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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걸프 전쟁 전 중동 갈등의 역사

by 소시민스토리 2024.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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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프 전쟁 전 중동 갈등의 역사 

1990년 8월 2일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다. 쿠웨이트 해방을 위해 국제 사회는 개입한다. 전 세계가 생중계로 지켜본 최초의 전쟁이었다. 다국적군은 첨단 하이테크 무기를 앞세워 활약한다.

 

 

16세기에서 19세기까지 장악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의 약화로 중동은 본격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1908년 엔베르 파샤가 청년 투르크 혁명을 일으켜 입헌군주제를 부활시킨다. 1914년 전쟁장관에 오르며 오스만 제국의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면서 오스만 튀르키예 민족주의가 시작된다. 오스만 제국 내부에서 시작된 변화였다. 19세기 중반 점점 약화하기 시작한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가 동진을 하면서 제국의 힘은 더 약해졌다. 러시아 확장을 경계한 영국, 독일,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이 버텨주기를 바랐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오스만 제국은 독일 편에 선다. 독일과 동맹을 맺으니 영국, 프랑스는 태세전환을 한다.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을 해체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하자 1920년 8월 10일 세브르 조약이 체결되고 오스만 제국도 해체가 된다. 

 

 

제1차 세계대전 혼란한 중동 상황을 보여주는 영화, 1962년 개봉 <아라비아의 로렌스>이다. 

아랍국 정보부대 영국군 장교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의 일대기를 담은 영화다. 1916년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시기 아랍민족들은 전쟁의 혼란을 틈타 독립을 꿈꾸었다. 오스만 제국에 대항한 아랍 반란(1916~1918년)이 일어났다. 독일은 오스만 제국 군사력 강화를 위해 전함, 군사고문단을 파견하여 군사훈련을 했고 아랍군은 오스만군에게 번번이 참패한다. 

 

훈련을 받은 오스만군에게 아랍군이 계속 고전을 면치 못하자 영국이 아랍군을 돕기 위해 영국군 로렌스를 아랍군이 세운 왕국 헤자즈 왕국으로 파견한다.

로렌스는 반란군의 중추였던 후세인 샤리프의 아들 파이살왕자에게 가서 그와 함께 오스만 제국군을 물리치면서 거의 독립을 쟁취하는 직전까지가 영화의 배경이다.

영국은 아랍민족에게 독립을 약속했다. 아랍부족을 도와서 뒤에서 튀르키예를 뒤에서 치는 역할을 한다.

 

1916년 영국, 프랑스는 사이크스-피코협정을 맺는다. 1차 대전이 끝나기 전에 영국 외교관 마크 사이크스와 프랑스 외교관 프랑수아 조르주 피코는 만나서 협의를 한다. 중동지역에서의 오스만 제국이 약화되면 통제권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협상을 한다. 영국과 프랑스는 아랍부족에게 독립을 약속했었지만 사이크스-피코협정에는 아랍 민족 독립에 대한 조항은 전혀 없었다. 

 

아랍을 중간에서 나누어서 아래지역은 영국, 중간에서 북쪽은 프랑스가 가지기로 한다. 

영국은 지중해와 접해있지 않으며 석유가 나는 지역에 관심이 많았다. 이집트 수에즈 운하를 거쳐서 걸프만으로 들어가려 한다. 프랑스는 지중해 대한 패권이 있어 지중해 연안지역을 가지려 한다. 지금도 시리아, 레바논 지역은 프랑스 통치의 영향이 남아있다. 영국 외무장관 아서 벨푸어가 로스차일드에게 보낸 서신 벨푸어선언에는 팔레스타인이 사는 땅에 유대인의 '민족의 고향' 설립을 약속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영국은 이율배반적인 약속을 아랍민족과 유대인에게 한다. 아랍 민족은 영국에게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로스차일드 같은 유럽에 살고 있는 유대인 대부호가문이 제1차 세계대전에 협력한 대가로 유대인의 염원이던 팔레스타인 영토에 유대 민족을 위한 국가 설립 지원을 약속했다. 

 

아랍민족에게는 성지가 중요하다. 아라비아 반도 내에 있는 두 군데는 매카 예언자 성원, 메디나 하람 성원이 있다. 유대인 거주지역 예루살렘에  알 아크사 성원이 있다. 이슬람 성지를 뺏겼다는 것은 아랍인들에게 정신적, 종교적 충격이었다. 

 

사이크스-피코 협정 당시 러시아의 움직임에 영국과 프랑스가 주시를 하고 있었다.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의 이해관계를 주장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합의를 했지만 러시아가 자기 몫을 주장할지 모른다는 고민이 있었다.  이에 러시아와 협정을 함께 협의한다. 

 

러시아에서 1917년 2월, 10월 두 차례 혁명이 발발해 러시아는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고 독일과 정전협정을 하고 항복선언을 한다. 협정에 함께 합의했던 러시아는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폭로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에서 산레모회의가 열렸다. 오스만 제국 영토 분할을 다시 조정했다. 핵심 중의 하나는 세계 4대 문명 발상지 중 하나 유프라테스, 티크리스강 지역, 유대인 정착지 팔레스타인 지역은 영국 영향권에 넣는다. 나머지 지역 대부분은 프랑스 지역으로 넣는다. 

 

강, 산맥 같은 지역환경에 의한  국경이 있고 지도에 자를 대고 그은 국경이 있다. 자를 대고 그은 국경 대부분 제국주의의 유산이다. 아랍, 중동지역에도 자로 잰 국경이 제국주의에 의해 생긴다. 한 종족이 다른 지역에서 거주하게 된다. 대표적인 흩어진 소수민족 쿠르드족(2,500~3,500만 명 추정)이다. 영국영역, 프랑스 영역으로 나뉘다 보니 쿠르드족이 튀르키에, 시리아, 이라크 등에 흩어져 살며 거주 지역에서 갈등들이 발생한다.

 

국경을 자로 재서 나누다 보니 한 지역에 다양한 종족이 거주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국가가 이라크이다. 수니파 아랍인, 시아파 아랍인, 무슬림 쿠르드족, 아시리아인, 야지디 쿠르드족들이 한 곳에 모여 살다 보니 갈등들이 수없이 반복된다. 이렇듯 강대국의 제멋대로 자로 그은 국경이 분쟁의 씨앗이 되고 있다. 

 

아랍민족들은 독립국을 세워야 하는 자신들의 땅에 강대국이 선을 긋고 자기 땅으로 가져간다고 하자 분노한다.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마지막 부분에 나온다. 아랍군을 이끌고 다마스쿠스를 점령한 파이살 왕자와 로렌스는 독립국을 만든다. 프랑스가 다마스쿠스는 프랑스 땅이라며 왕정을 무너뜨리고 쫓아낸다.

아랍은 분노로 들끓었다. 영국은 무마시키기 위해 영국 보호령(위임 통치령) 왕국 설립을 약속한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쫓아낸 파이살 왕자의 가문, 하심 가문을 이용해서 아랍인들을 무마시킨다. 이라크지역은 파이살 1세, 요르단 지역은 둘째 아들 압둘라 1세에게 준다. 강대국 간에 이해관계에 국경이 생기면서 종교, 민족의 차이로 이라크는 다양한 갈등 요소를 안게 된다. 

 

이라크 영토가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별개의 행정구역, 주로써 나누어져 있었다. 중부 지역 바그다드는 메소포타미아 문명 발상지로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이 흐르는 비옥한 농토지역으로 농업이 발달했다. 옆에 있는 

페르시아 (지금 이란)과 교류가 많았다. 이란은 대표적인 시아파국가로 이라크 중부지역에 시아파가 많이 살았다. 이라크 북부는 튀르키예와 인접해 있다 보니 시리아와 튀르키예와 가까운 지역이었다. 쿠르드족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이었다.

 

반면 페르시아만과 인접한 남쪽은 정체성이 달랐다. 페르시아만이 예전에는 수에즈 운하가 없어서 지중해에서 사막을 건너 다니는 대상들이 물건을 실어 날라서 페르시아만까지 가지고 오면 배를 띄워서 인도로 보내는 중요한 무역 기지 역할을 했다. 교역이 성행해서 이라크 남부인들은 상인 기질을 지녔다. 

이질적인 인구집단을 한 국가로 강제로 묶어 놓으니 어마어마한 갈등이 내재되어 있었다. 

 

1908년 페르시아(현재 이란)에서 석유가 채굴된다. 주변으로 가장 큰 석유저장지역이 몰려있다. 

검은 황금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석유로 인한 중동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시작된다. 

강대국들은 채굴권 확보에 나선다. 독일은 이라크 북부(당시 오스만 제국 영토)에  영국과 독일 대기업 공동 투자로 튀르키예 석유회사를 설립해 석유 채굴권을 확보한다.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독일이 패하자 승리한 연합군은 배상금 명목으로 채굴권을 가져간다. 이라크 채굴권은 프랑스로 넘어간다. 

 

 

 

이때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 미국이 끼어든다. 당시 미국은 세계 석유산업의 선두주자였다. 핵심적인 유전은 미국이 다 가지고 있었다. 남북전쟁 직후 1870년대부터 펜실베이니아를 시작으로 오하이오, 텍사스, 캘리포니아에 19세기 후반에 계속 유전이 발견이 되면서 미국은 어마어마한 석유회사들이 생겨나게 된다.

석유왕으로 등극한 인물은 미국 역사상 최대의 부자, 록펠러였다.

 

1870년 스탠더드 오일을 설립했다. 19세기말~20세기 초 미국 내 석유점유율 90% 전 세계 석유산업을 과점했다. 미국은 독점 자본주의의 폐해가 심하다고 하면서 1911년 스탠더드 오일에게 반독점법 위반 판결을 하고 스탠더드 오일 회사를 43개 회사로 분리시킨다. 굵직한 몇 개 회사는 중동지역의 틈을 노리고 진출한다. 

1927년 이라크 북부 키르쿠크 일대에서 유전이 발견된다. 영국, 프랑스, 미국 석유회사들끼리 레드라인 협정을 맺어서 아라비아 반도에서 석유는 독점하며 다른 나라는 개발이 금지되고 이익은 공유하기로 한다. 

아라비아 반도 주변에 그은 레드라인 안에서 공동개발을 해 같이 이익을 나누기로 한다. 

 

레드라인에는 쿠웨이트가 빠져있다. 쿠웨이트는 영국이 독점적으로 권리를 가진다. 쿠웨이트는 1899년 오스만제국 자치령이면서 영국 보호령이 되었다. 페르시아만 무역이 한창 성행하던 시기에 동인도 회사의 주 무역 항로로서 항구도시로 성장하며 상업 중심지로 발달한다. 쿠웨이트는 오스만제국의 한 도시였지만 자치 지구로 인정되었다. 

 

 

남북전쟁 후 1870년대부터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석유가 채굴되면서 개발 초기 등유를 추출해 사용했다. 등유는 등불을 켜거나 난로를 피우는 데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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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증기기관으로 추진하는 군함을 본격적으로 사용한다. 배에 많은 양의 석탄을 싣는 것부터 문제가 되었다. 고체 연료로 싣고 내리는 데 엄청난 인력이 소모가 되었다. 액체인 석유는 파이프를 통해 손쉽게 실을 수 있었다. 선박 엔진에 기술혁명이 일어난다. 영국 발명가 찰스 파슨스가 1884년 증기 터빈을 개발한다. 

 

1894년 파슨스는 자신이 만든 터빈을 성능을 보여주기 위해 증기 터빈으로 추진하는 실험용 선박 터비니아호를 건조했다. 1897년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주년 다이아몬드 주빌리를 맞아 관함식을 개최한다. 

영국 및 타국 군함들이 모여 해상사열을 진행하던 중 작은 배 터비니아호가 군함들 사이를 휘젓고 다닌다. 

터비니아호 속도는 34.5노트(시속 약 63.8Km)였다. 증기기관 추진 군함 속도는 20노트 이하(시속 약 37.4Km)였다. 영국 해군 경비정이 쫓아가 보지만 추격이 불가능했다. 1899년 영국 군함은 증기 터빈 엔진으로 교체를 시작한다. 영국 드레드노트급 전함은 증기 터빈 방식을 채용하면서 속도 21노트 (시속 약 39km)까지 나온다.

 

영국은 독일과 건함 경쟁이 붙는다. 독일은 증기 터빈 연료로 석탄 대신 석유를 쓰고 있었다. 석유는 선적이 용이하고 매연은 석탄보다 감소하고 발열량이 많다. 1914년 전함 연료를 당시 해군장관 윈스턴 처칠은 석유로 바꾸기로 결정한다. 영국 정부는 이란의 석유 채굴권을 가진 회사를 인수한다. 현재 영국 최대 석유회사 'BP'의 전신이 되는 앵글로 페르시안 석유회사이다. 영국을 선두로 다른 나라들도 선박 연료를 석유로 바꾸기 시작한다. 본격적으로 마이카 시대가 열리기 시작하면서 석유 수요는 급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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