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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독소전쟁 무너지는 히틀러, 베를린 함락

by 소시민스토리 2024.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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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전쟁 무너지는 히틀러, 베를린 함락 

1945년 4월 16일 소련군은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총공세를 시작한다. 베를린 함락을 시간문제였다.

풍전등화에 빠진 히틀러는 자신의 참모들에게 저주의 가까운 분노를 쏟아낸다.

 

독소전쟁, 스탈린그라드 전투

 

독소전쟁, 스탈린그라드 전투

독소전쟁, 스탈린그라드 전투 1942년 8월 23일 일요일 독일 폭격기가 소련 최고 지도자의 이름을 딴 도시 스탈린그라드 상공을 뒤덮았다. 600여 대의 폭격기가 수천 톤의 폭탄을 투하하며 전투는

bringbacon.tistory.com

 

히틀러가 명령하면 장군들이 일사불란하게 말을 들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독일 정규군의 장군들은 귀족 출신 엘리트들이 많았고 히틀러는 밑바닥 출신이어서 서로 견제하고 있었다. 히틀러 입장에서는 엘리트 장군들은 부모 후광으로 장군이 됐다고 생각하고 엘리트 출신들 입장에서는  히틀러는 근본도 없는 사람이며 벼락출세한 것이다. 이런 갈등관계가 숨어있었지만 전쟁에서 승리할 때는 표출이 되지 않다가 전쟁이 불리하게 돌아가면서 표면 아래에 있던 갈등관계가 위로 솟구쳐 히틀러가 극도의 불신감을 드러냈다. 

 

소련은 베를린 점령을 위해서 당시 소련 병력 250만 여 명을 동원했다. 대다수 독일 주력 부대는 괘멸된 상태였다. 히틀러는 걷지도 못하고 손을 덜덜 떨면서 극도의 불안감을 보인다.

 

※독일에서는 자동차번호판에 HH는 Heil Hitter 하일 히틀러를 연상시키므로 사용금지다. 

독일에 가서 나치 독일에서 했던 경례(나치식 경례), 팔을 쭈욱 뻣는 행위는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독일 학생들은 손을 들고 발언하지 않고 엄지 손가락을 들고(손가락만 들어서) 발언을 한다. 

독일어 Heil은 구원, 행복이라는 뜻이다. 성경에서 쓰이는 단어이기도 하다. Heil Hitter의 뜻은 히틀러에게 모든 구원을 바란다는 뜻이다. 

독일 형법 제86조와 86조a에 따라 나치의 상징을 사용하는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벌금형에 처한다. 

독일에 왔던 관광객이 나치식 경례를 하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1942년 스탈린그라드전투와 1945년 베를린  점령 사이에 두 번의 큰 전투가 있었다. 1943년 쿠르스크 전투가 있었다. 쿠르스크 전투(1973년 7월 5일~ 8월 23일)는 소련 서부 쿠르스크 지역에서 벌어진 사상 최대 규모의 기갑전으로 동원된 전차 약 6천대 이상이었다.

스탈린그라드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독일군이 최후의 총공세를 펼쳤다. 스탈린그라드는 겨울철 시가전이었기 때문에 독일군이 패배했다고 판단하고 여름철 벌판에서 기갑전을 펼치면 독일군이 승리할 것이라 예상한 것이다. 그러나 소련군이 승리했다. 소련군은 전쟁의 승기를 쥐게 돼고 독일군은 방어에 주력하게 된다. 

 

 

1944년 6월 소련군은 방어에서 베를린 총공세로 전환했다. 작전명은 '바그라티온'작전이다.

※표트르 바그라티온은(1765~1812)은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을 물리친 제정 러시아 장군이다.

바그라티온 작전날은 1944년 6월 22일로 잡았는데 3년 전 독일이 처음 소련을 침공한 날이다.

패배를 되갚기 위해 철저히 준비한다. 

※바그라티온 작전(1944.6.22~8.19)은 폴란드와 벨라루스에 포진해 있던 독일 중앙집단군을 섬멸하기 위한 소련군의 대공세

 

 

병력은 250만, 기갑차량 5,800대, 항공기 7,800대 동원됐다. 한 달만에 약 700km 가까이 진격한다. 

1945년 4월 16일 소련군은 베를린 방어선을 뚫는다. 히틀러는 베를린 사수를 위해서 어린아이까지 전쟁에 동원한다.  하지만 압도적인 소련군의 공세 앞에 소년병들의 저항은 무의미한 희생이었다. 

※히틀러 유겐트는 아돌프 히틀러의 이름을 딴 나치 청소년 단체이며 베를린에서 소년병은 4,000여 명이 동원됐다.

히틀러 유겐트 입당 시에 했던 서약이 있다.

 

"나는 우리나라 구세주 아돌프 히틀러에게 나의 생명을 기꺼이 바치겠다"

 

2차 세계대전 비극의 상징은 독일 소년병이다. 소련군 탱크가 몰려오자 독일군 무기 '판처파우스트' 전차 공격용 무기를 소년병 손에 쥐어 주었다. 판처파우스트는 조작이 쉽게 가벼워서 히틀러의 요술봉이라는 별명을 가진다. 판처파우스트를 손에 쥔 소년병들은 영국과 미국의 전략폭격에 부모들을 잃은 전쟁고아가 많았다. 

나치독일은 소년병들을 나치 이념으로 철저히 세뇌시키며 부모의 원수를 갚아야 된다고 교육시킨다. 

 

 

하지만 판처파우스트는 최대 유효사거리는 60m여서 가까이 쏴야 했다. 소련군 코 앞에서 쏴야 해서 소년병들의 희생은 컸다. 1945년 4월 20일 히틀러는 소련 전차를 격파한 소년병들에게 훈장을 주며 독려한다. 

10살을 갓 넘은 소년병도 있었다. 소년병들에게 훈장을 준 이후 히틀러의 모습은 베를린에서 볼 수 없었다.

 

전 국민에게 베를린 사수를 명령하고 히틀러는 총통 관저 지하 비밀 벙커에 몸을 피한다.

현재 벙커는 주차장 부지로 바뀌었고 너무 튼튼해서 완전 폭파가 불가능해서 흙으로 덮어버렸다.

※벙커는 전쟁, 재난을 대비하여 만든 견고한 대피시설이다. 미국 대통령 비밀 벙커가 10곳 이상 존재한다.

히틀러의 비밀 벙커는 관저에서 지하 12m에 위치하고 있고 외벽 두께는 4m, 천장 콘크리트 두께는 약2m 정도이다. 집무실, 회의실 등에 비해 식당, 부엌은 유독 컸다. 일반적인 벙커는 비상식량 등 간편식으로 끼니를 해결하기 때문에 부엌이 작은 편이다. 

 

 

히틀러의 벙커 식당에서는 와인과 초콜릿 케이크가 준비되었다. 

히틀러는 여비서의 보고에 따르면 케이크와 초콜릿을 자주 먹었다고 한다. 전쟁 중 독일국민에게  물자지원을 풍족하게 잘해줬다. 당시 미국에서 개발된 콜라의 주요 소비국은 독일이었다. 2차 대전이 벌어지면서 미국에서 콜라 원료 수입이 막혔다. 1940년 콜라의 대용품으로 환타가 개발되었다. 초반에는 콜라를 본떠서 검은색이었다. 단순 기호식품이 전쟁 중에 개발된 이유가 있었다. 히틀러는 독일 국민이 선출한 지도자였다. 전시에도 독일 국민들의 생활수준 유지에 신경을 많이 썼다. 전시에는 민간수요의 모든 물자를 군수로 돌리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히틀러는 그러지 않았다. 히틀러는 1차 대전 패배원인으로 낮아진 생활수준으로 국민 불안을 초래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는 1993년 만들어진 작품으로 나치로부터 유태인 1,100여 명을 구한 독일인 사업가 쉰들러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이다.

쉰들러 리스트 속 장면에 '법랑냄비'를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민간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 패배 후 괴벨스가 총력전을 외치면서 독일도 위기상황이기 때문에 모든 물자 생산을 군수로 돌려야 한다고 한다. 여성용 파마약, 화장품 생산 중단을 결정한다고 발표하자 히틀러의 연인 에바 브라운이 항의를 한다. 그래서 괴벨스와 히틀러가 고민하다가 결국 파마약과 화장품 공장은 제외시켰다. 

히틀러의 정책으로 2차 대전 막바지까지 상대적으로 독일국민들은 풍족하게 지냈다.

히틀러 집권 이전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인플레이션은 1차 대전 이후 물가가 3년 만에 1조 배 가까이 상승했었다. 히틀러의 경제정책은 독일 국민 지지 확보의 원동력이 되었다. 

 

 

1933년부터 1939년 전쟁 직전까지 뉘른베르크에서 나치 전당대회가 매년 열렸다. 화려한 빛줄기 사이로 등장하는 아돌프 히틀러의 극적인 집회 연출의 화룡점정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연설이었다.

히틀러의 연설은 강력한 흡인력이 있었다. 감정을 잘 살려서 간결하고 쉬운말로 전달했다. 

히틀러는 연설을 하면서 화려한 손 제스처를 많이 썼지만 자세는 흔들리지 않아서 신뢰감을 줬다. 과장된듯한 큰 목소리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큰 소리와 잠깐의 침묵, 작은 소리도 적절히 사용해서 집중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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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대전 이후 패배의식과 경제공황에 시달렸던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의 카리스마에 매료되어 패망직전까지 독일국민들이 히틀러에게 열광하며 충성을 맹세하게 했다. 

하지만 히틀러의 독일국민들에 대한 생각은 달랐다. 나치즘의 핵심은 인종주의였다. 인종주의는 인종 사이에 유전적 우열이 있다며 지배-피지배를 합리화했다. 히틀러는 똑같은 논리를 독일국민들에게 적용했다. 

 

"국민들을 살려주십시오 총통"

 

"독일 국민은 약하다고 증명되었고....

약자가 죽는 것은 자연의 섭리니까 지금껏 살아남은 것들은 ...

하등 한 놈들 뿐이야, 우월한 국민은 다 죽었다고"

 

"젊은 장교를 약 2만 명 잃었습니다"

 

"그러기 위해 있는 게 젊은이들 아닌가?"

<영화 다운폴 히틀러 대사 中>

 

히틀러는 인종이론을 철두철미하게 지켰던 순수한 이념가였다. 인종이론을 유럽인들뿐만 아니라 자국민에게까지 철저히 적용한다. 소련군이 독일 베를린에 진입해서 시가전이 벌어지고 있었고 베를린 시민 45만 명 사상자가 생겼다. 히틀러에게 일부 장군들이 무의미한 피해라고 하며 항복을 권유한다. 히틀러는 끝까지 항전한다고 명령한다. 

 

요제프 괴벨스(1897~1945)는 나치 독일의 제국국민계몽선전장관이었으며 나치의 선전, 선동을 주도했다. 

 

"무기도 주지 않고 어떻게 싸우라는 거죠?

개죽음입니다"

 

"전 그들을 동정하지 않습니다, 동정할 이유가 없죠!

그들이 직접 선택한 운명이니까요, 누군가 강요한 게 아닌 

그들의 선택이었으며 대가를 치르는 겁니다"

<다운풀, 괴벨스의 대사中>

 

뉴스를 시작할 때 시간을 알려주는 시보(時報)를 만든 창시자가 괴벨스이다.

당시 최첨단 매체였던 영화, 라디오의 선전 기능을 선구적으로 간파했다. 라디오 방송과 영화를 장악해서 나치즘 이념 주입 수단으로 적극 활용했다. 히틀러처럼 가장 순수한 나치 이념가였다. 

 

전쟁 막바지에 다다르자 탈영병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라이프코만도는 나치의 탈영병 전담 조직으로 탈영병들을 처단했다. 국민들의 투표로 세워진 합리적인 정권으로 히틀러를 지지했던 대가는 가혹했다.

 

 

1945년 4월 30일 소련군이 나치 독일의 심장 독일 제국의회의사당을 점령했다. 6시간 제국의회의사당에서 공방전을 벌이다가 의사당을 점령하고 국기를 게양한 시점은 한밤중이다. 

이틀 뒤에 연출해서 찍은 사진이다. 

 

 

베를린이 함락되는 순간(1945년 4월 30일) 히틀러는 에바 브라운과 결혼을 한다.

 

"당신은 아리아인의 후손입니까?"

"그렇소"

"증명서를 볼 수 있을까요?"

"브라운 양, 당신은 아리아인의 후손입니까?"

"네"

"절차상 문제는 없습니다"

"두 사람을 부부로 선언합니다"

<영화 다운폴 대사 中>

나치 독일 당시 '아리아인'끼리만 결혼이 가능했다.

 

히틀러는 아내가 된 에바 브라운과 함께 자살을 한다. 하루 뒤 1945년 5월 1일 괴벨스부부는 6명의 자녀들을 모두 살해 후 자살한다.

유럽전역을 전쟁 공포로 몰고 간 나치독일의 비극적 몰락의 순간이었다.

괴벨스는 철저한 나치당원이었으며 부인 마그다 괴벨스도 남편 못지않은 열혈 나치당원이었다.

마그다 괴벨스는 히틀러가 자살하자 히틀러가 없는 세상에 우리 가족이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서 자녀들을 살해한 것이다.

맏딸 헬가 사후 발견 당시 얼굴이 멍이 많이 남아있었다. 동생들은 저항하지 못하고 독약을 먹었는데 헬가는 저항을 심하게 했다는 증거가 된다. 나치 선전 영상에서 해맑은 모습으로 괴벨스 자녀들이 등장했었다.

 

히틀러는 자살 후 시신이 불태워졌다. 스탈린은 히틀러의 시신을 찾으려 했다. 스탈린은 히틀러와 나치즘의 부활을 우려했다. 만약 히틀러의 무덤이 생기면 그곳이 나치즘의 성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까스로 히틀러의 두개골 일부가 모스크바에 이송되었고 철저히 비밀에 부친다. 치열했던 4년간의 독소 전쟁은 끝이 났다. 사상 최악의 전쟁이었고 사망자는 소련은 민간인 포함 대략 2,900만 명, 독일은 민간인 포함 500만여 명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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