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프 전쟁, 아랍합동군 카프지 탈환
사담 후세인이 이라크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구상한 것은 지구전으로 끌고 가서 미국인들의 반전여론을 이끌어 전쟁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미군에게 치명타를 입혀야 했다. 항공작전이 한참이었던 1991년 1월 29일 이라크 지상군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국경 해안 도시였던 카프지를 공격한다.
사우디아라비아 카프지는 이미 주민들은 소개가 끝나고 미 해병대 2개 중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미 해병대는 이라크군이 사우디국경을 넘어 카프지로 이동하는 것을 탐지하고 있었다.
정면공격을 예상하고 미 해병대는 항공지원을 요청한다. 공군은 전략 폭격 수행 중이어서 항공지원 요청을 거부한다. 미 해병 항공대도 항공 자산 지원을 안 한다. 오판한 것이다. 이라크 군은 카프지를 손쉽게 점령한다.
아랍국가들은 이라크군의 카프지 점령을 보고 이라크군이 잘 싸워서 승리하고 있다고 받아들인다. 후세인은 카프지 점령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사우디아라비아 국왕 파드 알사우드와 아랍합동군 총사령관 칼리드 알사우드(사우디아라비아 왕자, 국왕조카)는 미 공군, 해병대가 항공지원 요청을 무시한 것에 대해 화가 치밀었다. 1991년 1월 30일 이라크군이 지원 병력을 투입하자 사우디아라비아는 B-52 출격을 강력 요청한다.
국왕 파드 알사우드는 아랍합동 총사령관 칼리드 알사우드에게 화를 냈다. 왕자였던 칼리드 알사우드는 카프지 탈환을 실패한다면 왕위 계승 순위에서 밀려날 수 있었다.
카프지 탈환 작전을 실시한다. 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군 혼성부대로 카프지 탈환 작전을 실시한다. 1991년 1월 30일 오후 11시 00분 제2 사우디방위군과 카타르군 전차부대가 미 해병대 포격전 지원을 받으면서 카프지 남서쪽을 공격해 들어간다. 하지만 야간 전투를 해 본적이 없었다. 이라크군과 사우디-카타르군은 격렬한 전투를 벌이지만 서로 피해가 없었다.
이라크군을 지원하기 위해 오는 지원부대가 B-52에 발각된다. 이라크군 지원부대 (제5기갑사단 20기계화보병여단) 기갑차량 80대는 클러스터탄 (수백 개 자탄이 한꺼번에 퍼지는 확산탄)에 공격당한다. 더해서 A-10 폭격을 맞아 괴멸된다.
사우디-카타르군은 부대를 재편성해서 아침에 공격을 한다. 전차부대가 증강되고 카프지로 진격한다. 15분간 미 해병대의 준비 포격 지원을 한다. 오전 8시 30분 제7기계화보병대대와 카타르군 전차 중대, 제5기계화보병대대 대전차소대가 카프지로 돌입한다. 좌측에서는 예비대인 두 개의 기계화보병중대가 전진하면서 엄호를 했다. 증원하기로 했던 사우디 전차 부대가 제때 도착을 못했다.
마음이 급한 칼리드 알사우드는 일단 돌격한다. 이라크군은 참호를 파고 방어거점을 마련하고 T-55 전차, RPG-7, 중기관총으로 격렬하게 저항한다.
1991년 1월 31일 오전 10시 00분 이라크군 지원 병력이 추가 투입되어 카프지로 진격하고 있었다. 3Km나 이어진 전차 행렬이었다. 이라크군 전차, 장갑차 약 100여 대가 오고 있었다. 미 해병 항공대는 다른 지역을 폭격 지원중이었다. 결국 이라크군을 막을 부대는 현지의 아랍합동군뿐이었다. 이라크군 전차가 진격하고 있었는데 아랍합동군은 전차가 부족했다.
대전차미사일 BGM-71 토우를 매복시킨다. 조준경으로 계속 조준하며 시선을 따라 유도되는 토우 미사일을 발사했다. 아랍합동군은 이라크군 증원 병력을 격퇴한다.
이라크군 전차, 장갑차 13개 격파, 6대를 포획하고 이라크군 포로 116명을 사로 잡는다. 이라크군 제26전차여단 지원부대 주력은 지뢰지대에 들어갔다. 꼼짝달싹 못하고 있었는데 미 해군 전폭기가 출격하여 공격했고 이라크군은 만신창이가 된다.
정오 무렵 이라크군과 아랍합동군은 카프지 시가지에서 소규모 전투를 반복한다. 1991년 2월 1일 아랍합동군은 격렬한 격전 끝에 카프지를 탈환한다. 미군도 예상 못한 결과였다.
노먼 슈워츠코프 미 중부사령부 총사령관은 칼리드 알사우드 아랍합동군 사령관을 극찬한다.
카프지 전투는 종료됐다. 걸프 전쟁 첫 지상전 카프지 전투는 본격적인 지상전을 하기 전 이라크군 실력을 확인한 전초전이었다.
이라크군은 학살 수준의 피해를 입었다. 이라크군은 공격에 실패했고 미군은 이라크군의 전투능력 수준을 확인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입장에서는 침범을 당했기 때문에 아랍합동군이 해결해야 한다는 의지가 강했다. 결과는 승리했지만 아랍합동군 전투 과정을 평가한다면 2개 이상의 전투 및 전투지원부대가 협조하는 제병협동 작전에서 후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은 미국 공군력이었다. 나중에 미군이 지상전을 할 때 아랍합동군에게 중요한 역할을 맡기지 못한 이유가 됐다.
카프지전투 당시 항공작전 성과가 나타나고 있었던 시점에 지상전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항공작전으로만 전쟁을 끝내자는 이야기가 나온다. 쿠웨이트에서 이라크군을 쫓아내는 것으로 끝내자는 것이다.
1991년 2월 2일 딕 체니 미 국방장관은 이라크군 해, 공군전력은 이미 기동 불능상태다. 앞으로 이라크군 전력을 50% 이하로 저하시켜서 2월 중순이나 하순에는 예정대로 지상전에 돌입한다라고 공식 발표한다.
하지만 미 공군은 이 전쟁은 공군력으로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공군이 주역이 되고 싶어 했다.
슈워츠코프, 콜린 파월 등 육군 측의 주장은 엄청난 전략 폭격에도 항복하지 않은 후세인을 항공작전만으로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은 망상이다는 것이다.
미 정치권은 걸프 전쟁을 확실히 끝내고 싶어했다.싶어 했다. 이라크 공화국수비대를 섬멸하고 후세인을 굴복시키고 싶어 했다. 항공작전이 거의 끝날 무렵에 1991년 2월 22일 소련 대통령 고르바초프가 개입한다. 프랑스도 지원한다. 고르바초프는 이라크와 미국 사이를 중재하길 원했고 전쟁을 끝내는 데 기여하고 싶어 했다.
소련이 여전히 국제정세에서 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바그다드와 모스크바를 오가며 종전 조건을 논의한다. 소련이 미국 측에 제시한 것은 정전 이후 쿠웨이트에서 이라크군이 철수한다는 것이다.
CIA 국장 출신,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난처해진다. 이때까지 자신이 노력한 것이 무용지물이 될것같았고
고르바초프의 중재 노력도 고려해야 하는 상황까지 겹치자 무조건 안된다고 답할 수 없어 어떤 답을 내놓을까 고심했다. 이라크군 철수가 개시되기 전에는 정전할 수 없으며 이라크군은 96시간 이내 철수해야 된다는 조건을 제시한다.
이라크가 수행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고르바초프의 계획은 실패가 된다. 미국의 속내는 소련에 의한 전쟁 종결은 원하지 않았다. 내부족으로는 걸프 전쟁이 정치적 목표는 쿠웨이트 해방이지만 이번 전쟁으로 후세인의 몰락을 바랐다. 고르바초프 중재안을 받아들인다면 공화국수비대가 건재한 상황에서 전쟁이 끝나고 후세인은 힘을 잃지 않고 권력을 계속 유지할 것이다. 전쟁을 결코 흐지부지 끝낼 수 없는 이유였다.
전쟁을 확실히 끝내려면 지상작전이 필요했다. 당시 여러 정보 보고에 따르면 다국적군 항공작전으로 이라크군이 받은 피해가 예상보다 적었다. 미군이 발표한 항공작전 성과는 이라크군 주요 장비는 30% 파괴, 이라크군 50% 손실, 공화국수비대는 25% 전투능력이 저하됐다. 이라크군은 아직 건재하다는 것이 미군 판단이었다. 항공작전은 이라크군 전력을 기대만큼 약화시키지 못했다. 확실히 전쟁을 끝내고 싶다면 지상작전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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