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국주의의 광기, 731부대 만행
일제 강점기 막바지 살아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자행한 일본 731부대가 있었다. 생체 실험의 실험대상이 된 무고한 사람들을 '마루타'라 불렀다. 마루타는 통나무라는 뜻이다.
사람을 고통을 못 느끼는 통나무라 취급하면서 끔찍한 생체실험을 자행했다.
"피실험자를 묶어놓고 세균이 섞인 물을 입에 부어 넣었다. 매일 10~20명, 총 400여 명에게 사용하였다.
우리가 제일 많이 사용한 균은 페스트균, 장티푸스균, 디프테리아균이었다.
어떤 사람은 3일 후에 죽었고 어떤 사람은 7일 후에 죽었다.
반항이 심한 사람은 그 자리에서 총살하기도 하였다.
-731부대 분대장 '야마시타 노부루' 진술(1952)
일본 제국주의는 만주사변이 일어나면서 본격적으로 대륙진출을 한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와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고 춥고 광활한 땅 러시아에서 효율적으로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한다.
※만주사변(1931년 9월 18일)은 일제가 고의로 남만주 철도를 폭파한 후 중국의 소행이라 트집 잡으며 시작한 전쟁이다.
중일전쟁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중국인을 상대로 한 세균전을 구상한다.
만주사변 후 중국 북동부에 만주국을 건설한다. 기시 노부스케(1896~1987)는 전 일본 총리 아베 신조의 외조부이며 A급 전범 용의자, 전 일본총리는 만주국에 산업부 차장이었다.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사이에 일본은 극우화가 된다. 일제의 야욕은 만주, 중국, 러시아로 점점 더 커져간다. 전선은 계속 확장되었고 일본의 자원과 인력은 한정되었다. 이것을 타계하려면 과학전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세균전을 준비한다.
제네바 협정에서 전선에서 생화학 무기 사용을 금지했지만 일본은 <제네바 의정서>에 비준하지 않았다.
또한 활용에 대한 금지는 있었지만 연구,제조에 대해서는 금지 조약이 없었다.
※제네바 의정서(1925년 6월 17일)는 전쟁 시 생물학 무기와 화학 무기의 사용을 금지한 조약이다. 생화학 무기의 생산, 보유, 이동은 허용되었고 사용만 금지되었다.
연구라는 명목으로 생체 실험을 강행했다. 실질적으로 일본이 반성하지 않는 이유는 세균전은 일본 과학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731부대 실험 성과가 현재 일본 의학의 기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시이 시로(1892~1959년)는 731부대 부대장이다. 1932년 도쿄 육군군의 학교에 731부대의 시초 세균 실험실을 개설한다. 1933년 만주 하얼빈으로 실험실을 이전한다. 도쿄에서 생체 실험을 진행할 경우 외부 노출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하얼빈으로 옮기게 되고 일본인이 아닌 중국인, 러시아인, 몽골인, 조선인 등 생체 실험 대상자를 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자국에서 실험을 할 경우 2차 세균 감염과 환경 파괴의 위험성이 높기 때문에 일본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만주에서 실험을 했다. 세균 실험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1938년 하얼빈 핑팡 지역으로 731 부대를 이전한다. 부대를 새롭게 조성하면서 특설 감옥을 짓는다. 생체 실험용 수용시설이었다. 731부대 규모는 80㎢(상암월드컵 경기장 약 1만 1천 개 크기)로 특설 감옥을 중심으로 대규모 시설을 갖춘다. 2층 수용실을 둘러싼 3층 높이 실험실이 있었는데 탈출을 못하게 하기 위한 구조였다.
특설감옥, 동물 사육실, 독가스 제조실, 세균폭탄 제조실, 동상 실험실 등이 있었다. 세균 무기를 실어 나르기 위한 비행장까지 마련한다.
731부대를 중국인들은 늑대소굴이라 불렀다.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보다 731부대 감옥은 더 폐쇄적인 구조였다.
"세균 실험을 진행하는데 주로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였다.
하나는 세균을 먹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피하조직에 주사하는 것이다.
죽은 사람은 화장하였는데
어떤 때는 숨이 붙어있는 사람도 끌어다가 화장하였다.
군의관들은 (감염됐으나 아직 살아있는)사람의 머리, 어깻죽지, 넓적다리를 분해하고
우리 조교들은 다시 분해하며 해부를 진행하고 세균의 작용을 연구하였다.
731부대에서는 죽은 사람, 산 사람을 모두 해부하였다."
-731부대 분대장 '야마시타 노부루'진술 (1952)
731부대는 페스트, 장티푸스, 디프테리아 등의 세균 실험을 주로 했다. 전염력을 얼마나 높일까를 연구하는 실험으로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어떻게 하면 빨리 죽일까를 실험했다. 세균 주입 방법으로 주사로 직접 투여하거나 음식과 함께 섭취하거나 감염된 벼룩과 감금 등 잔혹한 실험을 했다. 최상의 실험 결과를 위한 조건으로 실험 대상자의 건강상태였다. 실험 대상자에게 양호한 음식과 환경을 제공한다. 오로지 실험 목적을 위한 관리였다.
소련과의 전쟁을 염두에 둔 일본은 추위에 대한 대응이 관건이었다. 한 겨울 영하 30℃를 웃도는 매서운 추위의 동상 원인과 치료 방법을 연구했다. 야외에서 강제로 생존한 사람의 신체에 물을 부어 동상에 걸리도록 유도한다. 꽁꽁 얼어있는 신체를 부러뜨린 후 훼손된 신체 부위를 관찰한다. 생체 훼손과정을 보면서 동상 연구를 한다. 체온이 얼마나 낮아지면 사람이 죽는지를 실험했다.
"사람은 체온이 32℃ 이하로 내려가면 죽게 된다.
하지만 재빨리 37℃ 되는 온수에 넣으면 구할 수 있다"
-<세균전과 독가스전> 1943년 '이시이 시로'강연 中
"3명의 중국인은 손가락이 없었고 기타 사람들의 손가락은 뼈만 남아 있었다"
<전 일본육군 군인이 세균무기를 준비하고 사용한 협의에 대한 재판자료>(1950)
고도실험은 고도에 따라 기압이 변화할 때 신체 내부가 어떻게 훼손되는지 확인하는 실험을 자행했다.
일본 공군의 훈련을 위해 고도 실험을 진행했다.
총기실험은 총기의 성능을 시험하기 위해 산 사람에게 총격을 가하는 실험이었다. 벗겨놓거나 홑옷, 솜옷 등을 입혀 단계별로 총알이 뚫리는 지 확인했다. 일렬로 세워놓고 총을 쏜 후 몇 명 관통했는지 확인하기도 했다.
모성애 실험은 불로 달군 바닥 위에서 엄마가 아이와 자신 중 누구의 생존을 우선시하는 지 확인하는 실험이었다. 희생자(마루타)들의 숫자를 셀 때도 '뿌리'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생체 실험을 지휘했던 일본인들은 당대 최고의 엘리트들이었다. 기본적으로 동경대, 도쿄의과 대학 출신의 최고의 엘리트들이였다.
전쟁은 양면적으로 의학의 발전을 가져다준다. 사람의 신체를 해부한다는 것은 금기시되었었다. 하지만 1차 세계 대전 이후 해부학이 엄청 발전하였고 흉부, 신경, 성형외과가 태동하게 된다. 731부대의 의학적 성과가 있었다. 하지만 731부대는 사람을 살리는 실험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기 위한 실험이었다. 이것은 윤리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731부대 생체 실험은 일본 의학 발전에 일조했다.
1943년 중국 다롄 일본 헌병대 70여 명이 흥아 사진관 주변을 에워싸고 7명의 항일 투사와 가족들을 체포한다.
체포된 한 남자는 이듬해 1944년 731부대로 특별 수송된다. 그는 한국인 항일투사 심득룡이었다.
조선인 희생자 중 최초로 신원이 밝혀진 인물이다. 9살에 부모를 여의고 18살 삼촌의 권유로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소련 공산대학 입학 후 중국, 소련 일대 정보요원으로 활약했다. 조선인 사회주의 항일 투쟁가였다.
심득룡은 흥아사진관에서 러시아로 무선 첩보 신호를 보냈다. 일제는 심득룡의 신호를 포착하고 흥아 사진관을 덮쳐서 심득룡 등 7명을 체포한 후 731부대로 특수 이송했다. 731부대로 끌려가 생존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특수 이송' 자료가 중국인 학자에 의해 발견되면서 340명 실명이 확인되었는데 그중에서 조선인은 6명이었다. 하지만 1920년대부터 조선인들도 중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조선인의 숫자가 더 많을 듯하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6년간 731부대 핑팡 특설 감옥이 운영되었다. 6년간 생체 실험 희생자는 최소 3천6백여 명으로 추산된다. 이전 만주에서 활동한 기간까지 합치면 12년이므로 생체 실험 희생자는 1만 5천여 명으로 추산된다.
일제의 입장에서 일제에 저항하는 사람은 전쟁 포로, 사형수와 같기 때문에 죽여도 된다고 생각했다. 체포된 중국인 사상범, 항일 운동가 30% 이상이 731부대로 끌려갔다.
이런 사람들 뿐만 아니라 태어난 지 3일 된 아기도 동상 실험에 이용했다는 보고가 있다. 아이와 함께 731부대에 러시아 여성이 투옥됐다.
"생후 3일 된 신생아에 대해서도 한랭에 대한 피부 혈관의 반응이 관찰됐다"
-731부대 동상 연구반 '요시무라 히사토' 논문 中
시간이 지날수록 생체 실험 민간인 희생자가 늘어난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면서 더 많은 생체 실험 대상자가 필요했다. 없는 죄도 만들어서 사상범으로 만들어 대상자를 확보하기도 했다. 거리에서 구걸하던 13~14살 중국 남자아이를 속여 산 채로 해부하기도 했다. 해부 실습 전 기증된 시신의 숭고한 정신에 먼저 묵념하는 것이 관례이다. 731부대는 반대로 산 사람을 해부하고 죽인 후 묵념을 진행했다.
동상실험으로 죽인 후 일본군 반장은 조사(弔辭)를 읽었다.
"연구반 생체의 영령에게 고한다
장제스의 주구가 되어
정의로운 황군(일본군)에게 대적행동을 해 그대들의 육체는 선택되어 연구실험에 바쳐
오늘 생을 마감한다.
제단을 차려 영령을 달랜다."
-2월 8일 연구반장 다니무라 소좌
731부 대원 중 상당수가 젊은 청년층이었다. 윤리관이 제대로 자라기도 전에 실험 기계로 키워진 일본 소년병들은 이었다. 연고 없는 어린아이들을 데려와 생체 실험을 하게 했다.
하얼빈에서 150Km 떨어진 곳에 안다, 하이라얼 야외 실험장이 설치되었다. 1940년대에는 4개의 지부가 생긴다. 무단장, 린커우, 쑨우등에 생겼고 핑팡 본부 부대원만 3,000여 명이었다.
731부대는 하얼빈 핑팡이 본부였고 만주 일대 4개 지부가 있었다. 중국 도처에 분포한 다른 부대들이 있었다. 해군은 배위에서도 실험을 했다. 일본 정부의 지시 아래 731부대의 만행이 진행되었다.
"일본 천황은 ....새로운 칙령을 반포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하얼빈 성 남쪽에서
약 30Km 떨어진 핑팡 지역으로 이전하고
부대의 기본 활동, 즉 연구와 실험, 생산 등은
모두 그곳에서 진행한다는 내용이었다"
-<전 일본육군 군인이 세균무기를 준비하고 사용한 혐의에 대한 재판자료>(1950)
731부대가 창설되는 과정에 대본영 산하의 비밀 부대로 조직되었다. 대규모 시설을 운영할 수 있는 자금력이라면 천황의 직속 기구였을 것이라 추측한다.
※대본영(大本營)은 전시(戰時) 천황 직속의 최고 통수 기관으로 육군과 해군을 지배하에 두고 통솔한다.
당시 일본 천황 히로히토의 취미는 생물학 연구였다. 별궁에 개인 연구 실험실까지 마련해서 민달팽이, 불가사리, 해파리 등의 동식물을 수집, 연구했다.
1940년 6월 중국 지린성 눙안현, 농촌 마을에 페스트가 창궐한다. 페스트 창궐 163일 후 사망자가 약 300명이 발생한다. 페스트의 원인은 70년 후 2011년에 밝혀진다.
페스트는 설치류와 벼룩뿐만 아니라 사람의 배설물, 기침을 통해서도 감염된다. 40℃ 전후의 고열과 구토, 순환기계에 심각한 손상을 주어 사망까지 이르게 한다.
731부대는 1940년 6월 4일 페스트에 감염된 벼룩 5g을 살포했다. 벼룩 1g은 약 3천 마리~1만 마리다. 6월 4일 페스트에 감염된 벼룩 5g을 눙안현에 살포했다. 3주 후 12명이 감염된다. 163일 후 사망자는 298명이 된다. 주변 마을 첸궈치는 887명, 정자툰은 1,044명 약 2,000여 명의 사망자가 추가 발생했다.
과거 눙안현은 페스트가 창궐했었던 지역이었다. 페스트가 창궐하면 자연 발생한 것으로 둔갑하기 좋은 지역이기 때문에 선택했던 것이다.
2011년 70년 만에 눙안현 페스트 창궐의 원인이 밝혀진다.
당시 눙안현 인구 약 3만 명이 읍내에 살고 있었는데 5g의 페스트균을 뿌려서 어떻게 전염되는지를 연구한 것이다. 세균 실험이 계속 은폐되어 있다가 2011년 731부대 군의관 가네코 준이치가 작성한 극비 문서가 발견되었다. 가네코 준이치는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실제 731부대 연구 내용을 사용했다.
페스트를 뿌리면 일본군인이나 일본 시민들이 감염될 수 있어서 백신 실험도 같이 진행했다. 본인들은 살기 위해 백신을 개발한다. 페스트 살포 후 군의관 200명을 방역 업무로 위장시켜 눙안현에 투입했다.
방역 활동을 한 것은 아니며 눙안현을 외부와 차단한 후 페스트 전염 상활을 조사했다.
"패혈증의 전이율이 높고 사망으로의 경과 일수가 짧고 사망률이 높았다"
-731부대 페스트 연구반 반장 '타카하시 마시히코' 보고서 中
1940년 10월 중국 양주강 유역 국민당과의 전투 지역에 세균을 살포한다. 도자기 폭탄이라 불리며 수만 마리의 페스트균에 감염된 벼룩으로 채워서 비행기로 밤중에 몰래 공중에서 투하했다.
철제 세균 폭탄은 열전도율이 높아 고온에 노출되어 벼룩들이 죽게 되었다. 도자기 폭탄은 투하될 때 도자기가 깨지면서 벼룩들이 쉽게 분산이 된다.
눙안형 민가에서 연구의 효과가 입증되자 실전에 활용한 것이다.
1940년 10월 27일 중국 저장성 닝보 등에 세균 폭탄이 사용된다. 세균 125Kg을 살포한다. 세균전 과정을 촬영한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는 다쿠멘터리로 제작 후 731 세균전 교재로 활용한다.
15년간 중국 20개 성에서 대규모 세균전을 36차례 강행했다.
"1941년 4월, 나는 6대의 비행기를 파견해 400Kg의 패스트균을 살포하도록 했다
35만 명이 페스트에 감염되었고 15만 6천여 명이 사망했다고 했다"
-731부대 부대장 '이시이 시로' 자백 中(1946년 3월 16일)
1945년 일제 패망 후 731부대는 주요 연구 성과물들을 챙겨 일본으로 간다.
이시이 시로 집무실에 수많은 신체 표본들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이시이 시로가 일본으로 갈 때 신체 표본들도 같이 챙겨간다. 동경 비밀 아지트에 보관한다. 특설 감옥을 폭파했다. 수용자들은 독가스로 살해한다. 731부대의 생체 실험 흔적을 은폐한다. 731부대원들은 일제 패망 진전 소련이 참전한다. 소련군이 하얼빈에 도착하기 전 증거 인멸 후 도주한다. 이시이 시로는 부산을 경유해서 일본으로 귀국한다. 도주하지 못한 731부대원 12명은 소련군에게 체포된 후 하바롭스크에서 전범 재판에 회부된다.
※하바롭스크 재판 (1949년 12월)은 일본군 전범 피고에 대해 열렸던 군사재판이다.
일부 부대원들이 양심 증언을 통해 731부대의 만행이 일부 알려지게 된다. 일본인들은 일부 부대원의 양심적 고백에 배신자 낙인을 찍었다.
도쿄재판을 비롯한 여러 전범 재판에서 731부대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았다. 미국정부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다. 731부대의 세균전과 실험에 대해 추궁하지 말라는 것이 미국 정부의 입장이었다.
태평양전쟁 중 731부대 세균전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미국도 당시 세균 실험 연구 결과를 확보하고 싶어 했다. 731부대를 덮어주는 대신 연구 결과를 넘기라는 거래가 있었다.
생체 실험 보고서 정보는 15만 엔~20만 엔(현재 가치 약 3억 원)으로 입수한다.(미 육군 태평양 사령부 정보국 보고서(1947년 7월 22일)
거래 내용이 담긴 미국 기밀문서는 미국 기밀문서 보관 기간 50년이 지난 1995년에 공개가 되었다.
731부대원들은 일본 내에서 승승장구했다.
다나카 히데오 (페스트 실험, 벼룩 사용) 오사카시립대 의학부장
카사하라 시로 (바이러스 실험) 기타사로연구소 병리부장
요시무라 히사토 (동상 실험) 교토부립의대 학장, 일본 기상학회 회장
이시카와 다치오마루 (병리 실험) 가나자와대 암 연구소 소장
키타노 마사지 (제2대 부대장) 일본 녹십자 공동설립자
후타키 히데오(결핵 실험) 일본 녹십자 공동설립자
나이토 료이치 (육군군의학교 방역 실험) 일본 녹십자 회장
고바야시 로쿠조 (방역 실험) 국립 예방위생연구소 초대 소장
고지마 사부로 (731부대 촉탁 교수) 국립예방위생연구소 제2대 소장
다미야 다케오 (731부대 촉탁 교수) 도쿄대 의학부장 ,일본 의학회 회장
야나기사와 켄 (결핵 실험) 국립예방위생연구소 제5대 소장
야나기사와 마코트 (결핵 실험) BCG 결핵 백신 개발, 아사히상 수상
사람을 죽여서 얻은 의학지식으로 출세 가도를 달린것이다. 죗값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일본 의학계 주요 인사들로 활약했다. 특히 수혈 의료 기술로 유명한 일본의 녹십자는 731부대의 혈액 실험 담당자들이 모여 만든 회사이다. 혈우병 치료제 등 한때 일본에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해방 이후 일본 정부는 731부대 모든 정보를 적극적으로 은폐한다. 731부대원들에게 보안 수칙을 내렸다. 부대원 상호 간 교류하지 말 것, 731부대의 존재를 입 밖으로 내지 말것, 공무원직을 갖지 말것 등의 수칙으로 철저히 비밀에 부치려 한다. 731부대의 생체 실험에 가담한 한국 의사도 있었다. 경성의전, 경성제대 출신 의사 중 731부대 연구 내용을 논문에 쓴 사람이 존재했다. 일본학자들이 의해 밝혀졌다. 한국에서 유명한 의학자로 활동했다. 731부대 관련 자료는 일본에 의해 상당 부분 은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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