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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나의 조국, 독도

by 소시민스토리 2024.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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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조국, 독도

1904년 2월 한반도의 운명을 바꾼 러일전쟁이 발발한다. 1905년 5월 동해 앞바다에서 벌어진 최후의 결전, 아시아 섬나라 일본은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러시아 발틱함대를 완전히 궤멸시킨다. 러일전쟁을 끝낸 역사적 현장, 그곳은 바로 독도 앞바다였다.

 

 

 

한일강제 병합의 결정적 사건이 된 러일전쟁이었다. 러일전쟁 후 일본이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며 침략을 노골화한다. 을사늑약(1905.11.17)은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해 강제로 맺은 조약이다. 일제 식민지의 첫 단계가 러일전쟁이었다. 

 

러시아는 만주와 한반도 쪽에서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선언하자 유럽인들은 깜짝 놀란다. 

 

 

-코사크의 아침 식사(러시아 만평, 1904년)

유럽사람들은 러시아사람을 코사크라고 불렀다. 러시아사람이 일본사람을 아침으로 먹고 있다. 당시 유럽인들은 일본은 상대가 안 된다는 의식이 강했다. 

 

 

-접시에 발을 넣는 일본(프랑스 엽서 1904)

러시아 사람이 음식(조선)을 먹으려고 하는 데 접시에 일본인이 발을 올린다. 유럽에서는 러시아는 강대하게 생각하고 아시아를 무시하고 있었다. 

 

러시아 발틱함대는 9개월간 지구 반 바퀴를 항해하여 마지막으로 상해에서 석탄과 물을 실었는데 그 소식을 일본해군이 입수한다. 일본 해군은 진해에 본거지를 두고 있었다. 

일본 해군은 발틱함대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가기 위해 대마도 해협을 지나서 울릉도, 독도 근처를 지나갈 것이라고 이동 경로를 예상하고 군사 전략을 짠다. 발틱함대를 무찌를 곳은 대한해협이라 판단한다. 최악의 컨디션이었던 발틱함대를 최상의 컨디션으로 준비된 일본이 정확한 정보로 승리한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첫 희생지는 '울릉도와 독도'였다.

 

일본은 러일전쟁으로 승리를 가졌지만 희생은 컸다. 패전국 러시아군 사망자는 약 5만 명이었고 승리국인 일본군 사망자는 약 8만 6천 명이었다. 특히 뤼순 공방전(1904.8~1905.1)에서는 러일전쟁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양산한 전투였고 일본군은 8천 명이 희생됐다. 반자이 돌격이 이때 나온 것이다. 반자이는 일본어로 '만세'를 뜻한다. 뤼순에는 일본군의 시체가 태산처럼 쌓여 악취가 진동해서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러시아군은 나프탈렌 냄새를 맡으면서 근무했다. 병사들의 엄청난 희생으로 일본은 세계 최강 발틱함대를 격파할 수 있었고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러시아와 일촉즉발의 대치 상태에서 울릉도와 오키 섬 중간 거점 독도에 망루를 설치했다. 망루(望樓)는 적이나 주위의 동정을 살피는 건물이다.

전투에서 망보기는 중요하다. 망망대해에서 밤에는 별을 보고 갈 수 있지만 낮에는 섬을 보며 이동한다. 섬에 망루를 설치하면 적의 이동을 볼 수 있다. 망루와 함께 통신용 해저케이블을 설치하여 일본 해군지휘부에 연결되어 있었다. 망루에서 본 적군의 이동정보가 실시간으로 본부에 보고됐다.

 

일본은 러일전쟁을 오랫동안 준비하고 있었다. 일본은 통신의 중요성을 깨닫는 계기가 있었다. 1898년 4월 쿠바에서 미국-스페인 해전이 발발했다. 당시 해군장교였던 아키야마 사네유키(1868~1918)는 일본 해군 장교이며 미국-스페인 전쟁을 참관했다. 참관해 보니 미국 전함에 무선 통신 장비가 탑재되어 있었다. 실시간 정보들을 지휘부에서 취합해서 가장 적합한 전략, 전술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 결과 세계 최강의 스페인 함대를 완벽히 미 해군이 제압했다. 

이를 경험한 아키아먀는 일본으로 돌아와서 망루 설치를 제안했다. 제안했던 거점들이 울진, 울산, 거문도, 제주도, 울릉도, 독도였다. 

 

독도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인식한 일본은 스시마 해전 직후 1905년 7월부터 독도에 망루와 통신용 해저케이블, 감시원을 상주시키고 독도에서 얻은 정보를 취합해서 전략을 짤 수 있게 된다. 

1938년 촬영된 영상에 독도 강치 모습이 보인다. 한국 바다사자 강치의 서식지 '독도'였다. 하지만 1900년 대 초 일본어부들은 무단 침범해서 총과 그물을 사용해 강치를 남획했다. 100여 년 전 독도의 주인이었던 강치는 현재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강치는 바다사자의 일종이다. 1900년대 초 1만 마리 이상 서식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강치를 기름은 연료로 쓰고 고기는 비료로 쓰고 어린 강치는 서커스용으로 팔아넘겼다. 

강치가죽이 소가죽보다 질기고 튼튼해서 고급가방, 군용 가방을 만들었다. 

 

 

나카이 요자부로(1864~1934)는 일본 시마네현 어부로 독도 '강치 독점 조업권'을 확보해서 1930년대에 무차별 남획으로 독도 강치는 멸종된다. 

나카이 요자부로는 일본에서는 어업의 선구자로 불린다. 1903년 일본 어부들은 독도에 강치가 대량으로 서식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어부들끼리 강치를 포획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된다.

요자부로는 독도 강치 독점을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강치가 있는 땅은 대한제국의 땅이니 일본 정부에 독도를 일본 영토로 병합해 달라고 청원을 한다. 강치 산업을 끝까지 보전할 수 있도록 앞으로 10년간 독도를 대여해 달라고 한다-랑코도 (독도) 영토 편입 대하원(1904)

 

일본 내무성 담당자는 "한국 영토일지 모르는 일개 황폐한 불모의 암초를 취하면 한국을 병합하려는 야심이 있다는 의심만 살 뿐이오"라며 반대한다.

일본 외무성 담당자는 "독도에 망루를 설치하고 해저 전선을 설치하면 러시아 함대를 감시하기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찬성한다. 외무성 의견대로 1905년 1월 28일 독도를 일본령으로 편입시킨다. 1905년 나카이 요자부로는 독도 어업 독점권을 획득한다.

 

강치 번식기에 독도에 임시막사까지 지어서 본격적으로 강치 사냥을 한다. 한 해 평균 약 3천 마리 강치를 남획한다. 그 흔적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독도에 남아있다. 독도 강치 살육 흔적은 서도 동굴에 수천 마리의 강치 뼈들이 남아있다. 새끼를 포획하면 암컷이 구하려고 달려오고 그 소리를 들은 수컷이 달려오면 잡는다. 제일 좋은 가죽은 수컷이었기 때문에 새끼를 유인해서 잡았다. 탐욕스러운 일본인 어부의 욕심과 제국주의의 열망이 투영된 독도였다. 

 

 

1832년 독일 학자 율리우스 클라프로트가 제작한 지도에 조선과 독도 그림이 노란색으로 조선의 영토로 그려져 있다. 

 

"두 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도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권 153. (1454) 

독도를 조선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울릉도를 '울도군'이라 하고 관할 구역은 울릉도, 죽도, 석도로 한다"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1900. 10. 25)

대한제국 칙령의 날 10월 25일은 독도의 날이다. 

 

석도(石島)는 돌섬으로 당시 울릉도에는 전라도 어민들이 많았다. 전라도 방언에 '돌'을 '독'으로 발음했다. 돌섬이 독섬(석도)으로 불리고 독도가 되었다. 1900년대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조선이 먼저 독도를 관할하려고 했다. 일본은 독도와 울릉도를 자기 영토로 생각하지 않았다. 독도, 울릉도에서 물고기를 잡으려면 일본 어민이 외국에서 항해할 때 발부받은 조업 허가서, 도해면허(渡海免許)를 받아야 했다. 

 

일본은 울릉도와 독도를 노렸지만 울릉도는 명확하게 한국영토 증거가 많아서 독도만 떼어내서  1905년 1월 28일 일본 내각이 독도 편입을 결정한다. 1905년 2월 22일 독도를 시마네현으로 편입 고시한다. 2월 24일 지방 신문에 독도 편입 공고를 했다. 1년 뒤 시마네현 관리들이 울릉도를 방문하여 울릉도 군수에게 독도 편입을 알린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어 일본 통감부 지배를 받던 대한제국은 어떤 조치를 취하지 못한 채 유야무야 되었다.  

 

일제가 패망하고 나서 광복하면서 한국의 땅이 됐다고 생각하지만 일본의 생각은 다르다.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1951.9)은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위해 연합국과 일본이 맺은 평화 조약이다. 일본이 포기해야 할 영토에 독도가 포함되지 않는다라며 이것을 근거로 독도 영유권을 포기하지 않는다.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한 조선에 대한 모든 권리, 권한 청구권을 포기한다"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제2조

 

회담 당시 독도 문제는 참가국들의 의제에 오르지도 않았고 결정된 바도 없다. 일본으로부터 침략당했지만 샌프란시스코에 초대받지 못한 나라는 한국, 중국, 러시아였다.

연합국 실무자들은 일본 영토에 어떤 섬들을 포함시켜야 하는지 고민을 하다가 선을 그어서 영토를 확정 지으려고 했다. 전쟁이 끝나고 냉전시대로 접어들면서 일본은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거점이 되어 버린다. 

때문에 일본 영토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사라져 버렸다. 1947년 한국은 미군정하에 있었고 아무런 발언권도 없는 이제 막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힘없는 국가였다.

 

일본은 냉전시대 시작과 공산주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는 시대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기회로 삼고 연합국을 상대로 외교 전술을 교묘히 활용한다.

일본의 부속 도서들(1947. 6)은 일본이 자국 영토로 주장하는 섬들에 대해 일본 외무성이 제작한 홍보 자료가 있다. 홍보자료에는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 영토에 편입시켜 주장하고 있다. 일본의 관심사는 울릉도와 독도였다. 일본 영토로 인정받고 싶은 섬 목록에 울릉도와 독도를 편입시킨 것이다. 

일본은 독도를 죽도(竹島), 다케시마라고 부른다. 다케시마라고 부르는 이유는 대나무와 물고기가 풍부해서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독도에는 대나무가 없다.

 

"(독도)는 한국식 이름이 없고 한국 지도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일본의 부속 도서들

 

거짓되고 왜곡된 정보가 일본 외무성에 의해 만들어져서 연합군 최고 사령부를 거쳐서 미 국무부, 호주 정부, 영국 등 연합국 정부에 배포된다. 이것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체결할 때도 미 국무부 지리 전문가들이 활용하는 참고 자료가 된다. 

패전 직후 일본 외무성 인원은 3천 명 정도였고 영토확보를 위해 전력투구했다. 반면 대한민국은 정부 수립 직전이어서 외무부 인원은 160명이었다.

1947~1949년까지 샌프란시스코 조약 초안에는 한국령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당시 맥아더 사령부의 미 국무부 주일 정치고문, 연합국 최고사령부 외교국장이었던 윌리엄 시볼드(1901~1980)는 미 국무부에 전문을 보낸다.

 

"독도(다케시마)에 대한 재고를 요청합니다(미 국무부가 만든 대일평화조약 초안에 독도가 한국령으로 표시)

이 섬에 대한 일본의 주장은 오래된 것이고 타당성이 있다

기상관측기지나 레이더를 설치할 수 있어 안보에 유리하다"

-미국 정부에 보낸 시볼드의 보고서(1949.11.14)

 

윌리엄 시볼드가 개입하고 난 후 일본령으로 변경된다. 여러 차례 바뀌게 되면서 최종 조약문에 빠진다.

시모다 다케소 당시 일본 외무성 조약국장은 글을 남겼다. 

 

"나는 윌리엄 시볼드의 사무실을 늦은 밤 비밀리에 수없이 방문해 

여러 차례 보고서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러한 자료가 충분히 전달돼 당연히 미국 측이 참고했을 것이다"

-<시모다 다케소 회고록 >(1984)

 

윌리엄 시볼드의 부인은 일본인이었다.

해군 장교로 일본에 어학장교로 파견되었다가 일본여성과 결혼했다. 윌리엄 시볼드는 진주만 공습(1941.12.7) 때 미국에 있었다. 

진주만 공습은 1941년 12월 7일 미국 진주만 기지를 일본 해군이 기습공격하여 미군 약 2,400명이 사망했다. 

 

뉴스를 듣고 윌리엄 시볼드부부는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아! 가여운 일본인들이여

전쟁의 참화에 근면 성실한 일본인들이 끌려 들어간다"

-<시볼드 회고록>(1965)

 

시볼드가 한국에 대해 언급했다.
"한국에 대한 나의 인상은 슬프고 억압받고 불행하고 가난하고 조용하며 음울한 민족이다"

-<시볼드 회고록> (1965)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주류세력은 일본에 우호적이었다. 일본에 매료된 미국 관료들이 대일정책을 만든다.

 

 

1951년 영국 외무성이 만든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부속지도에는 독도가 한국령임으로 분명히 하고 있다. 

영국 외무성이 대일평화조약 초안을 만들고 그 부속지도로 만든 것이다.

영국정부가 이 시점에서 독도가 한국령이라고 인식한 것은 명백하다.

 

1947년 한국은 미군정시기였다. 남조선 과도정부가 만들어져서 남조선과도정부 민정장관은 안재홍이었다.

안재홍(1891~1965)은 독립운동가로 평생을 보냈다. 안재홍은 '독도학술조사단'을 파견한다. 

국사관 관장 신석호는 독도가 한국령이라는 증거를 확보하고 외무처 일본 과장 추인봉은 독도 영유권 해결 방법을 모색하고 문교부 편수사 이봉수는 지리 교과서에 실을 정확한 방위, 좌표, 지형을 파악하고 수산국 기술사 한기준은 일본 불법 점거 실상을 파악한다. 80여 명의 조선산악회 회원들, 서울대학교 교수들 대거 참여, 경상북도 도청 공무원, 경찰, 해양 경비대가 포함되어 있다. 안재홍의 전폭적인 지지와 후원에 의해 미군정 치하였지만 한국 행정부의 주력, 엘리트들을 중심으로 파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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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산악회 회원들은 역사학, 국어학, 사회과학, 동물학, 식물학, 광물학, 의학, 보도, 전기 통신 분야의 최고의 전문가로 구성되어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독도조사단이었다. 식민지 시대부터 국토 수호에 앞장선 조선산악회는 일본으로부터 독도를 지켜낸 최초의 독도조사단이었다. 

최초로 서도 인근에서 강치 새끼 3마리를 잡았다. 해부해서 어떤 동물인지 연구했고 한국말로 강치이고 가제라고 썼다. 대만흰나비는 독도에 서식하는 나비를 발견한다. 한국에서만 자생하는 나비임을 증명했다.

조선산악회가 독도에 간 이유는 조선 울릉도 남면 독도, 울릉도독도 학술 조사대기념 표목을 세워 독도가 한국령임을 표시했다.(1947)

 

안재홍과 조선 산악회의 민관 합작 프로젝트로 독도를 조사한 후 서울, 대구, 부산, 울릉도로 이어진 독도 학술조사 보고 전람회를 열었다.  총관람객은 약 8만 5천 명이었다. 독도와 울릉도의 가치 한국령으로 인식한 첫 번째 계기가 되었다. 

 

1948년 6월 8일 의문의 폭격 사건이 발생한다. 독도 상공에 나타난 20대의 B-29 폭격기는 무차별 폭격을 했다. 고기잡이를 하던 어민들은 포탄에 맞아 숨졌고 어부가 타고 온 어선을 바닷속으로 침몰했다.

"독도 폭격으로 어민 14명이 숨지고 어선 11척이 침몰했다"

-동아일보(1948. 6. 14) 

 

"독도 폭격 사건 피해 어민은 150여 명에 달한다"

-한국외대 독도연구회 (1995)

 

도쿄를 불바다로 만든 B-29 폭격기가 독도에 450Kg 포탄을 투하했다. 독도를 폭격 연습장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독도를 미군의 폭격 연습장으로 지정한다"
연합국 최고사령부 지령 SCAPIN 1778호 (1947. 9.16)

오키나와 공군기지에 주둔하고 있던 미15공군 비행단이 독도에 폭격훈련을 했고 한국어부들의 피해가 발생했다. 훈련 2주 전 어민들에게 접근 금지 명령이 원칙이었지만 금지 명령은 시마네현 인근 일본 어민들에게만 통보가 되었다.

 

독도 폭격 훈련 피해자는 한국인이었고 주한미군 사령부가 맥아더 사령관에게 공식 항의했다. 주한미군이 진상 조사를 했고 민간인들이 죽거나 다쳤기 때문에 관련된 비행사들에 대해 군법재판에 회부하려고 했지만 무산됐다. 피해를 입은 한국 어민들에게는 실제 배상을 했다. 910만 원 정도를 요청했지만 실제 배상금은 630만 원정도였다. 미군은 우리 정부에 사과했고 독도 폭격 훈련은 중단되었다. 

어떠한 이유로 독도가 폭격 연습장이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고 우리가 풀어야 할 또 하나의 과제가 된다. 한국인들은 독도 폭격 후 피해자를 위한 위로금을 모아 전달했다. 언론들은 이 사건으로 독도의 중요성을 보도하게 됐고 전 국민들의 독도에 대한 인식이 제고되었다. 

 

 

1948년 제헌헌법 제정 당시 독도 문제가 논의됐다. 국회의원들이 논의 과정에서 독도 문제는 굉장히 중요하고 외적의 침략, 침범에 대비한 대책으로 국유로 해야 된다는 논의가 있었고 조항이 통과되었다.

"광물, 수산자원, 기타 중요한 지하자원, 수력과 경제상 이용할 수 있는 자연력은 국유로 한다"

-제헌헌법 제84조

제헌헌법에 독도 수호의지가 담겨있다.

1950년 정부가 독도 폭격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독도 조난 어민 위령비를 세웠다. 이런 모든 과정이 일본 신문에는 실리지 않았고 관심도 없고 항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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