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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괴뢰국 만주국

by 소시민스토리 2024.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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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뢰국 만주국

1908년 3살 나이로 청나라 12대 황제로 즉위한 푸이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황제 즉위 3년 후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나라는 멸망하고 푸이는 황제자리에서 물러난다. 1931년 9월 일본 관동군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지역을 장악한다. 1932년 3월 일본군 관동군 주도하에 만주국이 건국된다. 청에 마지막 황제 푸이는 일제에 의해 만주국 집정관으로 옹립된다. 1945년 일제의 항복과 함께 패망하기까지 푸이의 만주국(1932~1945년)은 13년간의 여러 가지 역사를 담고 있다. 

 

 

美아카데미상 9개 수상한 1988년 영화<마지막 황제>는 청나라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의 인생을 다룬 영화이며 만주국의 집정관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2008년 영화 <좋은놈,나쁜놈, 이상한 놈>은 만주국을 배경으로 여러 군상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만주에서 말을 타고 다니던 사람은 극히 일부분이었고 대부분은 일본군 장교였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선구자는 일본군과 관동군을 뜻한다.

<가곡 선구자>는 작사가 , 작곡가 모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만주국 국기는 '신오색기(新五色旗)'라고 불렀다. 신해혁명(1911년)은 중국의 민주주의 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을 탄생시켰다. 1912년부터 1928년까지 베이징에 존재한 중화민국 정부를 '북양정부'라고 불렀다. 중화민국 국기가 오색 기였다. 오색기와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 만주국 국기는 신오색기 (新五色旗) 로 부른다.

 

 

만주국은 1932년 3월1일 공식적으로 수립된다. 한반도의 5배 크기이며 인구는 1934년 약 3천만 명으로 시작해서 1942년 약 4천 5백만 명이 된다. 만주국 국사 수립과정은 괴이했고 일본군이 개입되어 있다. 

뤼순과 다롄은 러일전쟁 때 패전국 러시아가 일본에게 관할권을 이양했다. 뤼순과 다롄을 관리하던 일본군은 '일본 관동군'이었다. 관동군은 중국 만리장성의 관문인 산하이관 동쪽에 주둔한 일본 군대다.

관동군이 단독으로 만주를 침략했다. 일본 정부와 육군대신이 만주 침략을 반대했지만 명령을 거부하고 만주를 침략했다.

 

1차세계대전 당시 전쟁 특수로 경제적인 이득을 얻었던 일본은 1차 세계대전 후에 경기 불황이 닥치자 일본 정부는 국방 예산을 축소하고 2개 사단을 감축한다. 

불만을 갖게 된 일본 군부세력은 유력한 정치인의 암살을 시도하거나 쿠데타를 일으키기도 한다. 내각에 지속적으로 저항하는 일본 군부의 항명 사건이 일어난다. 이시와라 간지 일본군 관동 장교는 만주를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주를 점령하면 조선 통치가 유리하고 소련과 중국 진출에 유리하다고 주장하며 만주 침략을 위해 관동군 장교들이 모의한다.

 

1931년 9월18일 중국인으로 위장한 일본 관동군 장교들이 일본 소유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철로에 폭탄을 설치하고 터트리고 중국인에게 폭발 혐의를 씌운다.

 

 

1932년 일본 관동군에 의해 만주국이 세워진다. 만주국의 최고 지위 집정관으로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를 앉힌다. 만주국이 홍보한 건국이념은 오족협화(五族協和)였다. 오족협화(五族協和)는 만주국이 홍보한 건국이념으로 일본인, 중국 한족, 조선인, 몽골족, 만주족이 모두 평등하고 화합한다는 내용이다.

관동군은 국제연맹의 만주 침략 비난을 우려해서 만주족 푸이를 내세웠다. 만주국은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가 청나라 부활을 꿈꾸며 세운 나라이며 일본군은 지원군으로 도와줬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푸이가 맡았던 만주국의 집정관은 실권 없는 허수아비였다. 권한을 갖지 못했고 일본군인, 관료들이 중요사항을 결정하고 푸이는 조종당하는 신세였다. 사실상 만주국은 일본 관동군이 통치한 나라였다.

 

만주국의 실권자였던 5명의 일본인을 2키 3스케라고 부른다. 도조 히데키, 기시 노부스케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기시 노부스케는 일본 총리 아베 신조 외할아버지다. 전쟁이 끝난 후 A급 전범 용의자였으나 불기소 처분되었다. 도조 히데키는 만주 통치 시에 관동군 참모장이었다. 별명은 '면도날'이었다. 

기시노부스케는 나중에 말하기를 ' 만주국은 내가 그린 작품'이다고 한다. 별명은 '요괴'였다.

면도날과 요괴가 만주국을 통치했다. 

 

1932.9월 만주국과 일본이 일만의정서를 맺는다. '만주국은 일본이 만주에서 소유한 모든 권한을 승인한다'

'일본군은 만주에 무기한 주둔한다'라고 되어 있다. 만주국의 행정권과 군사권은 모두 일본이 가지고 있다. 

만주국은 괴뢰국(傀儡國)이었다. 괴뢰국은 꼭두각시, 허수아비라는 뜻이다. 

일본은 대만, 조선에는 총독부를 두고 통치를 했다. 하지만 만주국은 괴뢰국을 세웠다. 1931년 시점에서 국제관계에서 동아시아 정세는 열강의 상호 견제와 협력이 있었다. 국제정세 원칙을 깨트린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괴뢰국을 만들어 국제사회 압력을 피하려고 했던 것이다. 만주국은 민족이 섞여있고 영토는 중국에 있으며 일본이 실질적인 통치자로 복잡한 나라였다. 복잡한 만큼 다양한 시선이 존재한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만주국이라 부르지 않고 위만주국(僞滿洲國)이라 부른다. 즉 가짜라는 뜻이다.

기시 노부스케는 만주국을 근대 문명의 실험 장소로 생각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도시계획과 고속 철도였다. 일본의 고속 철도 신칸센 개발은 만주국에서 시작된다.

 

만주국은 조선인에게는 항일운동의 땅이면서 새로운 신세계를 꿈꾸는 땅이기도 했다.

독립선언문 기초를 작성한 육당 최남선은 만주국을 찬양했다.

 

"만주는 오족협화의 왕도 낙토로...

조선 민족을 위해 보급 균점하고 있나니

이 신천지에 있는 금후 조선인의 발전은

진실로 측량하지 못할 것이 있게 되었다.

<간도와 조선인> 최남선

 

만주사변 이후 연평균 7만 명 이상의 조선인이 만주로 이주했다. 1936년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약 88만 명이 된다. 조선인의 만주 이주를 국책사업으로 지정하고 지역별 이주민 할당제를 실시했다. 

※국책이민은 조선총독부와 관동군의 협력으로 강행된 조선인의 만주 이주를 뜻한다.

 

만주국의 조선인의 실상은 열악한 환경 속에 살아야 했다. 1월 평균기온은 영하 15~30도였으며 춥고 열악한 환경에서 일제의 강요로 농사를 지어야 했다. 조선으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생계를 꾸려야 했다. 일제가 조선인을 강제이주시키려 한 것은 목적이 있었다.

이민을 떠나는 사람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이어서 지역 빈민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조선의 농촌 인구 압박을 해소할 수 있었다. 조선인이 강제 이주된 지역은 주로 소련과 만주국의 북만주 국경지역이었다. 새로운 땅을 개척하고 조선인을 통해 벼농사를 개척하려는 의도였다. 1937년 중일전쟁 중이었으므로 식량이 필요했고 조선인이 만주에서 지은 쌀을 군량미로 사용하려고 했다.

 

'한 알의 식량은 곧 한 알의 탄알이 된다'

'많이 수확해서 빨리 출하하라'

조선인에게 생산을 독려하는 슬로건이었다. 

 

 

조선인들을 평상시에 농사를 짓게 하고 긴장 상황이 되면 전투병력으로 활용하는 '농민무장대'로 전환하려고 했다. 그래서 소련과 만주국 국경선에 배치한 이유였다. 

만주로 이동한 조선인을 통제하는 집단부락을 만들었다. 집단부락의 담벼락은 높았고 정문을 하나만 만들어서 드나들게 했다. 출입시간도 통제되었다. 만약 위반하면 마을 전체가 연대 책임을 져야 했다. 

집단부락으로 감시하는 것은 주민과 항일 유격대의 접촉을 원천봉쇄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1933~1939년까지 조선인 집단 부락은 13,451개소가 건설되었다. 1939년 기준으로 최소한 670만 명이 집단부락에서 거주했다. 만주국민 20% 이상 집단부락에 거주했다.

 

일제는 집단부락 정책으로 민간인과 항일 유격대의 분리를 성공한다. 집단 부락은 1930~1970년대까지 전 세계에서 반 정부 게릴라를 진압한 최초의 성공사례가 된다. 집단 부락은 베트남 전쟁에서도 원용이 된다. 

전략촌은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콩과 주민을 분리시키기 위해 미군이 전략적으로 만든 마을이며 아이디어는 일제 집단부락에서 가져왔다. 

 

일부 조선 젊은이들에게는 만주는 기회의 땅이었으며 스스로 만주국 시민이 되기도 했다.

1940년 만주국의 전체 관공리 중 조선인은 5.9%였으며 만주국 유일 정당 협화회 회원 및 간부로 극소수 조선인이 활동하기도 했다.  최남선은 만주국 협화회 회원이었다. 조선인 이선근은 만주부락을 만드는 데 협력한 사람이었다. 역사학자이며 조선인 부락의 농장건설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나섰다. 1954년 문교부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3개 대학 총장도 역임했다. 만주국의 (육군사관학교) 만주군관학교는 조선인도 입학했다. 

 

박정희  전 前대통령은 만주군관학교 출신이다. 만주국관학교 입학 가능 연령은 16~19세였다. 1939년 당시 박정희는 나이가 22세로 입학 불가였다. 

박정희는 열렬한 군관 지원 편지를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와 함께 보낸다. 

'한 목숨 다 바쳐 충성함 박정희'라는 혈서를 넣은 서류가 송부되어 담당자를 감격시켰다.

이 내용은 1939년 3월31일 <만주신문>에 보도되었다. 

박정희의 특단의 행동(혈서)은 군관학교에 감동을 주어서 1940년에 만주군관학교 제2기로 입학하게 된다.  

1942년 450명 졸업생 중 수석 졸업한다. 이후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진학한다. 2년의 교육을 받고 1944년에 만주국군 소위로 부임한다.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한 조선인은 48명이었다. 그중 정일권은 만주군에서 복무했고 해방 이후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기에 국회의장,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만주 독립군, 항일 유격대를 공격한 조선인(군관학교 출신 포함)도 일부 있었다. '간도특설대'라고 부른다. 

간도특설대는 일본군 정규군이 아니며 만주국군부대도 아니었다. 일제가 조선인으로 구성된 특수 목적부대였다. 장교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혼재되어 있었고 사병은 전원 조선인으로 구성되었다. 

독립군을 탄압하고 조선인에 협조하는 이주민의 통제가 목적이었다. 간도특설대는 독립군 사냥개, 철인부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성과를 거뒀고 일본정부는 조선인으로 조선인을 탄압한다는 전략을 성공한 사례가 된다. 

※간도특설대는 장교와 사병을 합한 275명의 대원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일제는 조선인이 일본군에 충성할것인가를 시험해 보는 단계로 간도특설대를 만들었고 정신 개조를 통해서 일본군에 충성하는 부대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1943년 조선인 학도지원병을 모집했고 1944년 조선인 징병제로 이어진다. 만주국 자체가 거대한 실험실이었다. 간도특설대는 잔악했다.

'임산부의 배를 칼로 찔러 살해하거나 마을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집단 구타했다'

<20세기 중국조선족력사자료집1> 中

일제가 간도특설대와 집단부락 체제를 활용하면서 1940년 이후 만주의 항일 무장투쟁은 사실상 괴멸되었다.

간도특설대 출신 중 대한민국 군 요직에 오른 인물이 많다. 한국전쟁의 영웅, 전 육군 참모총장 백선엽, 대한민국 해병대 초대 사령관 신현준이 간도특설대 출신이다.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대게릴라전 -미국은 왜 졌는가(1993년), 백선엽

간도특설대의 악명으로 중국인 사이에서 조선인 평판은 최악이었다. 

 

1945년 8월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졌고 8월 9일 소련군이 만주국을 공격했다. 소련군의 참전은 만주의 전세를 급변하게 했다. 소련군의 160만 명의 진격으로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만주국은 일본 패망으로 건국 13년 만에 패망한다. 1945년 8월 18일 만주국 집정관 푸이는 퇴위를 선언하고 다음날 일본본토로 도망가려다가 공항에서 소련군에게 체포된다. 중국으로 이송되어 수감생활을 하다가 모범수로 석방이 된다. 완전한 자유인으로 인생 최초로 직업, 식물원 보조관리사로 일하게 된다. 1967년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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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 영향을 준 만주국의 유산

 

군부가 통제하는 병영국가였으며 수시로 만주국 반공대회를 열었다. 건국체조를 보급했다.

1970년대 대한민국에서 반공대회가 있었고 반공 웅변대회를 했다. 재건체조(1961)는 5.16 쿠데타 후 재건국민운동본부에서 보급한 체조였다. 이런 것들은 조선 식민지 시기와 만주국의 영향 때문이었다. 박정희 제3공화국 초창기에는 재건체조라고 불렀다. '체력은 국력이다'라는 구호는 만주국시절 경험이나 1930~40년대 조선 총동원체제경험이 1960~1970년대에 부활한 것이다. 

 

1940년대 중, 고등학교에 체력장 시험과목 중에  '모의 수류탄 던지기'가 있었다. 1970년대 대학입시 체력장에서 수류탄 던지기를 했다. 고무 모의 수류탄으로 체력장 시험을 봤다. 나중에 공 던지기로 바뀌었다. 

1970년대 모의 수류탄 던지기는 1940년대 일제 군사동원체제에서 기원한 것이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만주국과 일제 강점기 경험이 재현되었다. 군사적 영향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재현된다.

 

영화 <개대환희(皆大歡喜)>는 만주국 수도 신징을 방문하는 할머니를 통해 만주국의 발전상을 홍보하는 영화다. 1967년 영화 <팔도강산>은 <개대환희>의 영향으로 만들었다. 1970년대 경제성장을 홍보하는 드라마 <꽃피는 팔도강산>으로 다시 재현해서 만든다.  만주국에서 <개대환희>라는 영화로 만주국의 발전을 선전했듯이  이 영향을 받아서 영화 <팔도강산>를 만들었고 <꽃피는 팔도강산>도 대한민국 경제성장을 홍보하는 드라마로 만든 것이다. 

영화 <팔도강산> 시리즈는 故 김희갑과 故 황정순 주연으로 전국의 자녀들을 방문하는 노부부를 통해 당시 경제 발전상을 홍보했다. 당대 최고 스타 박노식, 허장강, 신성일, 윤정희가 등장했다. 선전드라마까지 만주국의 영향이 미치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경제 개발을 주도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1940~1945년까지 일본, 만주국에서 활동했다.  당시 만주국은 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한다. 국가가 주도하는 경제개발 계획은 사회주의 방식이다. 만주국의 국가 운영 방식은 중앙 통제형 개발 독재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대한민국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만주국의 경제개발 정책을 대한민국에 적용한 것이다. 

기시 노부스케는 만주국 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설계한 인물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5.16 군사 쿠데타 이후 기시 노부스케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2001년 친서 내용이 공개되었다. 

 

"우리는 일본 메이지유신 당시 

지사들의 마음과 같습니다. 특히 존경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새 한국 건설에 

좋은 의견을 들려주길 바랍니다.

-기시 노부스케에게 쓴 편지 中

 

1970년 6월 18일 기시 노부스케를 한국으로 불러서 수교훈장을 수여했다. 두 사람은 만주에서 만난 적은 없다. 1960년대 박정희의 등장으로 일본에 있는 만주 인맥으로 연결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만주국의 경험과 유산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만주국을 제대로 알면 불편하고 난감한 부분도 정면으로 마주 볼 수 있어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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