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디 암살과 베트남 파병
20년간의 전쟁, 755만 톤 폭탄 투하, 전쟁 비용 약 1,400억 달러, 약 8,612대 항공기 손실, 미군 5만 8천 명 사망, 베트남인 260만 명 사망(군인, 민간인 포함), 승리한 베트남도 역사상 참전한 전투에서 처음 패배한 미국도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나 컸다.
한국의 5.16 쿠데타 소식은 곧바로 백악관까지 전해졌다. 5월 17일 새벽 주한미국대사관과 당시 국군 작전 통제권자였던UN군 사령관에게 백악관의 입장이 전달됐다. 미국은 한국의 5.16 군사 쿠데타를 묵인하기로 한다.
미국 알링턴 국립묘지에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꽃(Eternal Flame)'케네디 대통령 묘역이 있다.
존 F. 케네디는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대통령이다. 미국 역대 대통령 평가에서 많은 부분에서 상위권을 차지한다. 인권, 민주주의, 자유, 미국의 헌법적 가치를 수호하려 한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있다.
백악관이 5.16 정변을 묵인한 배경에는 당시 복잡했던 국제정치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61년 1월 케네디 대통령이 취임하는데 미소냉전이 격화되던 시기였다. 1961년 4월 취임 후 3개월 만에 미국 역대 대외정책상 최고의 참사라고 평가되는 피그스만 침공을 감행했다.
1959년 1월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에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킨다. 쿠바 공산화를 경계한 미국 미 중앙정보국(CIA)주도로 쿠바 망명자 1,500명을 훈련시켜 쿠바 침공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침공계획은 누설되었다. 상륙에서 기다리고 있던 쿠바군의 맹공으로 100여 명 사망, 나머지 1천여 명 인질로 생포된다.
나중에 포로 석방 조건으로 미국이 쿠바에 5,300만 달러를 지급한다.
피그스만 침공은 미국 외교의 가장 치욕적인 순간이다. 전임 대통령 아이젠하워 정권이 계획한 작전을 케네디정권이 실행하다 실패하자 책임을 면치 못했다. 비난을 한 몸에 받고 반공주의자가 맞는지 의심을 받기도 한다. 아이젠하워는 공화당이고 케네디는 민주당 출신이었다. 그러자 피그스만 침공의 교훈으로 다른 나라 일에 함부로 개입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5.16 쿠데타에 대해 주저하게 되었다. 또한 백악관의 묵인 배경에는 박정희 소장의 강한 반공 의지와 미국이 상대하기에 괜찮은 외교 파트너라는 판단을 했다.
5.16 쿠데타는 세계정세와 맞물린 것이다.
박정희는 5.16쿠데타 무렵 군인 박정희로서의 콤플렉스가 있었다. 1940년대 말 남조선노동당 활동으로 공산주의자 이력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타계할 돌파구로 베트남 파병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 시기 미국도 아직 군사고문단 말고는 파병한 적이 없었다. 박정희는 미국에 한국군 전투 부대 파병을 제안했다.
심지어 파병 제안도 여러 번 했다. 한국군 파병 제안을 5.16 직후 주미대사를 통해서 했고 직접 편지를 써서 했고 1961년 11월 워싱턴에서 케네디 대통령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직접 만났다.
"한국은 굳건한 반공국가로서 극동의 안보기여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북베트남은 잘 훈련된 게릴라 부대를 갖고 있는데 한국은 이러한 유형의 전쟁에 잘 훈련된 백만 병력이 있다. 미국이 승인하고 지원하면 한국은 베트남에 자체 병력을 보낼 수도 있고 지원병을 모집해 보낼 수도 있다.
출국 직전 고위 장교들과 이 문제를 협의했는데 모두 열광적이었다. 검토해서 결과를 알려달라"라고 하며 적극적으로 말을 한다.
케네디는 한국의 전투병 파병 제안을 완곡하게 거절한다.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 대통령은 암살을 당한다. 당시 부통령 린든 B. 존슨이 대통령직 승계를 한다.
존슨 대통령 때 한국군 파병 논의가 본격화된다.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한국 정부는 베트남에 전투부대를 파병했다. 참전 한국군은 누계 합산 32만 명이었다. 1970년 후반기부터는 미 지상군 규모를 능가해 참전국 중 가장 많은 병력으로 남베트남을 지원했다. 베트남 전쟁으로 5천여 명의 한국군이 사망했으며 1만여 명이 부상당했다.
19세기 프랑스 식민지가 된 베트남은 2차 대전 이후 독립하는 듯 했으나 프랑스가 베트남 종주권을 다시 주장하면서 이에 민족주의자이면서 공산주의자였던 호찌민은 1945년 9월 2일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하고 독립전쟁을 전개한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6년 12월 19일~1954년 8월 1일)은 막강한 화력을 앞세운 프랑스를 상대로 호치민의 군대는 지역 특수성을 적극 활용한 게릴라전으로 맞선다. 1954년 프랑스가 총공세를 펼친 디엔비엔푸 전투(1954년 3월 13일~5월 7일)에서 승리를 거두며 마침내 프랑스를 몰아낸다. 이는 식민지 국가가 서양 제국주의에 거둔 최초의 승리였다.
프랑스는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남 게릴라작전에 시달려서 게릴라 보급로를 끊기 위해 군사기지를 해발 1,000m 고지에 구축했다. 하지만 베트남 군인들은 고지까지 무기를 들고 올라왔다. 울창한 숲과 깎아지른 절벽을 손으로 돌을 치우고 나무를 베면서 민간인 25만 명이 릴레이 보급으로 낮에는 공습을 피해 숲에 숨어있다가 해가 지면 이동한다. 대포 100여 문 이상을 옮기는데 일일이 분해해서 자전거에 싣고 이동한다. 큰 대포는 밧줄로 연결해서 끌고 올라간다. 그야말로 맨손으로 프랑스를 이겼다. 대 프랑스 독립전쟁(1946~1954)은 베트남 승리로 끝을 맺는다. 미국이 당시 프랑스를 지원했지만 패하고 만다.
전쟁은 이념전쟁이 아니라 독립을 위한 전쟁이었다. 강력한 베트남 민족주의에 혼쭐이 난 프랑스 샤를르 드골(군인, 정치인 1958~1969 프랑스 대통령 역임)은 아이젠하워, 케네디, 존슨 미국 대통령에게 끊임없이 조언을 한다. 베트남에 개입하지 말고 독립을 인정해 주는 것이 낫다고 한다. 백악관은 드골의 조언을 무시한다.
2차 대전 나치 독일에 점령당한 프랑스였기 때문에 조언을 가볍게 여겼다.
세계 최강이라 자부하던 미국, 빅브라더의 오만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에 있어서 베트남의 지역 특수성, 민족주의 등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프랑스와의 전쟁이후 1954년 제네바협정으로 북위 17도를 경계로 해서 북쪽은 공산주의 체제, 남쪽은 민주주의 체제가 들어서면서 분단된다. 미국은 남베트남에 정치, 군사, 경제 분야에 적극 개입한다.
2차 세계 대전이후 냉전시대가 도래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체제가 극심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미국은 미션(선교사)마인드를 가지고 있다. 미션 마인드(Mission mind) 자유세계를 수호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강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의 상황이 미국이 지원했던 장제스의 국민당이 마오쩌둥의 공산당에게 밀렸다. 1949년 아시아의 가장 큰 국가 중국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으로 공산화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베트남까지 공산화가 된다면 미국으로서는 큰일이 되는 것이다. 심지어 한국전쟁 중에도 프랑스에 군사원조를 해줬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중 프랑스 군수품 약 80%를 미국이 조달해 준다.
미국 입장에서는 베트남의 공산화를 프랑스가 막아주길 바랬다.
중국 공산화 이후 아시아의 공산화 확대를 우려한 미국은 2차 대전 적이었던 일본이 종전 후 강력한 우방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일본이 공산화될 것을 우려했다.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이 빠지고 나서 캄보디아는 공산화가 된다.
중국이 공산화되자 도미노 현상처럼 미얀마,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이 공산화가 될 것이라 생각했고 거기에 집착하고 있었다. 실제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내부적으로 계속해서 나왔다.
1964년 6월 CIA 국가정보평가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공산주의 확산의 지속은 움직일 수 없는 법칙 같은 게 아니다.." 라고 하며 도미노 이론의 오류 가능성에 대한 문제 제기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국가는 악이므로 막아내야 한다는 도미노 이론으로 베트남 파병을 결정한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도미노이론을 내세우며 남베트남을 지원했다. 군사고문단을 9천 명을 파견하고 후임 케네디 대통령도 지원을 지속한다. 하지만 비전투병에 한해서 지원한다.
점점 남베트남 상황이 악화된다. 응오딘지엠(1901.1.3~1963. 11.2)은 1956년 미국 지원으로 남베트남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친인척 비리 등 극심한 부패로 민심이 이반 된다.
남베트남 부패로 베트남 민족주의, 공산주의 세력이 강화된다.
케네디는 대통령 재임 중에 정세가 순탄치 않았다. 케네디가 취임한 1961년 4월 17일 쿠바 피그스만 침공 실패했고 8월13일 동독 베를린 장벽 건설이 개시되었고 8월 31일 소련 핵실험을 재개했다. 1961년 한 해 공산국과의 갈등이 급격히 나빠진다. 미. 소 냉전기 백악관은 자유주의 진영의 리더라는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케네디는 대외환경으로 인한 국가적 압박도 있었지만 개인적 위기도 있었다. 정치인 케네디로 대통령 재선에도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외교문제는 미국 대선에 영향을 미친다. 중국 국공내전으로 중국이 공산화된 후 공화당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케네디는 민주당 출신으로 정권교체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네디는 전투병 파병은 거부한다. 압박이 가해지자 군사고문단마저 철수시키겠다고 말한다.
케네디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개인적으로 케네디는 어릴 때부터 온갖 질병을 앓았다. 10대 시절 심한 저체온이었다. 나중에서야 에드슨병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에디슨병은 콩팥 위에 호르몬 생성기관인 부신의 문제로 부신피질 호르몬 분비에 이상이 생겨 만성피로와 구토를 유발하기도 한다.
병명을 알고 나서도 약물치료 부작용으로 목,허리 통증이 심했다. 2차 대전 발발 자원입대 신청을 했지만 거절당한다. 결국 아버지의 인맥으로 해군 장교로 입대한다. 남태평양에서 근무를 하다가 일본 구축함에 받혀 무인도에서 6일 동안 견딘다. 부하들을 구해 낸 공로로 무공훈장을 받는다.
케네디가 대통령 직무 수행 중 지팡이를 짚거나 아파하는 모습이 자주 포착되었다. 2차 대전 전쟁 후유증으로 포장한다. 질병과 전쟁 경험은 케네디가 전쟁을 싫어하는 이유가 된다. 케네디는 1946년 29세에 매사추세츠 주 연방하원으로 정계 입문한다. 출마의 변이 "절대로 또다시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였다.
1968년 케네디의 동생 로버트 F. 케네디가 출마를 했을 때 "만약 형이 죽지 않았다면 끝까지 베트남 파병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확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말을 한다.
케네디는 공산주의를 싫어하고 냉전 승리를 원했지만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을 반대했다. 1963년 11월 22일 재선 출마를 앞두고 텍사스주 댈러스를 방문한 그는 대통령 내외를 환영하는 수많은 군중 앞에서 총탄에 목과 머리를 맞고 사망한다. 세계를 충격에 빠트린 암살범은 공산주의로 알려진 오스왈드였다. 그의 단독 소행으로 발표가 됐지만 음모론은 끊이지 않았다. 특히 제대로 재판도 받기 전에 오스왈드가 살해되면서 의혹은 더욱 커졌다. 그중에는 미 군수산업체와 린든 존슨 부통령이 배후라는 설이 있었다. 남은 임기를 이어받은 존슨 대통령은 전투병 파병을 결정했다.
박정희 대통령도 총에 맞아 사망했고 둘 다 1917년 생으로 뱀띠이다.
미국 부통령의 역할은 상원의원이 50:50일 때 캐스팅보트(결정권)를 행사할 수 있고 대통령 유고 시 대통령직을 승계한다.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뇌일혈로 사망했을 때 당시 부통령 해리 트루먼이 대통령이 되었고 37대 리처드 닉슨이 워터게이트로 사임을 했을 때 당시 부통령 제럴드 포드가 대통령이 되었다.
린든 존슨 대통령이 파병을 결정하자 음모론은 굳어진다. 케네디 영부인, 재클린 케네디도 케네디 암살 배후에 베트남 파병을 간절히 원했던 린든 존슨 부통령이 있다고 의심을 했다.
게다가 케네디가 사망한 텍사스는 존슨의 고향이었다. 1963년 11월 25일 케네디 장례식이었다.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바로 다음날 작성된 중요한 문서 NSAM 안보 메모 273호(베트남 파병)에 서명한다. 린든 존슨은 파병 찬성을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로 부통령의 배후설, 음모론이 사그라지지 않는다.
통킹만 사건은 미국이 베트남 전쟁 개입의 명분이 되어준다. 하롱베이 남쪽에 접한 통킹만에서 미국 구축함이 두 차례 북베트남의 공격을 받는다. 첫 공격은 북베트남도 시인했지만 두 번째 공격은 참전을 위해 미국이 만든 명분이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통킹만 사건 조작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대통령이 된 존슨은 마치 기다린 듯한 대응을 했다. 두 번째 공격 소식을 듣자마자 의회 승인 없이 폭격을 지시한다. 존슨은 24년간 상. 하원 의원 생활을 했기 때문에 만장일치로 의회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는다.
'통킹만 결의'로 전쟁에 대한 전권을 대통령에 위임한다.
1954년 프랑스 공수부대가 무참히 패배하고 떠난 베트남에 11년 뒤 미군 전투병이 투입된다. 막대한 군사력을 가진 미국의 본격 개입으로 베트남 전쟁은 '미국화'가 됐다. 한 때는 미군 파병인원이 50만 명을 넘길 정도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전쟁은 미국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간다. 이는 다음 백악관 주인을 결정짓는 중요 이슈가 된다.
전면전에 들어간 미국 군대와 베트남 민주공화국 정규군 일명 '베트콩'의 첫 번째 전투가 이아드랑 전투(1965년 11월 14일~11월 18일)이다. 미군들은 압도적인 승리를 예상했지만 처참하게 패배한다. 베트남군의 전략 게릴라전, 매복 전, 땅굴전으로 미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결국 미군은 철수를 시도한다. 베트콩의 매복으로 헬기장이 공격당하고 헬기 착륙이 무산되어 미군이 탈출을 하지 못한다. 결국 아군, 적군이 구분 없는 폭격이 지시된다. 베트남군을 처음 상대한 할 무어 중령은 '적이 만만치 않다'라고 말을 한다. 베트남 이이드랑 전투를 배경으로 한 영화 <위 워 솔저스 We were soldiers(2002)>가 있다. 결국에는 이아드랑 전투에서 미국이 승리는 하지만 미국-베트남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 앞으로 겪을 전쟁의 시작에 불과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국내 정치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케네디의 남은 임기를 마친 존슨 대통령이 64년 대선에서 승리한다. 61.1%로 당선되고 아직도 깨지지 않은 기록으로 남아있다. 존슨은 상. 하원 선거 6번과 대통령 선거 모두 당선되어 24년가 전승을 거뒀다.
존슨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과도 관련이 있다. 박정희는 1963년부터 1979년까지 대통령직에 있었으며 존슨대통령은 1963년~1969년까지 대통령직에 있었다. 존슨 대통령은 1965년 5월 16일 박정희 대통령을 초대한다.
1965년 5월 16일(박정희 군사 쿠데타)은 자칭 '혁명'이라 부르는 성공 4주년이었다. 존슨은 이것을 활용한다. 백악관 전용기 에어포스원을 한국으로 보내 박정희 부부를 초청한다. 위싱턴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위한 카퍼레이드까지 해준다. 요란한 환영이 끝난 후 존슨은 한국군 전투병력 1개 사단 파병을 요청한다.
한국군 베트남 첫 파병은 1964년, 비전투부대로 한정된다. 1965년 5.16 방미 이후 베트남 전투병 파병은 급물살을 탄다. 1965년 8월 13일 공화당(당시 여당)은 단독 파병 동의안을 가결시킨다. 1965년 맹호부대, 청룡부대가 베트남에 파병된다. 1966년 10월 한국군 파병 1년 뒤 존슨의 아시아 및 오세아니아 7개국을 순방한다. 무모한 전쟁을 벌인 탓으로 방문국에서 인기가 없었다. 가는 곳마다 반전 시위대가 있었다. 1966년 10월 7개 국 마지막 존슨의 마지막 순방국은 한국이었다.
다른 국가와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1966년 10월 31일~11월 2일 일정이었으며 존슨과 박정희의 동승 카퍼레이드에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렸고 격한 환영을 해준다. 당시 서울 인구 350만 명이었는데 275만 명이 동원했다는 기록이 있다. 어마어마한 존슨 대통령 환영식이었다.
당시 백악관 대변인은 이렇게 평가했다. "존슨 대통령 내외가 서울에서 텍사스식 환영을 받았다.... 200만 명으로 추산되는 열렬한 대중들이 이들을 맞이했다"라고 했다. 텍사스는 미국 주에서 가장 넓은 주이다.
존슨은 커티 삭 위스키를 좋아했다. 한국에서는 귀한 술이라 구할 수도 없었는데 전국을 뒤져서 2병을 구했다.
존슨 대통령 방한을 계기로 경기도와 서울 일대에서 존슨탕, 존슨 부대찌개로 이름을 붙였다는 설이 있다.
다른 나라 순방국에서는 반응이 좋지 않았다. 예상과 달리 베트남 전황에 대한 비판이 거셌다. 당시 TV보급 증가로 베트남 전황을 체감하게 된다. 미국에서 68 혁명이라는 반전활동이 대학가,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엄청나게 일어난다. 68 혁명은 "모든 권위에 저항한다"를 기치로 1968년 봄, 프랑스에서 사회변혁운동이 시작된다.
급격히 떨어지는 지지율을 본 존슨은 1968년 3월 초 차기 대선 출마를 포기한다.
케네디 대통령이 내세운 개혁 정책 뉴프론티어(New Frontier)는 원대한 비전을 제시했지만 실행력은 떨어졌다. 케네디의 비전을 실행한 사람은 존슨이었다. 1964년 민권법 인종차별 금지, 흑인 투표권 부여, 저소득층, 고령자의 의료보장 등을 하면서 존슨이 주장한 '위대한 사회' 프로그램을 만들어 낸다.
존슨은 케네디, 루스벨트, 링컨처럼 칭송받는 대통령 반열에 오르길 기대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실패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만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연구에서는 존슨이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위대한 사회'프로그램이 국외 사정으로 실패할 것을 두려워했고 베트남 전쟁에 더 집착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 기억은 늘 함께 할 겁니다
살아남은 자에게는
그 전쟁을 상기하고 우리가 배운 것을 알리며
생명의 존귀함과 참 의미를 찾을 의무가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을 다룬 영화 <플랜툰>1987년 대사 中
베트남 전쟁 이야기는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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