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프 전쟁, 사막의 폭풍작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조지 H. W. 부시는 사우디아라비아 방어를 위한 군대 파병을 논의하고 2차 세계대전 이후로 보기 힘들 정도로 가장 강력한 부대들이 사우디아라비아에 배치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연합군이 결성되었다. UN이 승인한 전쟁은 거의 없다. UN은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모든 문제는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다.(UN 헌장 제2조 4항) 무력을 사용해서 갈등이 생기면 UN이 평화적으로 해결한다. UN은 전쟁 방지, 평화 유지를 위한 국제 협력 역할을 한다. 첫 번째 UN의 무력 사용 승인은 6.25 전쟁으로 유엔군을 결성했다. 걸프 전쟁은 두 번째로 UN이 승인했다. 국제 평화와 안전 유지의 책임을 유념한 결정이었다. (UN결의안 678호) 하지만 6.25 전쟁과는 다르게 유엔군을 결성하지 않았다.
걸프 전쟁에 참여한 다국적군은 총 39개국으로 전투부대, 비전투부대, 물자지원, 의료지원 등 총병력 약 100만 명이었다.
연합군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사우디아라비아 방어를 위해 모인 세계 각국의 군대는 각각 참전 목적이 달랐다. 6.25전쟁 참전의 대의는 공산주의 국가 북한의 공격에서 대한민국을 지키자는 한 가지 목적이었다.
걸프 전쟁의 39개 국가의 참전 목적은 일부 국가는 이라크 경제제재에 가담해서 국제 사회에서 이익을 얻을 목적이었고 어떤 국가는 사우디아라비아 수로. 해로 방어 목적이 있었다.
6.25 전쟁은 UN 안보리 결의안 84호에 미국이 주도하는 통합사령부 결성이 포함되어 있다. 걸프 전쟁 결의안에는 통합사령부 결성에 관한 조항이 없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 주도 연합군에 참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다른 아랍국가가 반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엔군이라는 단일한 깃발아래 소속될 수 없는 상황들이 연합군이 아닌 다국적군으로 부르게 했다. 다국적군은 단일화된 지휘체계가 없었다.
걸프 전쟁에서는 이원화된 2개 사령부가 존재했다.
미국이 지휘하는 중부사령부는 슈워츠코프가 맡았다.
영국, 캐나다, 이탈리아, 아르헨티나, 튀르키예, 오스트레일리아, 네덜란드, 뉴질랜드, 필리핀, 폴란드, 루마니아, 벨기에, 중국, 체코슬로바키아, 덴마크, 대한민국, 포르투갈, 독일, 그리스, 헝가리, 일본이 속해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지휘하는 아랍합동군은 칼리드가 맡았다. 프랑스, 쿠웨이트, 오만, 이집트,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시리아, 시에라리온, 모로코, 바레인,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니제르, 세네갈이 속해 있었다.
군사적으로 이원화된 조직 체계는 비효율적이다. 이것은 정치적인 이유가 숨어 있었다. 전쟁 명분으로 사우디아라비아의 주권을 배려해야 했다. 걸프 전쟁은 미국의 전쟁이 아닌 사우디아라비아 방어를 위한 전쟁이어야 했다. 전쟁 비용 총 600억 달러 중 사우디아라비아가 약 360억 달러를 부담했다. 이러한 정치 이유로 사우디아라비아를 미군 지휘 아래에 둘 수 없어 분리를 시킨 것이다.
아랍군대는 대부분 사우디아라비아에 주둔했고 쿠웨이트 해방 작전은 미군과 영국군이 주도했다.
프랑스군은 아랍합동군 소속이었다가 사막의 폭풍 작전 시작 직전에 군사적 이유로 미군 중부사령부 지휘아래로 들어온다.
대한민국은 의료지원단 154명, 공군수송단 160명을 파병하였다. 일본은 파병이 불가하여 130억 달러를 지원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파병을 망설였다. 석유 수입국이어서 석유 생산 지역, 중동지역의 전쟁 개입이 부담이 되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노태우정부 7.7선언 이후 외교 다변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당시 정부로서는 걸프 전쟁 참전이 국익, 무역에 끼치는 영향을 고려해야 했다. 대부분의 아랍국가가 파병을 하자 대한민국은 참전을 결정했다.
세계는 격동속에 있었다. 참전을 고민한 나라가 있는 반면 전쟁을 기회삼아 목적을 달성하고 싶어 하는 단체도 등장했다. 영국의 북아일랜드 통치를 반대하는 아일랜드 공화국군 IRA가 테러를 일으킨다.
1991년 2월 7일 걸프 전쟁에 대해 논의 중이던 영국 총리 관저에 사제 박격포 공격을 했다.
이라크 내 쿠르드족의 분리, 독립 움직임이 일어났다. 격동속에서 각각 다른 속내를 가진 다국적군은 싸울 준비를 마치고 이라크 사담 후세인을 향해 최후통첩을 한다.
이라크에 전한 최후통첩은 UN안보리 결의안 678호였다.
"1991년 1월 15일까지 쿠웨이트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필요한 모든 수단을 가용해서 쫓아내겠다."
사담 후세인은 거부했고 사우디아라비아 방패 작전에서 쿠웨이트 해방 작전으로 바꾼다.
사막의 폭풍작전
'사막의 폭풍' 작전으로 이름을 붙인다. 사막의 방패작전 기간 동안 이미 사막의 폭풍작전을 준비하고 있었고
핵심으로 미 제7군단이 투입된다.
사막의 폭풍은 압도적으로 확 휘몰아처버리고 지속기간은 짧다. 사막의 모래 폭풍처럼 군사작전을 빨리 끝내겠다는 뜻으로 작전이름을 '사막의 폭풍'이라 명명한다. 미군은 한 달 이내에 작전을 끝내겠다고 계획한다.
11월 29일 결의안을 통과할 때 최후 통첩 시한은 1991년 1월 15일이었다. 11월 29일 시점에서 미 제7군단이 아직 도착하기 전이었다. 당시 3월 17~4월 14일까지는 이슬람 절기 라마단이 시작된다. 라마단 기간에는 전쟁이 불가능하다.
라마단은 이슬람에게 신성하게 여기는 기간으로 일출부터 일몰까지 금식하고 5번 기도를 드린다.
라마단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더위가 시작된다. 평균 온도는 40도가 넘는 사막의 온도 때문에 전쟁은 불가능하다.
후세인은 최후 통첩을 거부했다. 어마어마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자신감이 넘쳤다. 세계 4위의 육군을 가지고 있었고 총병력은 약 100만 명이었다.
전차 4,900대, 야포 3,500문으로 강력한 전력을 가지고 있어 미국을 이길 수는 없을지라도 곤경에 빠뜨릴 수 있고 베트남 전쟁의 치욕을 다시 한번 만들어 주겠다는 것이었다. 1955~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15년 후 걸프 전쟁이 발발했다. 걸프 전쟁 후 슈워츠코프 사령관은 베트남 전쟁의 결과로 미국이 잃은 자부심을 걸프 전쟁을 통해서 미국에 돌려주었다고 말한다. 콜린 파월은 드디어 베트남 전쟁 증후군을 이라크 사막에 묻었다고 말한다. 미국에 있어서 베트남 전쟁의 영향이 남아있었고 미군 지휘부는 대부분 베트남 전쟁에 직접 참여한 경험이 있었다. 이라크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 트라우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라크는 방공망이 만만치 않았다. 지대공 미사일 기지 150여 곳이었고 배치된 미사일은 약 16,000발이었다. 레이다 유도 지대공 미사일이 약 7,000발, 휴대용 미사일 맨패즈 약 9,000발을 가지고 있어 충분히 방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공군력이 강한 이란 공군기 격추를 위해 프랑스. 소련 방공 시스템을 도입했었다. 운용 노하우가 있었고 미군 공군력도 대응이 가능하다고 판단한다.
사담 후세인과 이라크군 수뇌부의 자신감 속에는 미군 5,000 명만 죽어도 미국 내 반전여론으로 후퇴하게 될 것이고 이라크는 쿠웨이트 점령을 인정 받게 될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사담 후세인이 UN결의안(최후통첩)을 받았을 때 속마음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요르단 후세인 국왕은 미국-이라크 간 중재에 나섰고 미국 특사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었다. 하지만 후세인은 발을 뺄 수가 없었다.
쿠웨이트에서 이라크 군 철수를 제시한 요르단의 조건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아랍국가들 사이에서 이라크의 위신이 흔들릴 것을 염려하고 있었다. 이라크 국내에서도 정치적으로 입지가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서 더 불안해진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약하게 보이면 미국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라크는 이런저런 계산 끝에 전쟁을 결정한다.
걸프 전쟁 개전
작전의 핵심은 처음부터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고 강력한 이라크의 방어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대규모 공습, 항공전을 계획한다. 항공전은 4단계로 나누어 계획을 한다.항공전 1단계로 전략적 목표를 제거하는 것이다. 이라크군의 제공권을 장악하고 당시 개발 중인 핵무기,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확인된 생화학 무기(겨자가스, 사린, 타분 등)를 제거하는 것이 목표였다. 스커드 미사일, 알후세인 미사일 기지를 제거하고 지휘통제 역량을 파괴하는 전략시설 초토호 작전을 계획한다. 항공전 2단계로는 쿠웨이트 방공망을 제압한다.
항공전 3단계는 이라크 지상군을 공격하고 전차, 장갑차, 야포를 격파한다. 항공전 4단계는 지상군 근접 지원을 한다는 계획이었다.
전 세계에서 모인 다국적군 공군들이 사우디아라비아 기지로 집결했다. 페르시아만, 홍해에 미 해군 함정들이 모인다. 태평양 전쟁 중 가장 마지막에 취역하고 항복 문서 조인식이 열렸던 전함 USS 미주리 전함이 투입된다. 냉전시대 전함은 군비 감축을 이유로 퇴역시켰다. 하지만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 시절 소련 해군이 수상함 전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에 미 해군의 전력보강을 위한 (레이건 행정부 해군력 재건 프로젝트) 600척 해군 계획 당시 아이오와급 전함을 재취역했다.
아이오와급 전함에 순항미사일 BGM-109 토마호크를 탑재했다. USS 미주리 BB-63와 USS 위스콘신 BB-64 전함이 걸프전에 투입됐다.
전함이 등장했다. 미 해군 아이오와급 전함 16인치(약 40.6cm) 주포를 탑재했다. 1990년 8월 USS위스콘신이 페르시아만에 도착했고 페르시아만에 배치된 수많은 미 해군 함정들의 토마호크 미사일 공격을 총지휘했다.
1991년 1월 USS 미주리가 합류하며 미 해군 군함 배치가 완료된다.
1991년 1월 17일 항공전이 개시된다. 1월 17일 새벽에 페르시아만에 떠 있던 미 해군 함정들이 BGM-109 토마호크 미사일을 발사한다. 개전 첫날 미 해군은 토마호크 미사일 47발을 발사했다. 내륙으로 날아가서 바그다드와 그 주변 이라크 지휘 통제 시설과 주요 거점에 정확히 타격한다. 걸프 전쟁은 전 세계가 생중계로 지켜봤다.
아파치 헬기의 레아 사이트 공격 후 다른 공군기가 출격한다. 처음 출격한 F-117 나이트 호크 공군기는 바그다드 주요 전략 시설을 타격한다. 1파 공격이다. 일출과 동시에 2파 공격이 시작된다. 2파 공격은 전략 폭격을 하는 동시에 방공 제압 작전을 한다. A-10 선더볼트는 2파 공격에서 150 소티 공격한다. F-16 파이팅 팰컨은 쿠웨이트 내 항공, 미사일 기지를 공격한다.
공습 첫날 밤 700여 대의 항공기가 이라크 영내에서 다양한 목표를 가지고 공격했다. 미 폭격기 B-52 스트래토포트리스는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를 폭격했다. 항공전 계획 1~4단계가 공습 첫날 모두 수행됐다고 볼 수 있다.
첫날 공격만으로도 이라크는 엄청난 타격을 받았고 이라크 공군은 조직화된 방공 작전을 수행하기에 불가능해졌다. 첫날 같은 공습은 일주일 동안 지속된다.
개전 2~3일이 지난 후 이라크 방공망은 무너지고 있었다. 레이다 기지가 거의 파괴돼서 대공미사일을 발사할 수 없었고 공군기 유도가 불가능했다.
1991년 1월24일 항공전 2주 차에 이라크군은 항공 작전을 전혀 실시하지 않는다. 이라크 공군은 강화 콘크리트로 된 셸터에 항공기를 숨겨 놓았다. 이라크군은 초반 정면 승부가 위험하다고 판단했고 이라크 주력 항공기를 최대한 숨겨 놓았다. 이라크 계획은 강력한 방공망으로 적 항공 전력을 약화시킨 후 결정적인 순간에 투입해서 정면 승부를 걸겠다는 의도였다.
1월 24일부터 이전 폭격에 더해서 이라크 항공기 파괴를 위해 셸터를 공격한다. 이라크 공군은 공습을 견디지 못하고 이란으로 도망을 간다. 1991년 1월 말까지 이라크 공군기 100대는 이란으로 탈출했고 상당수는 격추됐다. 이전 이라크와 전쟁을 벌였던 이란은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이후 중립을 선언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공격에 대해서 규탄 성명을 발표했다. 이란의 입장에서는 이라크도 싫지만 쿠웨이트에 미군과 다국적군이 개입되는 것도 싫어했다. 이란 혁명으로 표면화, 확산된 반미 감정으로 이란 내에서도 걸프 전쟁에 대한 상반된 입장이 존재했다.
1991년 1월 27일 슈워츠코프는 작전 브리핑을 한다. 미군이 항공 작전에서 제공권을 장악했다고 한다. 이제부터는 다국국전 공군이 다양한 고도, 모든 공역에서 이라크 내 대부분의 전략 폭격 목표를 타격 가능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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