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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독소전쟁의 서막

by 소시민스토리 2024.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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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전쟁의 서막 

1945년 4월 베를린을 포위한 소련군의 공세는 날로 거세졌다. 히틀러와 수뇌부가 숨어있는 벙커까지 포탄이 덜어진다. 히틀러는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한다. 히틀러는 베를린이 함락되기 이틀 전(1945년 4월 30일)에 자살하고 그이 시체는 불태워진다. 히틀러의 죽음과 함께 사상 최악의 전쟁, 나치 독일과 소련의 전쟁이 끝나가고 있었다. 

 

독소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났던 주요한 전쟁 중에 하나이다. 2차 세계대전은 일본, 독일, 이탈리아와 미국, 영국, 프랑스가 맞붙은 전쟁이다. 연합국에 소련이 포함되어 있었다. 

 

2차 대전 군인 사망수

추축국 연합국
일본 약 220만 명 영국 약 38만 명
이탈리아 약 33만 명 미국 약 40만 명
독일 약 440~530만 명  소련 약 870~1,140만 명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는 1889년 오스트리아 출생으로 나치 독일의 최고 지도자였다. 인종주의자이며 뛰어난 대중 선동가였다. 탁월한 연설과 대중 선동 능력으로 1930년대 독일의 권력을 거머쥐었다.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은 1878년 조지아 출생이며 소련의 초대 전연방 공산당 서기장이었고 소련을 강국으로 만든 지도자이며 무자비한 숙청을 자행한 독재자였다. 

동물농장(1945년)은 영국 작가 조지오웰의 풍자소설로 소설에 나오는 돼지는 스탈린을 상징한다. 

스탈린은 독소전쟁에 참전한 스탈린의 장남이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을 때 포로교환 협상을 거절해 결국 장남은 사망한다. 원칙주의자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1939년 10월 9일 미국 일간지 <The Washington Star> 독소불가침 조약을 맺은 독일과 소련을 신랑신부로 표현했다.(Wonder How Long The Honeymoon will last?, 이 밀월 기간이 얼마나 지속될까?)

독소전쟁 2년 전에 소련과 독일은 독소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히틀러의 입장에서 영국과 프랑스를 제압하려고 영국, 프랑스 동맹국인 소련과 먼저 협상한 것이다. 소련의 입장에서는 독일의 나치즘 확산을 막기 위해 영국 프랑스와 손을 잡으려고 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자본주의 진영이고 소련은 공산주의 진영이어서 맞지 않았다. 영국, 프랑스와 소련이 손을 잡지 못하는 이념의 틈을 히틀러가 파고든 것이다. 독소불가침 조약이 체결된 배경이 된다. 

소련은 물심양면으로 독일을 지원하고 소련에서 구하지 못하는 물자는 수입을 해서 독일에 지원한다. 

 

 

1941년 6월 22일 일요일 새벽 3시 30분 평화로웠던 소련 서부 국경지대에 독일 전투기들이 무차별 폭격을 시작했다. 독일이 불가침 조약을 깨고 선전포고도 없이 소련을 침공한 것이다. 

히틀러와 나치즘의 세계관의 핵심은 인종주의다.

※인종주의(racism)는 인종사이에 유전적 우열이 있다며 지배-피지배를 합리화하는 사고방식이다. 

인간은 여러 인종으로 구분되어 있고 그중에서 독일인은 아리아인 계르만으로서 세계를 지배해야 된다는 지배계층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지배를 받고 최종적으로 제거되어야 할 인종은 유대인, 집시, 슬라브인이 포함된다. 소련은 슬라브인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제거 대상이 된다. 전쟁을 통해서 미개한 슬라브인들을 없애고 그 공간을 독일인의 생활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히틀러의 슬라브인들에 대한 혐오로 침략이 시작된 것이다. 독소전쟁은 절멸전쟁(絶滅戰爭), 절대전쟁이라는 용어를 쓴다. 절멸(絶滅)은 아주 없어지거나 아주 없애버리는 뜻이다. 

히틀러에게 유대인과 슬라브인은 사람이 아닌 해충이다. 인류를 해치기 때문에 씨를 말려서 없애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쟁 내내 잔학 행위가 지속됐다. 

 

"볼세비키(소련)아의 전투에서 인도주의 원칙이나 국제법 준수는 고려돼서는 안 된다"

-1941년 히틀러의 지령

 

소련군 포로 570만 명 중 33만 명이 사망한다. 소련군 포로 사망 비율은 약 58% 였다. 소련군 포로들을 학살, 학대, 방치를 했다. 독일과 싸운 영국과 미국군의 포로 사망률은 3.5%~5.1% 였다. 

나치 독일은 인종주의적 절멸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시스템까지 구축한다. 인종말살(유대인, 슬라브인) 목적으로 나치 친위대 산하 특무기동대를 운영했다. 보고 체계를 통해 절멸 경쟁(몇 명을 죽였는지)까지 한다. 

 

독서전쟁 이전에 서유럽을 먼저 침공했다. 1939년 9월 1일 폴란드침공을 시작으로 덴마크의 즉시 항복을 받아내고 노르웨이는 연합군의 지원을 받았지만 두 달 만에 항복한다. 네덜란드는 5일 만에 항복하고 벨기에는 2주 만에 점령당한다. 

 

 

1940년 5월 10일 독일은 자신들이 자랑하는 육군 기갑부대를 앞세워 프랑스를 침공한다. 초반부터 승승장구했던 독일군은 난공불락이라 여겨졌던 마지노선을 뚫고 불과 6주 만에 수도 파리를 함락시킨다. 

직접 파리를 누비며 1차 대전의 한을 푼 히틀러는 내친 김에 영국 공략까지 시도한다. 

 

 

영국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군사시설 뿐만 아니라 런던 같은 대도시 폭격을 감행한다. 그러나 처칠은 끝내 백기를 들지 않았다. 끈질긴 저항의 뒷배경은 소련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히틀러는 소련을 속전속결로 물리치면 영국도 항복할 거라 판단한다. 

 

 

1941년 6월23일 영국 <London Daily Mail> 만평

히틀러는 궁극적으로 불가침조약을 맺었지만 언젠가는 소련 침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스탈린도 나름대로 향후 독일과의 전쟁을 대비했다. 1939년 독소불가침 조약을 맺었지만 스탈린은 1942년까지 독일의 공격에 대한 대비를 마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히틀러는 1942년까지 시간이 흘러가면 소련군이 만반의 준비가 한 상태가 되면 자신의 계획이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초조함이 있었다. 독일군의 상태는 가장 최강 전력이었고 반면 소련은 준비가 덜 된 상태여서 히틀러는 지금(1941년) 소련을 쳐야 한다고 판단했다. 

 

소련은 계속해서 독일의 침공 첩보를 받고 있었다. 1941년 6월 22일 개전날까지 적시한 첩보가 오기도 했다. 

독일은 암호를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 암호발생기, 에니그마를 만들어낸다. 에니그마를 해석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독일 에니그마에 맞서 영국의 천재, 앨런 튜링이 독일 암호 기계에 맞선 기계를 만들어낸다. 엘런 튜링과 동료들이 만든 세계 최초의 연산 컴퓨터, 콜로서스를 만들어 냈다. 미국은 나중에 독일에서 에니그마를 훔쳐 암호를 해독한다. 2차 대전의 첩보전은 암호를 해독하는 전담팀을 만들고 휴먼트, 즉 간첩을 적극 활용한다.

※휴먼트 (Humint)는 사람을 뜻하는 휴먼(Human)과 정보를 뜻하는 인텔리전스(Intelligence)의 합성어

이때 등장하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스파이는 리하르트 조르게(Richard Sarge 1895년~1944년)였다. 2차 대전 당시 독일 신문 기자로 위장해 일본에서 활동한 소련의 간첩이다. 조르게의 첩보가 2차 대전의 물줄기를 바꾼다. 

 

소련은 첩보로 독일의 침공을 알고 있었지만 방어태세를 갖추지 않았다. 1941년 6월 21일 독소전쟁 개전 전날 소련 국경을 넘어온 독일병사가 내일 공격시작이라고 말한다.

스탈린의 반응으로 그 병사를 총살한다. 스탈린의 성장과정에서 러시아혁명, 내전,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속고 속이면서 사람들을 잘 믿지 않게 됐다. 히틀러의 소련 침공은 자살행위이며 불가침조약을 맺었기 때문에 침공할리가 없다고 생각했으며 독일의 침공 첩보는 영국이 뿌린 정보라고 생각했다. 만약 스탈린이 이 정보를 믿고 군대를 이동하면 독일을 자극하여 공격 빌미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들어오는 전쟁 정보는 영국 처칠의 농간이라 생각하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독일이 쳐들어올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스탈린은 소련 국경 지역에 경계 조치나 정찰도 없었다. 갑작스러운 독일의 침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된다. 개전 초 소련군 탱크 90%가 파괴되고 800대 이상 전투기가 지상에서 파괴된다. 개전 1주일도 안 돼서 독일군은 소련 영내 400Km까지 진출했다. 

1938~1942년 소련 3차 5개년 계획이 진행되던 시기였다. 전쟁에 필요한 무기, 물자를 한창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기가 준비가 덜 된 상태였다. 

 

독일은 막강한 상태였고 소련은 독일군을 감당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2차 대전 당시 전 유럽을 떨게 한 독일 기갑부대의 전격전은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다. 독소전쟁 초반 전격적 역량을 바탕으로 소련군의 방어선을 손쉽게 돌파했다. 전격전의 특징은 전기에 감전되면 마비가 되듯이 빠른 속도로 상대 시스템과 심리까지 마비시킨다. 

 

 

"적은 이미 이 전쟁에서 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소련의 전차부대와 공군을 격파하고 시작할 수 있어 매우 기쁘다

소련은 이미 전력을 보충할 수 없다"

-1941년 7월 4일 히틀러 

 

소련 국경 최전방에 위치한 '브레스트 요새',  갑작스러운 독일의 침공에 무방비였던 요새는 무기도 병력도 부족하지만 결사적으로 항전한다. 압도적인 전력의 독일군에 맞서 한 달 가까이 고립된 채 전투가 계속된다. 

하지만 요새가 함락되고 항복을 거부한 채 끝까지 싸운 병사는 전멸하고 만다. 

한 소련군 병사가 끝까지 싸우며 벽에 글을 남겼다.

"나는 죽어가지만 항복은 하지 않겠다, 조국이여 , 안녕"

 

앞서 독일에게 항복한 유럽 국가와 달리 소련이 독일에게 항복하면 절멸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소련인들은 알고 있었다. 독일에 승리하지 못하면 소련인은 어차피 죽은 목숨이다는 공포심, 애국심, 스탈린의 압박에 더해져 히틀러가 생각하지 못한 저항의지로 나타났다.

 

히틀러는 소련 침공을 속전속결로 빨리 끝내야 했다. 작전명은 '바르바로사'였다. 

바르바로사(1152~1190년)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별명이었다. 당시 독일인들이 숭상하던 군주였다. 프리드리히 황제의 수염은 붉은색이었다. 이탈리아로 바르바로사는 붉은 수염이라는 뜻이다. 당시 독일인들에게 퍼져 있던 전설은 바르바로사 황제가 독일 숲 속에서 잠들어 있는데 훗날 다시 깨어나서 동방원정을 떠날 것이다고 했다. 

 

 

바르바로사 작전은 북, 중, 남으로 독일군을 3개 집단군으로 나눠 소련을 공격하는 것이다.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로 진격했다. 히틀러는 공산주의를 싫어해서 공산주의 상징, 레닌그라드를 공격한다. 

※레닌그라드는 러시아 혁명을 이끈 레닌의 이름을 딴 도시이다.

중부집단군은 모스크바를 공격한다. 스탈린이 모스크바에 있었기 때문이다.

남부집단군은 키예프 공격을 한 후 볼가강까지 진출해 유전 확보를 목표로 했다. 

 

백학은 우리나라에서는 드라마 '모래시계'의 OST로 유명하지만 러시아에서 독소전쟁 승전기념일에 추모곡으로 많이 불리는 노래다. 

"나는 가끔 병사들을 생각하지

피로 물든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한 병사들이 

그 언젠가 모국 땅에 묻히지도 못하고

백학으로 변해버렸네

그들은 여전히 하늘을 날면서 

우리를 부르며 우는 듯하네

그 때문에 우리가 자주 슬픔에 잠긴 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닐지"

 

독소전쟁은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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