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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독소전쟁, 히틀러의 소련 기습 공격

by 소시민스토리 2024.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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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전쟁, 히틀러의 소련 기습 공격 

1941년 6월 22일 히틀러는 소련 공격을 명령했다. 당대 최강이었던 독일 육군은 세 갈래로 나뉘어 소련을 공격했다. 

독소전쟁의 서막

 

독소전쟁의 서막

독소전쟁의 서막 1945년 4월 베를린을 포위한 소련군의 공세는 날로 거세졌다. 히틀러와 수뇌부가 숨어있는 벙커까지 포탄이 덜어진다. 히틀러는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한다. 히틀러는 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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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 중부집단군은 모스크바, 남부집단군은 자원이 풍부한 키예프를 목표로 잡았다. 놀라운 속도로 진격을 이어간 북부, 중부 집단군은 개전 한 달 만에 고지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불가능에 가까웠던 히틀러의 작전은 진행되고 있었다.  중부집단군은 전차를 앞세워 단 이틀만에  100Km를 주파했다. 

 

독일의 막강한 전차 부대

 

1916년 영국이 세계 최초로 전차 마크1을 개발했다.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 독일에게 베르사유 조약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 프랑스 등은 독일에게 전차 등 무기 생산을 금지시킨다. 독일은 전차를 가질 수 없자 속임수를 쓴다. 독일은 전차를 만들어서 농업용 트랙터라 주장하며 전차를 계속 개발한다. 

전차 훈련을 할 때는 들키지 않으려고 자동차에 전차 모형을 씌우고 몰래 훈련했다. 1935년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제국과 연합국 사이에 맺은 평화협정 베르사유 조약을 폐기하면서 드러내놓고 전차 개발에 집중한다.

제1차 세계대전은 병사들이 진흙 구덩이 속에 적진을 향해 기관총과 대포를 쏘는 참모전이 대부분이었다.

수많은 병사들은 적진을 잘 살피기 위해 참호밖으로 머리를 내밀다 피격당했다. 적군의 참호 점령을 위해 맨몸 돌격을 불사했다. 참호전은 수많은 보병을 희생시켰다. 1차 세계대전 전차는 보병을 호위하고 조력하는 역할을 했다. 2차 대전에 독일은 이를 발전시켜 전차로 전선을 관통한 후  보병의 화력을 집중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중심에 전차가 있었던 것이다. 기동력이 뛰어난 기갑부대를 한곳에 집중시켜 전선을 빠르게 돌파한다. 기갑부대가 적군의 방어선을 붕괴하면 보병부대가 그 뒤를 따라 진격한다. 기갑부대를 선봉으로 하여 적군을 포위하고 섬멸하는 전략은 전격전이라 불렸다. 

 

 

소련 전차 T-34는 속도가 빠르고 현장에서 고장나면 부품 교체가 쉬워서 수리 후 바로 전장 투입이 가능했다. 

소련군 전차는 독일 전차에 비해 무거웠지만 압도적으로 속도가 빠르고 주포도 더 컸다.

소련군 전차 T-34는 전세계 중에 유일하게 자동차용 서스펜션을 장착한다. 노면의 충격을 흡수하는 서스펜션 장치를 적용하여 울퉁불퉁한 지형에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놀라운 속도를 자랑했다.

현가장치(Suspension)는 주행할 때 충격이 차체에 직접 전달되지 않도록 해 손상을 방지하고 승차감을 좋게 하는 장치이다. 소련이 1930년대 미국 현가장치 특허권을 구입해 전차에 적용했다.

 

소련 탱크가 장점이 많았지만 초기에 독일전차에 속수무책으로 밀린 이유는 통신장비 유무에 있다. 독일 전차 군단의 장점은 집체를 형성했다. 집체를 형성한 수백 대의 전차가 공군, 보병과 함께 작전을 수행했다. 함께 작전을 하기 위한 무선통신 장비가 필요했다. 

당시 전쟁 초기에 유럽 군대에서 무선 통신 장비를 갖춘 국가는 독일뿐이었다. 

 

 

히틀러의 최강육군은 레닌그라드에 다달았다. 소련의 상징적인 도시 레닌그라드, 소련군은 물러날 수 없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노인과 부녀자 아이들을 앞세워 방패막이로 삼았다. 끝내 독일군에 응사를 하지 못한 소련군은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위기에 처한다.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 전방에서 야만적 전술을 반복해서 썼다. 

이런 사실을 쓴 보고서를 본 스탈린은 감상주의에 빠지지 말고 쏘라고 명령한다. 

인간 방패를 삼은 야만적 전술은 슬라브인, 유대인 등 소수민족을 열등한 인간으로 생각한 히틀러의 철학이 반영된 전술이다.

 

레닌그라드는 역사적인 도시다. 지금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이며 제정 러시아의 옛 수도였다. 

1924년 레닌 사후 레닌그라드로 개칭했다. 1905년 혁명, 1917년 2월 혁명, 1917년 10월 혁명, 3번이나 역사적으로 의미가 큰 혁명이 일어났다. 역사적, 문화적 중심지로 러시아의 정신 같은 도시였다.

레닌그라드는 소련 최고의 공업지대로 엄청나게 많은 군수물자가 생산되기 때문에 정신적 타격과 군수 타격을 가하기 위해 중요한 목표가 된다. 

 

독일군의 레닌그라드 진입 직전 소련인들과 군인들은 결사항전으로 맞선다. 독일군은 소련의 결사항전에 맞서기 위해 시가전을 벌이면 큰 피해를 볼것이라 판단하고 포위를 해서 굶겨 항복을 유도한다.

레닌그라드를 900일 간 봉쇄하여 영양실조로 수많은 질병이 발생한다. 레닌그라드의 하루 빵 배급량은 최저 113g(식빵 한 조각)까지 떨어졌다. 굶주린 레닌그라드 시민들은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섭취했다. 개, 고양이, 새 등 닥치는 대로 잡아먹고 심지어 가죽 구두, 허리띠를 물에 부려 요리해서 먹었다. 벽지를 뜯어내서 풀을 긁어 수프를 끓이기도 했다. 식인행위까지 있었다. 인육매매도 존재했다. 

레닌그라드의 비극을 기록한 '타냐의 일기'는 역사적 가치가 인정돼 러시아 역사박물관에 전시되었다. 

1942년 8월에 14살이었으며 레닌그라드를 탈출했지만 영양부족으로 병에 걸려 사망했다. 

첫해 겨울 하루 사망자수는 4천~5천 명이었다. 1941년 12월에는 하루 사망자 수 1만 명에 육박했다. 

 

독일중부집단군은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히틀러는 중부집단군의 진격을 중단하라고 명령한다. 자원이 풍부한 우크라이나 점령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히틀러의 갑작스러운 진격 중단 명령에 군 지도부는 강력히 반대한다. 그러나 히틀러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모스크바를 목적에 두고 히틀러는 중부집단군의 기갑부대 절반을 남쪽으로 돌려서 남부집단군이 키예프를 공략할 때 지원을 하라고 명령한다. 히틀러의 갑작스러운 작전변경으로 전쟁은 한 달가량 지연이 된다. 

우크라이나는 곡창지대이며 석탄이 풍부하고 석유가 많이 나오는 바쿠가 근접해있어 독일이 부족한 자원을 확보할 수 있는 지역이어서 히틀러가 갑작스럽게 키예프로 작전변경을 한 것이라 추정된다. 

히틀러가 단기전을 강조한 이유도 자원이 부족해서 전쟁이 장기전으로 가면 보급이 부족해지기 때문이다. 

 

 

독일은 보급선이 불안했다. 두 철로 사이의 간격을 궤간이라 부른다. 독일과 소련의 궤간은 달랐다. 독일의 궤간은 세계 표준 궤간 1435mm이며 독일에서 병력과 보급품을 실은 기차를 출발해서 소련 국경에 오면 멈춘다. 소련의 궤간은 1524mm로 더 이상 열차를 달릴 수 없었다. 궤간 차이 극복을 못해서 독일은 보급품이 지연되었다. 1812년 나폴레옹은 모스크바를 공격해서 함락했다. 25년 후 철도 부설을 시작한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1세는 프랑스 침략의 트라우마로 유럽 궤간과 다르게 설치했다는 설이 있다.

 

국가마다 궤간을 정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다. 소련처럼 광활한 영토에서는 광궤가 적합하다. 넓고 평야지대가 많아서 폭이 넓은 광궤를 선택하게 되면 차량크기를 크게 할 수 있고 고속운행이 가능해진다. 소련은 '라스푸티차'라고 해서 겨울을 전후로 봄과 가을에 땅이 진흙땅이 되는 현상이 있다. 

봄, 가을 땅이 라스푸티차 진흙으로 변해 지반이 약화되기 때문에 무거운 철도의 하중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좁은 철도보다는 광궤를 설치하는 것이 적합하다. 

독일 열차가 소련 궤간으로 달리기 위한 궤간 보수 공사로 독일 보급품이 지연된다. 

 

 

독일군 기갑부대는 선봉에 선다. 기갑부대를 따라가는 보병은 수십만 마리의 말을 이용해서 이동했다.

 

"붉은 군대가 어쩔 수 없이 퇴각하는 경우 모든 철도차량은 철거되어야 합니다

적에게 단 한 대의 기관차도 단 한 대의 하차도  단 1Kg의 곡식도, 1L의 연료도 넘겨주어서는 안 됩니다"

<스탈린의 연설 中>

스탈린은 후퇴할 경우 모든 곡식, 공장 등 어떤 물품도 남기지 말라고 명령했다. 독일군이 도착해보니 도시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소련군은 우랄산맥 서쪽에 있는 대규모 군수공장 2,500개를 분해해서  열차로 옮겼다. 뿐만 아니라 엔지니어 노동자, 그들의 가족까지 탑승해서 우랄산맥 동쪽으로 옮긴다. 

 

1941년 9월 전선 중앙부에 집결한 독일 중부집단군에게 히틀러는 소련의 심장 모스크바를 점령하기 위해 태풍작전을 명령한다. 1,700대 이상의 전차, 190만 병력이 동원된 토네이도급 공격 작전이었다. 

반면 소련군은 동원 가능한 방어병력의 한계로 최대위기에 처했다. 모스크바 앞 방어선을 치지만 9만 명에 불과했다. 스탈린은 비장의 카드를 쥐고 있었다. 리하르트 조르게가 있었다.

리하르트 조르게는 일본에서 독일신문 특파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전쟁을 일으켰던 추축국(독일, 일본 등)의 주요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독일인이고 어머니가 소련인이었다. 조르게는 일본에 살면서 화술이 좋고 사교성이 뛰어나서 일본 거물급 정치가, 기자들과 친분관계를 형성했다. 자신을 열혈 나치 당원으로 위장을 하고 독일대사관을 출입해 고급정보를 수집했다.

독일과 일본은 동맹관계였기 때문에 고급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조르게는 미남이었다. 일본 주재 독일 대사관의 육군 무관의 부인을 유혹해서 고급정보를 수집한다. 

조르게가  위기에 빠진 모스크바를 구할 결정적 첩보내용은 '일본의 공격방향은 북쪽이 아니라 남쪽이다'는 것이었다. 

모스크바 주요 방어선의 가용병력은 9만이다. 극동을 지키고 있는 약 30개 사단은 스탈린이 일본의 공격 대비를 위해 극동 쪽에 수많은 병력을 배치한 것이었다. 조르게의 첩보로 일본이 극동을 치지 않고 남방 공격 예정이라는 것을 입수하게 된다. 스탈린은 극동 병력 30개 사단을 모스크바 사수로 돌린다. 

조르게의 첩보는 결정적 첩보였다. 

 

※라스푸티차는 러시아의 비가 내리는 10월과 눈이 녹는 3월에 땅이 진흙으로 변해 통행이 힘든 시기를 뜻한다. 눈이 녹아 진흙으로 변하는 러시아의 비포장도로는 차량이나 사람이 가기가 힘들다. 

개전초기 독일군은 이틀 만에 100km를 진격했지만 라스푸티차 상황에서는 하루 5~8Km 진군하기도 힘들었다. 

 

소련군복은 보온에 신경썼고 철모가 아니라 추위를 막는 털모, 손모아 장갑(바레즈키)을 착용했다. 독일군은 멋있는 군복을 입었고 철모, 손가락장갑을 착용했다. 히틀러는 청년층에게 멋진 군복을 선보여 나치군을 선전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독일군복은 '휴고 보스'가 디자인했다. 선풍적 인기를 끌어 청년층의 많은 입대를 지원하게 했으며 나치의 선전은 대단했다. 2011년 휴고 보스사는 나치에 협조한것에 공식 사과문을 발표했다.

 

독일군은 소련의 추위에 고생을 많이 한다. 동상환자도 많이 생기면서 독일군 지도부에 동복을 달라고 요청한다. 상부에서는 동복을 지급하지 않는다. 전쟁 장기화 신호이기 때문에 오히려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독일 국민들에게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고 해서 동복 지급을 거절한다. 

추위를 견디며 독일군은 약 30Km 거리 모스크바 인근 힘키까지 진격한다. 

모스크바 함락 직전 1941년 11월 7일 러시아 혁명 기념일에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스탈린이 나타난다. 

강한 모스크바 사수 의지를 드러내며 소련의 시민과 군인들을 마지막까지 독려한다.

스탈린의 출현 이후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고 히틀러는 모스크바 점령을 실패한다.  

독소전쟁은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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