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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걸프 전쟁 지상전 73이스팅전투, 노퍽전투

by 소시민스토리 2024.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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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프 전쟁 지상전 73이스팅전투, 노퍽전투

1991년 2월 24일 본격적인 지상군이 시작된다. 해병대는 24일 새벽 4시에 공격을 시작한다. 미군 제1해병사단과 제2해병사단이 속도 차 공격을 시행한다. 

1사단은 쿠웨이트 정면에서 공격을 하고 2사단은 서쪽에서 빠르게 우회기동해서 쿠웨이트 시티, 쿠웨이트에서 퇴각하는 이라크군의 퇴로를 차단하겠다고 계획한다. 제2 해병사단에는 육군 제2기갑사단 제1여단이 배속되었고 지원을 받아서 기동전을 계획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라크가 쿠웨이트부터 사우디아라비아 국경지역에 참호, 철조망, 지뢰가 이어진 장애물 지대를 구축하고 유전을 방화했다. 검은 연기. 불길 등으로 공격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걸프 전쟁, 맹활약한 미군 공격기

 

걸프 전쟁, 맹활약한 미군 공격기

걸프 전쟁, 맹활약한 미군 공격기 B-52 폭격기 융단폭격은 이라크군에게 공포의 대상이 된다. 사막의 폭풍작전 동안 80여 대가 1,600여 회 출격하여 2만 5천 톤의 폭탄을 투하했으면 다국적군이 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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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해병사단은 쉽게 진격한다. 장갑차에서 하차한 보병이 도보로 접근했다. 지뢰지대 개척 장비를 동원했다. 선형작약을 이용한 M58 MICLIC은 로켓으로 와이어에 달린 폭탄이 폭발하여 통로를 개척한다. 이런 장비들을 동원하여 지뢰지대를 빠르게 제거한다. 서쪽에서 진격한 제2해병사단은 어려움에 직면했다. 이곳에는 지뢰지대가 더 촘촘하게 매설되어 있었다. 다국적군 병사들이 직접 대검을 들고 지뢰를 제거해야 되는 경우가 생겼다.  개척 장비로 모두 제거하기 어려울 만큼 촘촘히 매설되어 있었다. 미 해병대는 실전 같은 훈련으로 수월하게 돌파가 가능했다. 

미 해병대는 1일 차 아침 지뢰지대 돌파에 성공한다. 지뢰지대 개척하는 동안 적이 반격한다면 취약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라크군은 지뢰지대 개척이 시작되자 손을 들고 나와서 항복을 한다. 그러면서 "제발 물이랑 먹을 것을 주세요"라며 외친다. 그동안 다국적군의 폭격으로 이라크군은 보급난이 발생했다. 이라크군 전방 배치 사단에 폭격으로 보급이 차단되어 음식이 떨어져 굶고 있다가 지상군이 들어오자 이라크군은 바로 항복했다.

미 해병대는 당황한다. 이라크군에게 줄 음식이 없었던 것이다.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음식을 달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이라크군은 항복하는 아군 이라크군을 향해 포격을 했다. 미 해병대도 놀랐다. 미 해병대는 대포병사격을 실시해서 이라크군 포병을 제압했다. 사전에 실시된 항공작전으로 1선 이라크군 조직력은 이미 와해되어 있었다. 해병대는 빠른 속도로 북진하고 있지만 해병대 좌익 엄호를 해주어야 하는 이집트 군대는 아직 공격 시작도 안 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 해병대만 노출이 되는 상황이 돼버렸다. 

 

1991년 2월 24일 오전 미 해병대는 쿠웨이트 영내 깊숙이 돌진해 있었다.  문제는 미 제7군단과 18군단은 공격 개시 시간이 계획상 다음날 아침이었다. 시간차 공격을 하는 이유는 해병대가 공격해서 이라크군이 주공으로 착각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해병대가 예상보다 빠르게 공격하니 해병대 원래 역할이었던 이라크군을 붙잡지 못하고 이라크군이 북쪽으로 퇴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면 전체적으로 하려고 한 계획, 7군단에 의한 대포위작전이 허탕이 될 가능성이 생겼다. 원래 계획은 미 해병대와 아랍합동군이 이라크군을 잡고 있으면 이라크군을 레프트훅으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지금 상황은 레프트훅으로 이라크군을 공격도 하기전에 이라크군이 북쪽으로 퇴각할 수 있는 가능성이 되어 버렸다.  슈워츠코프는 존 요삭 미 중부사령부 제3군 사령관에게 당장 공격하라고 한다. 제18공수군단 사령관 게리 럭은 공격을 시작한다.  제7군단 사령관 프레데릭 프랭크스는 어렵다고 말하다가 2월 24일 오후 3시 공격을 결정한다. 결정 후 진격을 하는데 국경을 조금 넘을 수밖에 없었다. 밤이 찾아오자 야간 공격은 오인사격 위험이 있고 부대도  휴식하겠다고 공격을 멈춘다.  첫째 날 지상전은 마무리된다.

 

슈워츠코프는 다음날 아침 브리핑을 받고 극대노한다. 제7군단이 최소한 콜린스 목표지점의 절반까지 가지 않았을까 예상하고 있었는데 아직 국경 근처에 있었다고 보고받았다. 27일 해지기 전까지 공화국수비대를 격멸하라고 명령한다. 제7군단은 다시 진격을 시작한다. 하지만 미 제7군단에 배속된 5개 사단이 이동하는 과정 중에서 교통 혼잡이 발생한다. 급유문제, 모래폭풍으로 이동 속도가 저하된다. 1991년 2월 25일 밤 9시 선두부대가 콜린스 후방 30Km까지 밖에 못 간다. 

 

미군 제18공수군단은 빠른 속도로 진격한다. 제101공수사단은 유프라테스강 남안 국도 8호선을 차단한다.

해병대가 순조롭게 진격하고 있던 중 이라크3군단이 해병대 우익 미 1 해병사단을 역습한다.  유전 화재로 전장확인이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병대는 비장의 무기 미 해병 항공대를 가지고 있어 이라크군을 격퇴한다. AH-1 코브라만 6개 대대 투입되어 활약했다. 

이라크군 주력 기갑부대는 해병대 지상부대와 조우 전에 격퇴당한다. AH-1 코브라가 공격하여 전차, 장갑차 수십대를 격퇴했다. 이틀날 전투가 마무리된다.

 

1991년 2월 26일 지상전 3일 차 미 해병대의 강력한 공격 때문에 2월 26일 새벽 1시 30분 이라크는 쿠웨이트에 주둔하고 있는 이라크군 철수를 시작한다고 발표한다. 이라크군은 전선이 붕괴할 위험에 빠졌다.

새벽 4시에 제1해병사단이 쿠웨이트 시티에 외곽까지 와서 봉쇄를 하고 소탕작전을 시작했다. 

쿠웨이트 시티 공격은 하지 않았다. 예초에 작전대로 쿠웨이트 시티는 쿠웨이트군이 해방시킨다는 방침이 정해져 있었다. 외곽에서 쿠웨이트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쪽으로 가고 있었던 미 제2해병사단은 이라크군 퇴로를 차단해야 하기 때문에 서쪽 교통의 요지이자 이라크로 갈 수 있는 퇴로를 차단할 수 있는 알자흐라 북서쪽을 향해서 공격을 했다. 1991년 2월 26일 정오에 감제고지를 확보한다. 이라크군은 바스라 방향 4차선 도로를 이용해 퇴각 중이었고 이라크군의 차량은 도로를 꽉 메우고 있었다.  해병 항공대 항공 자산 요청을 해서 도로 위 이라크군을 폭격했다. 나중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가장 서쪽의 제18군단은 문제없이 진격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국적군 핵심 군단 프랭크스의 미 제7군단은 2월 26일 야간부터 전투를 시작했다.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7군단은 이라크군을 격파하며 이동한다. 

26일 오후 목표였던 콜린스까지 도착한다. 드디어 진격방향을 레프트 훅으로 틀게 된다. 

 

이라크군은 쿠웨이트 주둔 이라크군 철수를 한다. 미 7군단은 이라크군을 막아야 했다. 이라크군은 서쪽으로 종으로 1 방어지역, 2 방어지역 방벽을 만든다. 7군단을 저지하면서 그 사이 나머지 이라크부대는 북으로 철수시키려 한다. 이라크군은 종으로 쌓은 벽으로 1 방어지대. 2 방어지대로 구축하고 미군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으로 바뀌게 된다. 동쪽으로 방향을 튼 7군단은 미 1 기갑사단, 미 3 기갑사단, 미 1 보병사단, 미2 기갑기병연대가 횡대대형을 유지하면서 공격하고 있었다. 2기갑기병연대가 26일 오후 4시경 67이스팅을 통과한다.

※이스팅(Easting)은 평면 직각 좌표계로 투시된 지도에서 횡방향(동쪽)의 좌표(Km단위)이다. 

연대는 쐐기대형으로 이동한다. 쐐기대형은 빠르게 기동 하면서 돌파력은 강화되고 화력을 집중할 수 있다. 

다국적군은 다양한 대형을 선택한다. 사막이며 기동로가 넓기 때문에 가능하다.

 

73이스팅전투

미 7군단 2 기갑기병연대는 이라크군 최정예부대 공화국수비대와 제1방어진지(73이스팅)에서 만난다.

타와칼나사단 18 기계화여단 전차대대가 매복하고 있었다.  

 

미국 M1A1 에이브럼스와 소련 T-72 전차가 맞붙는다. 사막에서는 모래폭풍과 안개 등 기상이 안 좋아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양측 모두 표적 포착에 어려움을 겪는다. 거리 측정용 레이저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적 전차와의 거리 측정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미군은 야간용 열 영상 장비가 탑재되어 있었다. 열 영상장비를 사용하면 열원으로 목표물이 확인이 됐다. 하지만 이라크군은 소수 전차에만 열 영상 장비가 탑재되어 있었다.

 

미군 전차 포탄은 정확하게 날아왔다. 이라크군은 당황했다.  미 기갑사단의 계속된 공격에 이라크군은 퇴각한다. 미군의 열 영상 장비 활용을 알게 된 이라크군은 매복해서 시동을 다 끈다. 수동으로 전차 포탑을 조작, 포탄을 장전하고 매복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다가 어디까지 왔는지 궁금해서 해치를 열고 몸을 밖으로 내밀면 그 순간 열 영상 장비에 포착되고 포탄이 날아왔다. 미군이 사용해던 열화우라늄탄의 위력이 대단했다.

 

이라크군이 전차를 모래 방벽 뒤에 은폐했는데 열화우라늄탄이 모래 방벽을 뚫고 들어가서 전차를 격파했다. 이라크군은 실전 훈련이 부족했고 지휘통제가 불가능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은 네트워크를 이용한 지휘통제로 이라크군을 제압했다.

 

노퍽전투

73이스팅전투가 끝나고 2시간 후 노퍽전투가 전개된다. 영국 1 기갑사단이 진격했고 선전했다. 영국전차 FV4030/4 챌린저 1이 기록을 세운다. 3마일(4.8Km) 밖의 이라크군 전차를 명중시킨다. 챌린저 1도 열화우라늄탄을 사용한다. 73이스팅부터 노퍽까지 오면서 미군과 영국군은 이라크군 전차 850대를 파괴한다. 

수백 대의 이라크군 전투 차량을 파괴했다. 노퍽전투에서 이라크군 최정예부대 공화국수비대의 신화가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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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전 4일 차 분위기는 끝나가고 있었다. 미제7군단 입장에서는 무언가 이루지 못한 것이 있었다. 지상작전 목표는 이라크 공화국수비대 섬멸이었다. 이대로 아무것도 못하고 끝날 것만 같았다. 더 빨리 진격해서 퇴각하는 이라크군을 격파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미 제7군단에서  가장 북쪽에서 이동한 1 기갑사단은 이라크군의 제2 방어진지에 도달한다. 이라크는 공화국수비대 메디나 사단이 방어준비를 하고 있었다. 메디나능선 11Km에 이라크군은 방어준비를 하고 있었다. 1기갑사단은 2여단이 선두에 있고 전투력이 엄청났다. 전차 166대, 장갑차 60대가 있고 여단의 정면의 넓이는 10km였다. 이에 대항했던 이라크 공화국수비대 메디나사단 2전차여단은 T-72 134대, 장갑차 35대,  T-55전투가 추가로 배속되었다. 수적으로 미군 1기갑사단 2 여단에 밀리지 않았다. 방어준비를 끝냈고 방어 이점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치열한 전투가 예상되었다. 

 

이라크군의 방어계획은 능선을 넘는 미군 전차가 하늘을 볼 때 이라크군 멀리 매복해 있다가 전차로 공격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미군이 넘는 메디나능선에서 이라크군 매복 진지가 약 3.5Km였다. 이라크군 T-72 전차 125mm 주포 유효사거리가 1,800m였다. 이라크군은 매복 위치를 능선에서 너무 멀리 선정한 것이다. 이라크군은 고성능 야시장비가 없었다. 원거리에서 적을 탐지하고 관측할 수 있는 장비도 없다. 바보 같은 짓을 한 것이다. 이라크군 포병이 미군 전차가 능선을 넘어올 때 공격했지만 포병 화력은 미군 전차 한참 뒤로 날아간다. 이라크군은 거리 측정도 제대로 못한 것이다. 이라크군의 전투 능력은 떨어져 있었다.

 

미군은 능선을 넘자마자 이라크군 전차를 타격했다. 미군은 이미 열 영상 조준경을 통해 이라크군 전차를 식별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사정거리에 들어오는 즉시 사격했다. 이라크군 전차는 공격받는 동안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근거리에 미군 전차가 오면 이라크군은 미군 전차가 발사하는 발사섬광을 보고 사격을 했다. 그 사이 미군 전차는 이미 이동한다. 결국 미군 전차가 능선을 넘은 후 45분 만에 전투가 종결되었다. 이라크군은 전투 차량 2/3가 파괴되었고 전사 340명, 포로 55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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