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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독소전쟁, 스탈린그라드 전투

by 소시민스토리 2024.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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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전쟁, 스탈린그라드 전투 

1942년 8월 23일 일요일 독일 폭격기가 소련 최고 지도자의 이름을 딴 도시 스탈린그라드 상공을 뒤덮았다. 600여 대의 폭격기가 수천 톤의 폭탄을 투하하며 전투는 시작된다. 잿더미가 되어 버린 도시, 폭격 첫 주에만 4만여 명의 희생자가 생겼다. 5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총 20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역사상 가장 처절하고 잔혹한 전투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분수령이 되는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시작되었다.

독소전쟁, 히틀러의 소련 기습 공격

 

독소전쟁, 히틀러의 소련 기습 공격

독소전쟁, 히틀러의 소련 기습 공격 1941년 6월 22일 히틀러는 소련 공격을 명령했다. 당대 최강이었던 독일 육군은 세 갈래로 나뉘어 소련을 공격했다. 독소전쟁의 서막 독소전쟁의 서막독소전

bringbacon.tistory.com

 

영화 <Enemy at the Gates>는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배경으로 한다. 소련 전설의 저격수 '바실리 자이체프' 실존인물의 이야기다. 바실리 자이체프(1915~1991년)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저격수이며 공식기록상 한 달간 225명을 사살한다. 사망한 적군 수와 발사한 총알의 수가 1발 차이였다.

 

 

 

스탈린그라드는 모스크바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다. 볼가강에 서쪽에 위치해 수운의 요충지이다. 현재는 볼고그라드라고 불린다. 예전에는 차리친이라고 불렸는데 스탈린이 내전 기간에 반혁명군으로부터 방어한 도시이다. 1925년 스탈린의 이름을 따서 '스탈린그라드'로 불렀다. 

1941년 겨울 독일군은 모스크바 진격하다가 중단하면서 장기전으로 바뀌었다. 1942년 봄이 되자 히틀러는 포기하지 않고 전쟁을 다시 시작한다. 이번에는 히틀러는 모스크바, 레닌그라드가 아닌 남쪽으로 가서 스탈린그라드로 목표를 변경한다. 

 

스탈린그라드는 볼가강 서쪽 기슭에 있다. 볼가강은 모스크바와 남부 자원지대를 잇는 수운 요충지였다. 

카스피해에 바쿠(현재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수도) 도시는 소련 최대 유전지역이다. 바쿠지역은 전쟁에 필수적인 유전을 확보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독일이 스탈린그라드를 장악하고 바쿠유전과 모스크바 중심지를 끊을 수 있으면 소련군에게 엄청난 타격을 줄 수 있어 독일군에게 절대 놓칠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가 된다. 

스탈린그라드는 소련은 절대 뺏길 수 없는 지역이고 독일에게는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지역이다.

 

 

1942년 스탈린그라드 주민은 60만 명이었다. 확성기에서 공습경보를 알렸을 때는 이미 늦어서 4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독일군 폭격이 시작되자 시민들이 볼가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하지만 탈출할 수 없었다.

 

 

1942년 7월 28일 스탈린은 명령 227호를 내린다.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마라'

독일군의 공격으로 소련군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병사들이 자신들의 무기를 버리고 도망간다. 스탈린은 여기서 제때 막지 못하면 전선자체가 무너진다는 위기감을 느껴 이런 명령을 내린다.

 

'혼란을 조장하는 자와 겁쟁이들은 즉석에서 사살해야 한다...'

-스탈린 명령 227호 中

 

저지부대는 소련군 내부 전선을 정찰하면서 무단이탈 및 도주하는 병사들을 사살하는 부대이다.

형벌부대는 스탈린의 명령 227호에 따라 편성된 부대로 탈영병과 민간인 중범죄자들로 구성되었다. 

형벌부대는 지뢰제거, 공격 최일선 배치, 독일군이 공격 시 최일선에 있고 퇴각할 때는 후방에서 시간벌기 임무를 맡았다. 죽던지 살아남으면 또 다른 형벌부대로 배치된다. 

형벌부대는 대략 병사부터 장군까지 40만 명이상이 복무한 것으로 추정된다.

 

폐허가 된 도시에서 독일 전차는 쉽게 전진할 수 없었다. 도시 곳곳에서는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을 하나하나가 요새가 됐고 소규모로 구성된 군인들 간에 참혹한 공방이 벌어졌다. 화염방사기와 수류탄, 저격병, 삽까지 동원되어 잔혹한 전투로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처참한 전투가 폐허 속에서 벌어진 것이다. 스탈린그라드는 독일군과 소련군 모두에게 거대한 무덤이 되어 갔다. 

 

도시가 폐허가 되면서 독일 전차 전진로 확보가 불가능해졌고 전차 대신 보병을 투입한다. 소련은 부대를 단위를 쪼개서 소규모 부대를 편성해 도시 곳곳에 배치한다. 그러면 여러 전선이 형성이 되고 독일군의 집중공격을 방해하게 된다. 피아간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포를 쏘거나 항공폭탄을 터트리면 아군도 위험하게 된다. 소련군의 전술이름은 '적껴안기'였다. 시가전의 참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전투였다. 벽돌에 구멍을 뚫어 총구를 빼서 싸우다가 벽에 서로 기대어 쉬고 있어도 서로를 모른다. 겨울까지 이어진 스탈린그라드의 전투에서 두꺼운 군복, 장비로 무장해서 칼로 찌르면 효과가 떨어졌다. 야전삽 모서리를 날카롭게 갈면 무기가 되어 근접전 최고의 무기가 되었다.

무너진 건물, 거리, 지하실 등 곳곳에서 소규모 시가전이 벌어졌다. 독일군은 '쥐들의 전쟁'이라 부른다. 

 

어떤 건물에 1층은 독일군, 2층은 소련군, 3층은 독일군이 있었다. 바로 위층에 있는 게 적인지 아군인지 모르는 상황이 생긴다. 먼지 때문에 적, 아군 군복을 구별하지 못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소련 여군은 100만여 명이었다. 당시 활동한 여성 저격수는 2천 명이었다.

최고의 여성 저격수는 파블리첸코였다. 독일군 309명을 사살해서 '죽음의 숙녀'라도 불렸다.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에 진입하면서 여군들의 시체를 보고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독일은 여성을 어머니, 아내 역할을 강조하고 군대 전면에 세우지는 않는다. 남성영역인 군대에 여군이 참전한 것을 보고 스탈린그라드의 사람들과 다 싸워야 끝나겠구나를 본능적으로 느낀다. 

소련은 여군이 없는 병과는 거의 없었다. 간호병, 통신병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보병, 해군, 전투기. 폭격기부대, 전차부대  모든 병과에 투입되었다. 실제 전투에 투입되어 무기를 들고 적과 싸웠다. 영국이 최초로 여군을 징집한 국가이고 최초로 여군을 전투에 투입한 국가는 소련이다. 

 

소련군 내부 여군에 대한 인식은 좋지 않았다. 당시 전투기 조종사를 희망한 여군들이 많이 있었는데 소련 당국은 망설였다. 여군에게 쉽게 전투기를 맡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군들의 요구가 계속되자 1942년 세계 최초 여성 588 야간폭격부대 부대를 편성한다. 

하지만 최신이 아닌 성능이 떨어지는 1차 세계대전 때 사용하던 낙후 기종, 구식 복엽기를 준다. 여군은 대부분 지원병이었다. 

 

복엽기는 날개가 여러 겹인 비행기다. 폴리카르포프 Po-2는 1920년대 후반, 소련에서 개발된 다목적 경량 항공기로 수송, 연락, 훈련의 용도로 쓰였다.  100마력 정도의 엔진이 장착되어 있고 최대 속도 약 150Km/h이고 뼈대는 나무로 만들었고 캔버스천을 씌웠다. 

복엽기를 몰고 적진으로 날아가서 목표물에 가까이 가서는 엔진을 끄고 조용히 활강한다. 소리 없이 날아오는 그녀들을 독일군은 '밤의 마녀들'이라 불렀다. 전쟁 중 2만 3천 회 출격했다. 

 

소련군은 전력열세에도 불구하고 여성군인들까지 합세하여 필사적으로 저항했고 독일군은 두려워했다.

"남자든 여자든 스탈린그라드에서 손과 발이 여전히 붙어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 전투에 나선다

그들은 정말 개처럼 싸우고 있다"

-독일 병사의 증언 

 

 

소련군이 잘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처참했다. 소련군 평균 생존 시간은 24시간이었다. 

소련 징집군인은 대부분 농민출신이었다. 자신의 땅,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으로 독일군에게 맞선 것이다.

물러서지 말라는 스탈린의 227호에 군인들이 답을 했다.

"우리에게 볼가강 뒤에는 땅이 없다"

결사항전을 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소련병사들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은 수세에 몰린다. 

독일군은 처음 소련의 '적껴안기'전술에 당황했지만 점점 시가전, 근접전이 계속되면서 소련군의 전술을 익힌다. 결국 스탈린그라드 90%를 점령한다.

 

겨울이 시작되는 1942년 11월 초 스탈린그라드 외곽에 100만 명의 소련군이 집결한다. 11월 19일 새벽 소련군의 수천 대의 대포가 불을 뿜으며 대반격이 시작된다. 전격적인 기습공격에 북서쪽을 방어하던 루마니아군이 붕괴되고 남동쪽 공격에도 성공한다. 작전개시 4일 후 남북으로 진격을 한 소련군은 마침내 두 병력이 합류한다. 스탈린그라드 안 독일군 30만 명이 포위된다. 두 달을 준비한 '천왕성'작전의 성공이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분수령이 된 순간이었다. 

 

천왕성 작전의 보안을 철저히 유지한다. 작전 개시 그날 스탈린그라드 안에서 항전 중이던 소련 사령관 바실리 추이코프도 작전을 몰랐다. 소련군은 기만전술이 뛰어났다. 의도를 드러내지 않고 적의 눈을 피해서 병력을 집결하는 능력이 배양되어 있었고 결국 실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소련은 독일군에게 우크라이나 곡창지대를 빼앗긴 상태였다. 먹을 것이 부족했다. 미국은 소련에게 엄청난 물자를 지원했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동맹관계였다. 스탈린은 영. 미 연합국에 제2 전선을 요구했다. 연합국이 참전해서 제2전선을 구축하면 동부전선 독일 전력을 분산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연합국은 쉽게 결정짓지 않는다. 미국은 1941.10.~1945.5. 2차 세계대전 기간 소련에 물자 햄과 초콜릿 등을 지원한다. 

장기간 건물에 숨어 버텨야 했던 시가전에서 초콜릿을 먹으면서 버틸 수 있었다. 

 

미국은 중요한 전략물자 약 40만 대의 트럭과 지프 차량을 제공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이 생산한 트럭 수를 능가했다. 미국에게 지원받은 트럭으로 카추샤 다연장로켓포를 운용했다. 

카추샤 다연장로켓포는 소련이 개발한 다연장로켓포이며 발사할 때의 굉음으로 독일군을 공포에 떨게 했고

'스탈린의 오르간' 별명을 가졌다.  크고 무거워서 이동이 힘들었다가 미국이 준 트럭에 실어 기동성을 확보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무선통신 기술은 급격히 발달하여 이동하면서 통신을 할 수 있었다. 소형 무선 송수신기 '워키토키'였다.

소련 주력 전차 최대 단점은 통신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미국이 지원한 70만 개의 무전기로 효율적인 작전 수행이 가능해졌다. 

 

무기대여법(Lend-Lease Act)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 3월 미국이 연합국에 군사원조를 하기 위하여 제정한 법률이다. 미국은 동맹국 소련에 전략물자를 지원했다. 

 

스탈린그라드 도심에 포위되어 독 안에 든 신세가 된 30만 명의 독일군에게 히틀러는 명령한다.

"절대로 항복하지 말라

마지막 총알까지 싸워라"

독일군 구출 작전이 1942년 12월에 있었지만 실패했다. 구출 작전 실패 소식이 전해진 날은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절망 속에서 독일군은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고 있었다. 식량부족으로 결국 군마를 도축해서 음식을 준비한다. 지도 뒷면에 성모마리아를 그리고 캐럴을 부른다.

설상가상 전쟁으로 위생상태가 좋지 않아 해충들이 살아있는 사람에게 붙는다. 부상으로 거동이 어려운 병사들에게 '이'가 기생했다. 독일군은 카추샤의 소름 끼치는 소리와 대포의 굉음, 다친 동료의 비명소리를 듣고 있다가 미친다. 

"그것은 사람의 소리가 아니었다, 괴로워하는 짐승의 무지근한 울음소리였다"

-한 독일군 병사의 일기 中

 

소련군의 심리전 방송이 계속되었다.

"7초에 한 명씩 독일군이 소련에서 죽고 있습니다 스탈린그라드는 거대한 묘지입니다. 1초 2초 3초 4초 5초 6초 탕!"

독일군을 공포로 몰아넣은 소련의 라디오 선전방송이다.

독일군의 기사회생의 가능성이 사라진 상황이었다. 독일군이 무너지기 직전에 히틀러는 전신 명령을 내린다.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장군 계급을 4성 장군에서 5성 장군, 즉 대장에서 육군원수로 진급시킨다. 원수로 진급을 시킨 것은 항복하지 말고 자결하라는 의미였다. 

전신 명령에 부가설명으로 "지금까지 독일제국의 육군원수 중 누구도 적의 포로가 된 적은 없다"라고 한다.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 육군 지휘관으로 활약했고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독일군 지휘관이었다. 

파울루스는 이전에 탈출 허가를 요청했었지만 히틀러는 거부했고 구원부대와 공동작전을 요청했지만 히틀러는 거부했다. 

 

히틀러는 독일군의 명예를 위해 파울루스가 자결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파울루스는 명령을 받은 다음날 바로 항복한다. 스탈린그라드 내 포위된 9만여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항복했다. 9만여 명의 독일군 포로 중 귀향한 병사는 수천 명뿐이었다.

1942년 8월 23일 시작해서 1943년 2월 2일로 끝난 6개월간의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독일군의 패배로 끝났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패배로 독일의 전쟁계획은 전체가 수렁에 빠진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패전 소식에 독일은 충격에 빠진다. 독일군의 불패 (不敗) 신화가 깨진 것이다. 이전까지 독일군은 패배한 적이 없었다.

전 세계인들에게 독일군에게 저항해 봤자 질 것이 뻔하다는 패배의식이 만연했다가 소련군이 독일군을 물리치는 모습을 보고 독일군이 무적이 아니다, 싸워서 이길 수 있겠다는 의식이 생긴다. 심리적 전환을 불러일으킨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소련 승리는 제2차 세계대전의 분수령이 된다. 

 

독소전쟁은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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