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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걸프 전쟁, 우주 전쟁

by 소시민스토리 2024.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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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프 전쟁, 우주 전쟁

1991년 1월 17일 새벽 페르시아만에 떠 있던 미 해군 함정들은 미사일을 이라크를 향해 발사한다. 항공전이 개시되고 미군은 항공 작전에서 제공권을 장악했다. 모든 공역에서 이라크 내 전략 폭격 목표 타격이 가능해졌다.

 

걸프 전쟁, 사막의 폭풍작전

 

걸프 전쟁, 사막의 폭풍작전

걸프 전쟁, 사막의 폭풍작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조지 H. W. 부시는 사우디아라비아 방어를 위한 군대 파병을 논의하고 2차 세계대전 이후로 보기 힘들 정도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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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프 전쟁 전 이라크 지휘부 계획은 미군을 괴롭히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라크 방공망은 힘없이 뚫리고 말았다. 미군 공군기 F-117 나이트호크 활약이 대단했다. 42대가 참전하여 이라크 내 전략적 목표물 40%(총 1,296회)를 타격한다. 특히 바그다드 시내 12개 주요 시설을 파괴한다.  걸프 전쟁에서 F-117 작전 성공률은 100%였다. 단 한 대의 손실도 없었다. 

 

 

F-117은 이라크 오시라크 원전 공습 작전에 투입되었다. 오시라크 원전은 1980년 대 몇 차례 공습을 받았다. 1981년 6월 7일 바빌론작전으로 이스라엘 전투기들의 오시라크 원전 공습이 있었다. 이라크는 원전을 재건하면서 방공망을 강화했었다.  미군은 F-117을 투입하기 전 F-16 72대 등 100여 대의 전폭기로 이뤄진 스트라이크 패키지를 보내서 1991년 1월 19일 공습한다.  공습은 실패한다. F-16 2대는 격추되고 작전을 중단하고 후퇴한다. F-117 나이트호크가 8차례 투입되어 오시라크 원전 및 주변 연구단지를 완전 파괴한다. 

F-117이 엄청난 활약을 하면서 다국적군의 항공 작전에 힘을 싣는다. 

 

 

 

AWACS 공중조기경보통제기 E-3 센트리가 활약했다. 걸프 전쟁에 다국적 군이 참가했고 각국 공군기 간 데이터 송수신이 원활하지 않았던 시기였다. E-3 센트리는 관제탑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레이다로 정보를 수집해서 항공기 탐지,작전을 통제한다. 걸프전을 겪은 후 AWACS 공중조기경보통제기 역할 중요성을 깨닫는다.  항공 작전의 기본 중에 기본이 된다. 1대당 연간 운용유지비는 F-117A 1,329만 달러, E-3 센트리 3,432만 달러로  E-3센트리가 운용유지비가 더 든다. 공중조기경보통제기에 탑재된 레이다 시스템 비용이 어마어마하다. 

 

1991년 1월 30일 슈와츠코프 사령관은 작전 목적 대부분은 달성했다고 발표한다. 공군에게 쿠웨이트 내 이라크군 고립을 위한 후방 보급선 차단을 요청한다. 1991년 2월 7일 슈워츠코프가 지시를 내린다. 쿠웨이트 내 이라크군을 직접 공격하라고 한다. 2월 7일부터 공군은 전략 폭격을 하면서 후방 차단 작전과 지상군 공격을 한다. 공군은 킬박스를 설정한다. 한 면이 48Km 되는 정사각형으로 만든 다음 1개 안에  B-52, A-10, F-16, F-18 등 다양한 항공기를 통합해서 집중적으로 공격한다. 1개 킬박스를 4개 구역으로 분할해서 각각 공격부대를 할당해서 일정기간 동안 공격을 전담한다. 여러 공격 부대가 1/4을 순환하며 공격한다.

사막지역은 하늘에서 잘 보여서 킬박스가 가능한 전략이다. 산악, 강 등 복잡한 지형은 킬박스로 나누기 어렵다. 

 

1991년 2월 13일 F-117 2기가 바그다드 시내 방공호를 폭격한다.  공군은 이라크군 지휘 벙커라는 정보로 폭격을 했는데 사실은 민간인 공습 대피소였다. 바드다드 시민 최소 400명이 사망했다. 민간인 폭격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었고 백악관은 바그다드를 공격하지 말라고 한다. 바그다드는 폭격 대상에서 제외된다. 

 

1991년 2월 14~20일까지 이라크군 진지에 집중 폭격한다. 항공기 출격 횟수는 1일 평균 880소티가 일어난다. 이때부터 이라크군 탈주병이 발생한다. 이라크군 전선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항공 작전 총 38일 동안 10~11만 소티 출격했다. 당시에는 가장 긴 기간 동안 항공단일 작전이었다.  이 기록은 코소보전쟁(총 78일간)에서 기록이 깨졌다. 항공기 출격 횟수 최다 기록은 걸프 전쟁이다.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항공 작전이었다. 

걸프 전쟁에서 미 공군은 최첨단 아이디어로 무장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걸프 전쟁은 과학기술이 총 동원된 위성통신, GPS(위성항법시스템), 정찰위성을 활용한 우주전쟁이었다. 

1990년대 GPS 기술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걸프 전쟁 당시 GPS는 아직 실용화 초기 단계였다. 제대로 기능을 하려면 최소 24대 위성이 필요했다. 24대가 되어야 지구 어디에서든 24시간 동안 최소 4대의 위성 전파 수신이 가능하다. 걸프 전쟁 당시 GPS 위성은 16개뿐이었다. 1978년 미국이 군용으로 개발, 발사한 GPS 위성이 민간에 계방된 계기는 1983년 KAL 007 격추 사건이었다. 항로에서 벗어나 소련 영공에 진입했다가 소련 요격기에 격추되었다.

 

전 세계에 경각심을 불러 일으킨다. KAL 007 사건처럼 자이로스코프를 이용한 관성항법의 문제점이 부각되었다.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은 GPS를 민간에 개방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민간용 GPS는 위성이 쏘는 전파에 잡음을 섞어 위성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고 오차를 넣은 위성 위치를 전송한다. GPS 오차는 군용은 7~10m, 민간용은 100m  오차가 났다.  비행 항로를 찾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걸프 전쟁 당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GPS 장비 수요가 급증한다. 당시 군용 GPS는 너무 무겁고 비쌌다. 

PSN-8 맨팩 차량탑재용 GPS 수신기는 무게 8Kg이며 가격은 4만 5천 달러(현재 가치 약 1억 3,000만 원)였다. 총 지급 대수는 550대였다. 

 

AN/PSN-10 휴대용 GPS 수신기 무게는 1.8Kg이었다. 휴대용 GPS 수신기는 3,500대만 보급한다. 

GPS가 부족해지자 민간용 GPS을 사용하면서 잡음을 해제하고 전파를 보낸다. 걸프 전쟁 당시 임시 조치 이후 클린턴 대통령은 행정명령을 내린다. 2000년 5월부터 민간용 GPS도 위치 정확도가 저하되지 않은 신호를 수신한다. 2000년대 민간용 전파 제한이 없어지고 가격이 인하되었다. 

 

유럽연합, 러시아, 중국은 자체 개발 위성항법시스템을 발사했다. 러시아 위성항법시스템은 '글로나스', 유럽연합 위성항법시스템 '갈릴레오', 중국 위성항법시스템은 '베이더우'라고 부른다. 

현재 GPS 위성 다양화로 정확한 위치 측정이 가능해졌다. 

 

걸프 전쟁에서 GPS 사용으로 사막에서 작전 수행이 원활해졌다. 정찰 위성들이 엄청난 활약을 했다. 

미국은 정찰위성을 어마어마하게 쏘아 올렸다. 미 정찰위성 KH-11 케넌은 1976년 발사했고 세부 사항은 아직 기밀로 묶여있다. 걸프전 당시 6대가 운행 중이었다. 이라크는 자신들의 무기를 숨겨 놓았다. 동굴을 파고 그 안에 무기를 엄폐하고 있었다. KH-11 정찰 위성에는 적외선 카메라가 탑재되어 아주 미세한 적외선까지 탐지 가능했다. 정찰위성을 통한 핀포인팅이 가능했다. 정찰위성 KH-11, 1대 가격은 6조 원 정도이다. 

수많은 GPS 위성과 정찰위성이 동원되어 이라크를 감시하고 있었다. 

 

이라크는 핵무기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독가스를 이용한 화학무기를 개발하고 대량살상무기를 개발 보유한다. 제2차 세계 대전 독일이 개발한 대구경포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이라크의 야심작, 슈퍼건을 개발한다. 

슈퍼건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989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난 이후 바그다드 무기 박람회가 개최된다. 

사담 후세인은 높은 방위산업 수준을 보여주기 위해 다양한 무기 모형, 실물들을 전시한다. 그중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거대한 대포 모형이 있었다. 거대 대포를 본 이스라엘은 긴장한다. 이스라엘까지 공격 가능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노린 초장거리 대포라고 의혹을 제기한다. 

 

이스라엘은 정보를 총 동원해 슈퍼건 설계 공학자 제럴드 불 박사를 찾아낸다. 괴짜 박사로 알려져 있고 캐나다 출신 미국 공학자였다. 16세에 대학에 입학해서 23세 공기역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캐나다 군비 및 연구개발기구(CARDE)에서 대포와 탄도학 연구를 했다. 1960년대 대포를 이용한 무기 체계를 선전한다. 미국-캐나다 국방부 합작으로 고고도 연구 프로젝트 HARP를 추진했지만 60년 대 후반 연구 비용 등의 문제로 개발이 중단된다.

 

연구 당시 제럴드 불이 많이 참고 했던 것이 독일 과학기술이었다.

독일의 기술들을 취합해 아이디어를 발전시키지만 정부에서 후원하지 않았고 개인회사 우주연구회사를 설립했다. 제럴드 볼은 연구비 마련을 위해 각종 대포를 설계해서 판매를 한다. 

제럴드 불이 설계한 155mm 곡사포 GC-45는 최대 사거리가 40Km였다. 장사정포가 필요한 나라에 판매했다. 앙골라 내전에 개입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소련제 장사정포를 상대한 대포가 필요했고 GC-45를 구매했다. 

 

이것은 문제가 된다. 70년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정책, 아파르트헤이트로 인해 국제 사회에서 무기 금수 조치를 포함한 경제제재를 시행하고 있었다. 미국 국적의 제럴드 불이 무기를 판매한 것으로 UN안보리 결의안 418호 위반, 불법 무기 거래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6개월이 선고되었다. 

 

제럴드 불은 이 일을 계기로 벨기에 브뤼셀로 회사를 옮겨 거침없이 기술을 판매하기 시작한다. 여러 나라로 기술이 흘러간다. 이라크는 장사정포에 관심이 많았고 제럴드 불과 협력해 대포를 개발한다. 

이라크 자주포 개발과 야포 성능 개량에 큰 도움을 준다. 제럴드 불은 이라크에서 자신의 못다 한 꿈을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1980년대 후반 슈퍼건 개발을 본격화하면서 '바빌론 프로젝트'로 이름 짓는다. 

 

초기 슈퍼건의 계획은 구경 1m, 포신 길이 150m로 언덕을 깎아 거치시킨 후 발사한다는 계획이었다. 

대포 제조에 필요한 자재를 수입해야 한다. 유난히 큰 자재들을 수입하면서 이라크는 유전에 사용할 큰 송유관을 만드는데 필요하다고 말한다. 

국제 사회의 감시 눈을 피하기 위해 걸프전까지는 슈퍼건 미니어처 버전으로 350mm 구경의 대포를 언덕에 설치하고 있었다. '베이비 바빌론'이라 불렀다. 

 

1990년 3월 22일 제럴드 불 박사는 총에 맞아 암살당한다. 정확한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스라엘 첩보기관 모사드의 소행으로 추측한다. 미니 슈퍼건의 수평 시험 사격 이후 구경 1m 슈퍼건 개발을 본격적으로 진행하던 중이었다. 제럴드 불 암살로 슈퍼건 개발 바빌론 프로젝트는 중단되었다. 

걸프전쟁이 끝난 후 UN결의안 687호는 이라크의 화학, 생물학 및 핵무기 능력과 미사일 파괴였다. 

걸프 전쟁 이후 UN 사찰단은 슈퍼건 잔해를 모두 파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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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는 다국적군의 압도적인 항공작전으로 반격할 카드가 마땅치 않았다. 이라크는 스커드미사일을 꺼낸다. 서방에서 스커드 미사일 공격을 두려워했다. 스커드 미사일의 탄두에 생화학무기가 장착된다면 어마어마한 인명 피해가 예상되었다. 

미군 훈련 시 방독면, 방호복을 착용할 정도로 스커드 미사일은 민감한 이슈였다. 개전 다음 날 이라크는 7발의 스커드 미사일을 발사한다. 스커드 미사일을 이스라엘에 발사한다. 다국적국에 참가한 아랍국가들을 분열시키려는 의도였다. 

 

화가 나서 보복하려는 이스라엘을 미국은 달래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스커드 미사일을 못 막으면 이라크를 직접 공격하겠다고 한다. 미국입장에서 스커드 미사일을 막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걸프 전쟁 첫 주 스커드 미사일 38발이 발사됐다.  종전까지 총 81발의 스커드 미사일을 발사했다.

미국은 스커드 미사일을 막기 위해 패트리엇 미사일을 등판시킨다. 1991년 1월 29일 미군은 패트리엇 명중률은 100%이며 우리에게 날아온 33발 모두 격추시켰다고 공표한다. 1994년 4월 패트리엇 미사일은 주한미군에도 배치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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