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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한국전쟁의 영웅들 6사단 춘천-홍천 전투, 대한해협 해전

by 소시민스토리 2024.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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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영웅들 6사단 춘천-홍천 전투, 대한해협 해전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에 국군은 벼랑 끝까지 내몰린다. 넘을 수 없는 전력차이에 속수무책 무너져 내렸고 북한군은 개전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북한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듯했고 전선은 무너졌다. 하지만 그 누구도 항복하지 않았고 모두가 악착같이 버텼다. 단기간에 끝날 것 같은 전쟁은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계속됐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서쪽 웅진반도부터 동쪽 강릉까지 300Km에 이르는 38선 전역에서 북한군의 기습 공격이 이어졌다. 강력한 화력으로 무장한 북한군앞에 군의 맞대응은 불가능해 보였다.

30일 내 남한을 점령한다는 치밀한 계획에 따라 빠르게 이동하던 북한군은 갑자기 춘천지역에서 진격을 멈춘다. 완벽할 것 같았던 북한군의 계획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춘천을 지키던 부대는 육군 6사단 청성(淸星)부대였다. 6사단은 한국전쟁에서 가장 잘 싸운 부대로 손꼽인다. 6사단장이었던 김종오장군은 김홍일장군과 함께 한국전쟁에서 활약한 명장으로 춘천, 홍천 전투와 백마고지 전투에서 맹활약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북진하면서 가장 먼저 압록강에 도착해서 압록강물을 떠서 대통령에게 바친 부대가 청성부대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평양탈환 기념식에서 압록강 물을 마셨다. 

국군 6사단은 북한 2군단의 진격을 저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1950년 10월 9.28 서울 수복이후 중요한 문서를 노획했다. 러시아어로 작성된 '공격작전용 조선인민군 정찰계획'이었다. 당시 소련이 한국전쟁에 개입되었다는 증명이 된다. 

문서에서 북한군의  3단계 작전 계획을 보여준다. 

1단계는 한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해서 주력을 섬멸한다. 서울을 공격하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3차례 걸쳐서 포위,공격한다는 계획이었다. 여기에 소요되는 시간은 3일로 잡았다.

2단계는 대전, 광주,대구에 있는 부대, 예비부대를 격멸하는 것이다.

3단계는 남부해안에 미군이나 연합군이 들어올 수 있는 항구를 봉쇄하고 전쟁을 끝내겠다는 계획이었다. 

국군이 붕괴되고 정치지도부도 붕괴가 되면 박헌영이나 남로당이 이야기한 것처럼 남한의 좌익세력이 봉기을 일으키면 한국군은 전투력을 잃고 붕괴될 것이라 판단했다. 

 

서울방향으로 북한군 1,3,4사단이 공격을 하고 북한 2,12사단은 춘천과 홍천에서 수원으로 들어와서 수원-원주 계선에서 한국군 주력을 섬멸한다는 작전을 계획했다. 조선인민군총사령부는 계획에 따른 작전을 수행할 능력이 없어 모스크바에 고문단을 파견해 달라고 몇 차례 요청했다. 1950년 9월 8일 북한 총참모장 사망 당시 소련 군사고문도 함께 사망했다는 일화가 있다. 

 

북한은 10만 명 이상이 동원되는 공격계획을 수립할 능력이 없었다. 1950년 5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소전쟁에 참여했던 대령급 소련군 고문들이 대거 동원되었다. 20여 명의 소련 군사 고문단은 북한군 공격 작전 계획을 수립했다. 스탈린이나 군사참모들이 판단하기를 굉장히 쉬운 전쟁으로 생각했었다. 

 

막중한 임무를 띠고 남하하고 있는 북한군 2군단과 반드시 저지해야 하는 국군 6사단은 전력 차이가 있었다.

국군 6사단은 9,300여 명으로 방어라인을 구축하고 있었다. 북한군 2군단은 37,000여 명이었다. 

침공을 해 온 제2군단 소속의 부대에는 전쟁 직전에 실시된 부대 평가에서 최우수사단도 포함되어 있었다. 실전 경험이 아주 풍부한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2군단은 3개 사단과 1개 고속기동연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소련제 모터사이클을 180대 보유하고 있는 제603 모터사이클연대였다.

M-72 모터사이클은 1941년 소련에서 개발한 군용 오토바이로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소련 전쟁에서 사용되었다. 모터사이클을 북한말로 '모터찌클'이라고 불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소전쟁에 참전한 소련 군사 고문단이 대평원에서 사용했던 모터사이클을 한국전쟁에 투입했다.  춘천과 홍천 산악지대에 모터사이클을 투입했다. 한국 지형을 잘 모르는 소련 군사고문단이 작전을 세운 결과 모터사이클을 이용해서 산악을 고속으로 달려 수원으로 기동 하도록 계획했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했다. 

 

북한군은 개전 당시 여러 비장의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북한군 2군단이 보유한 SU-76자주포는 48대였다.

개전초 국군은 본 적이 없어서 전차와 자주포를 구별하지 못했다. 

※자주포는 자력으로 기동할 수 있는 차체 위에 포를 결합한 것이다. 당시에는 좌우로 포를 움직이기에 힘들고 대부분의 자주포는 상하로만 움직였고 뒤쪽의 적을 공격하려면 차체를 돌려야 가능했다. 후방에서 공격하는 적 전차나 자주포에는 무방비 상태가 된다. 자주포는 곡선을 그리는 탄도로 원거리 적을 공격한다.

※전차는 차체와 포탑이 분리되어 있다. 전차는 직선으로 발사되는 탄도로 근거리의 적을 공격한다.

당시 북한군의 주력 전차(탱크)는 T-34였다. 국군의 전차 공포증을 유발했다.

 

3만 7천여 명을 적을 막아야 하는 국군 6사단은 SU-76 자주포를 전차로 착각했다. 북한군은 전차와 자주포를 헷갈리게 하기 위해 자주포에 나뭇가지를 매달아 전차와 혼동하게 만들었다.

당시 6사단은 전차도 자주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6사단이 가진 가장 강력한 화력은 105mm 곡사포였다. 105mm 곡사포는 방열이 필요한 재래식 화포였다. 포병전력을 비교하면 춘천 지역은 군국에 비해 북한군이 2배 이상 우세했고 홍천지역은 북한군이 7배 이상 우세했다.

6사단은 먹을 것도 부족했다. 남아있는 식량은 하루치 건빵 650 상자뿐이었다. 

 

 

북한군의 자주포에 밀리는 상황에서 6사단 소속 11명의 특공대가 조직된다. 열세에 몰린 6사단 제19연대장의 아이디어로 수류탄 2개, 안전핀을 제거한 포탄 1개를 지급한다. 북한군 SU-76m는 뚜껑이 없는 기종이었다.

자주포에 목숨을 걸고 올라타서 조정석에 수류탄을 던진다. 홍천 말고개에 나타난 북한군 자주포 10대를 국군 대전차로 중대가 선두 자주포대를 공격한다. 국군 기습공격에 기동을 멈춘 북한 자주포에 특공대가 선두와 후미 자주포에 수류탄을 투척했다. 고갯길에 북한 자주포는 허둥지둥하다가 비탈길로 굴러 떨어진다.

 

홍천 말고개 전투에서 북한군 자주포 10대를 노획하고 파괴했다. 특공대원 1명은 부상당하고 모두 생존했다. 

이때 활약했던 조달진 소위는 2012년 7월 이달의 전쟁영웅으로 선정되었다.

6사단 춘천-홍천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포병이었다. 6사단 포병 공격으로 북한군 1개 보병대대를 격파했다. 북한군은 남한 포병대에 의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북한군 2사단 소속군인 포로 심문서, 참조)

 

 

6사단은 북한군의 동태를 살피고 적의 정보를 축적했다. 전쟁 전 차폐물, 엄폐물, 진지를 구축하는 등 전투 대비를 했고 현지 주민들의 적극적인 협조(진지 구축, 포탄 이동) 등이 더해졌다. 

임부택 소령은 남침 징후를 사전 인지하고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전투준비태세를 확립했다. 빠르게 진격하던 북한군을 일시적 후퇴하게 만든 춘천 전투였다. 6월25일~30일까지 필사적으로 버티다가 결국 6사단은 후퇴했다. 이렇게 버텨준 시간 덕분에 맥아더 장군이 수원 도착했고 전선을 시찰할 수 있었다.

맥아더 장군은 6월29일 수원 비행장에 도착했다. 북한군 계획대로라면 이미 수원을 점령했어야 하는 시점이었다.

 

스탈린은 경악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닦달하는 전문을 보낸다. 

"조선 사령부가 어떤 계획을 하고 있는지 귀관은 전혀 통보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전진할 생각인지? 아니면 전진을 중단하기로 했는지..."-1950년 7월 1일 스탈린의 전문 中

 

한국군의 전투나 사기가 상실되지 않았었다. 1948~50년까지 여수 주둔 제14연대 반란사건이 일어났고 해군 킴볼 스미스 호가 월북했고 공군 비행사 2명이 탑승한 비행기가 월북했다. 미국이나 세계 시선은 전쟁이 일어나면 한국군 장교들과 부대는 투항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 전쟁이 일어나자 한국군 장교, 단위부대의 반란, 투항은 전무했다. 한국군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것이 나라를 지키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대한민국 해군 최초로 승리한 대한해협 해전

1950년 6월 25일 밤 9시 30분경, 부산 인근 해상에서 정체불명의 선박이 발견된다. 국군의 발광신호에도 아무런 응답이 없는 괴선박의 정체는 600여 명의 북한군을 태운 무장 수송선이었다. 이를 막아선 작은 함선은 대한민국 최초의 전투함, 백두산함이었다. 

 

대한해협 해전이었다. 대한민국 최초 전투함 백두산함은 진행항에 있었다. 저녁 8시경 울산 앞바다에서 정체불명의 배를 목격했고 레이더 성능이 좋지 않아 가까이 다가가야 확인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가까이 접근해보니 무장한 600여 명의 북한 게릴라 부대가 승선해 있었다. 선박의 정체는 부산으로 향하던 북한 인민군 수송선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6월 27일 대전에 머물고 있었다. 만약 북한군이 부산을 점령했다면 대통령은 피신할 곳이 없어지고 심리적 붕괴, 전투 의지를 상실하게 될 것이며 미군이 개입할 여지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부산이 뚫리면 춘천-홍천 전투, 한강 방어선 전투의 의미도 사라지는 상황이었다. 부산이 점령되면 미군이 들어올 교두보가 사라지는 것이다. 

 

당시 해군은 어선을 개조하거나 일본이 버리고 간 연안 경비정을 재활용했다. 한국전쟁 발발 불과 두 달 전까지 포가 달린 제대로 된 전투함은 전무했다. 

해군사관학교는 1949년 출범했다. 당시 해군 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은 적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한 전투함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해군 장교, 병사들과 함께 계획을 세운다.  전함을 만들 기술은 없었고 전함을 구입하려고 돈을 모을 계획을 한다. 손원일 제독은 임시정부 의정원 손정도 의장의 아들이었다. 손원일 제독은 한국 해군의 주춧돌을 놓은 해군의 아버지였다. 당시 해군 소위 월급은 쌀 한말 가격 15,000원이었다. 장교들은 월급의 10%를 모았고 사병들은 고물을 팔아서 돈을 마련했다. 장교회 부인들은 바자회를 통해서 한 푼 두 푼 모았다.

 

 

 

모금 운동으로 1만 5천 달러가 모였고 국고 4만 5천 달러를 더해서 6만 달러를 마련한다. 

수병들끼리 십시일반 모아서 전투함을 구입한 사례는 전 세계에도 유례가 없다. 돈을 모아서 미국으로 건너간 손원일 제독과 장교들은 미국에서 450톤급 전함 '화이트헤드호'를 구매한다. 대한민군 최초의 전투함 '백두산함'이다. 화이트해드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군이 사용한 배였다. 전쟁이 끝나고 해양대학교 실습선으로 활용되다가 퇴역했고 수리가 필요했다.

 

수리를 하려면 돈이 필요했지만 배 구입 비용으로 돈을 다 썼고 돈이 없었다. 그래서 배에서 숙식하며 직접 배를 수리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포가 없었다. 하와이로 가서 3인치 포를 구매했고 백두산함에 3인치 포를 장착했다. 이번에는 포탄을 사기 위해 괌으로 가서 포탄 100발을 구매한다. 

백두산함을 구매하고 수리해서 국내 항구 순방 후 진해항으로 최종 귀향한 날이 1950년 6월 24일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1950년 6월 25일 딱 하루 전이었다. 다음날 백두산함의 젊은 60명의 승조원들은 북한의 무장 수송선과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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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일 제독의 부인 홍은혜 여사는 해군의 어머니이다. 홍은혜 여사는 삯바느질로 번 돈을 모아 헌납했다. 2019년 8월 이달의 전쟁영웅으로 선정되었다. 홍은혜여사는 해군의 노래를 지었고 이화여대 출신이었다.

해군 본부로부터 격침명령은 26일 자정이었다. 격침명령이 떨어지자 승조원들은 모두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함장은 물컵에 물을 다 채우고 "서로 보고 있는 모습이 마지막일지 모른다, 우리 용감히 싸우자"라고 말한다.  건배 후 60여 명의 승조원은 최초 사격을 시작한다. 

 

함정 인수 후 항해 훈련 정도만 해본 상황에서 실제 포 사격 훈련을 해본 적이 없었다.  겨우 장만한 포탄 100발을 실탄으로 훈련을 못 하는 상황이었다. 실탄 대신 나무를 깍아 훈련해 본 것이 전부였다. 자정이 넘어가는 시간이어서 앞은 깜깜한 바다였다. 하지만 백두산함에는 레이더, 사격 통제 장치가 없었다. 적함이 있는 쪽으로 조명을 비추는 방법을 써야 했다. 적도 해군을 볼 수 있어 공격을 당할 수 있었다. 백두산함은 무기가 3인치 포뿐이어서 불리했다. 

 

적함의 화염을 보고 쏘는 방법도 있다. 모두 다 쉽지 않았지만 함장은 결단을 내렸다. 최대한 적에게 가까이 갔다. 목숨을 내 놓고 적함과 1Km까지 거리를 좁혔다. 치열한 포격전이 시작됐다. 포탄이 거의 떨어져 갈 때 마침내 포탄 한 발이 적함의 중앙 하부를 맞춘다.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면서 새벽 1시 반 경, 북한 수송선은 침몰한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치열한 교전이 벌어진 대한해협에서 부상자가 속출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결국 두 명의 젊은 승조원들은 목숨을 잃었다. 故 전병익 이등병조, 故 김창학 삼등병조는 진해에 잠들어 있다. 

 

대한해협 해전의 승리로 부산항은 지켜졌다. 한국 해군 단독, 해전에서의 한국전쟁 최초의 승리였다. 

북한과 소련의 초기 작전 계획을 무산시킨 중요한 승리였다. 

7월 1일 해상 수송 작전이 개시된다. 7월 10일 이후 부산항으로 수많은 병력과 물자가 들어온다. 

한국전쟁 초기 한강 방어선을 유지하고 미국이 개입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벌어준 것은 국군의 필사적인 항전 때문이다. 북한군의 압도적인 화력을 맨몸으로 맞서 싸운 국군의 강력한 전투 의지가 북한-소련의 계획을 좌절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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