 몽골군의 거센 공격에 1258년 바그다드는 몽골군에 함락당한다. 그리고 변화가 찾아왔다. 아시아는 물론 이슬람. 유럽의 문명이 몽골 안에서 교류했고 인류사에 새로운 장이 열린다.
몽골제국 내의 수천 개의 잠(JAM)이 거미줄처럼 얽히며 세계로 통하는 길이 만들어진다. 대륙 끝과 끝의 문명이 몽골 안에서 하나가 된다.
잠(JAM)은 한자는 참站, 한국어는 역驛, 역참 驛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장거리 여행을 할 때 공공. 유통 업무를 위한 교통. 통신 기관으로 숙소 및 말 등을 구비했다. 일종의 터미널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유라시아 대륙 전역에 설치되어 있어 교역 시 터미널로 활용했다. 몽골제국 시기에 발달을 한다.
바그다드의 고급 양탄자가 유럽의 귀족 거실에 깔리고 헝가리 향긋한 와인을 북경사람들이 연회에서 마시게 된다. 기독교, 불교, 이슬람이 몽골의 수도 카라코룸에서 모든 종교가 공존한다.
※역참과 역참 사이를 한참이라고 한다. 한참 기다린다. 한참 가야 한다는 어원이 된다.
잠 (JAM) 이 있어서 어디든 이동이 가능했고 안전하고 말을 통한 빠른 이동이 가능했다. 몽골은 유라시아라는 거대한 마당을 형성했고 잠을 만들어서 거대한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몽골 안에서 누구나 자유롭게 활동하고 참여가 가능했다. 몽골은 정복 후에는 정복 지역의 문화. 종교를 존중했다. 칭기즈칸은 모든 종교를 차별 없이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칭기즈칸 대법령 中)
몽골은 포용을 통해 다양한 인재를 중용했고 제국 통치에 활용한다.
청화백자의 제작 조건은 1,300℃ 이상의 가마 기술이 필요하고 형태 유지 가능한 흙 재료, 변색되지 않는 안료가 필요하다. 흙은 중국 양쯔강 이남 지역에서 (고령토) 나온다. 푸른 물감(안료)은 시리아 지역에서 나온다.
양쯔강 이남 중국의 고령토와 중동의 안료가 만났을 때 청화백자가 만들어진다.
몽골제국이 아니었다면 만들어질 수 없는 산물이 청화백자이다. 17세기 청화백자는 유럽인들에게 매료되었다.
중세 유럽의 성화에서 성모 마리아만 파란색의 옷을 입는다. 유럽인들에게는 푸른색이 고귀함의 상징이었다. 고귀한 푸른색이 도자기에 구현이 된 것이다.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는 유리잔이 그려져 있다. 로마문명은 유리로 발전하고 중국 문명은 도자기로 발전한다. 동양에서 유럽으로 도자기가 전파된다.
아락은 '땀'을 뜻하는 아랍어로 증류되는 모습을 땀 흘리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아락은 증류주를 의미한다. 아랍의 증류주(소주)가 고려에 전파됐다. 몽골제국이 동. 서를 아우르면서 이슬람지역의 문화가 동방으로 건너오게 된다. 그중 하나가 증류주다. 증류법은 알코올. 물의 끓는점 차이를 이용해서 고농도 알코올을 추출한다. 이슬람 지역에서 최초로 증류법을 발견했다. 증류법이 몽골을 통해 고려로 들어왔다.
이색(1328~1396)은 고려말 학자 겸 시인으로 하루라도 술과 시가 없으면 안 된다고 했다.
아락주 선물을 받은 이색은 시로 표현했다.
"반 잔 술 겨우 넘기자마자
훈기가 뼛속까지 퍼지니
표범 가죽 보료 위에 앉아
금으로 만든 병풍에 기댄 기분이네"
이색의 시 中
이 시기 중국에서는 몽골을 통해 이슬람 역법(달력)을 참고하기 시작한다. 교황청에 발견된 (구육 칸) 편지 중의 일부는 고려에서 만든 종이라는 학설도 있다. 사람. 사상. 재화가 곳곳으로 이동하는 세계를 몽골이 만들었다.
몽골제국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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