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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혼. 분식을 장려하던 시대

by 소시민스토리 2024.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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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 분식을 장려하던 시대

쌀이 귀했던 시절 연일 방송에서는 혼. 분식을 장려하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지난번 가뭄으로 벼농사에 타격이 있었고 쌀 수출은 더 많이 해야 하는 형편에 있어 정부에서는 국민에게 절미운동을 권하면서 한편으로는 식생활 개선을 위해 분식을 적극 장려하고 있습니다."

-혼. 분식 장려 방송 

 

식량난 해결을 위해 쌀 소비를 줄여야 했던 시절, 100% 쌀밥 대신 보리 '혼식'을 권했다. 

"보리 혼식은 쌀 3알에 보리 1알을 섞어 먹자는 것입니다"

-혼. 분식 장려방송 

 

보리의 장점을 최대한 강조하기도 한다

"보리가 쌀 보다 더 좋은 장점이 있어요, 즉 얼굴에 기미가 낀 여성들의 미용 효과에도 보리는 아주 좋다는 겁니다"

-혼. 분식 장려방송 

 

 

보리밥을 먹으면 애국자가 되던 시절이었다. 반면 쌀을 낭비하면 호되게 혼이 났다. 

 

"짐승의 먹이는 버릇 들이기 나름인데 강아지야 주는 대로 먹겠지만 이 집주인의 생각 좀 고쳐야겠습니다"

강아지에게 쌀밥을 먹이로 준다고 개주인을 비난한다.

 

 

혼.분식 장려 운동은 1960~1970년대 있었다. 학교에 도시락을 싸가지고 가면 보리쌀이 섞어져 있는지 선생님이 검사했다. 보리쌀을 섞지 않으면 선생님께 혼이 났기 때문에 보리쌀 비율이 많은 친구의 밥을 빌려서 도시락 위에 밥과 섞어서 검사를 받는다. 검사 끝나면 보리밥은 다시 주인에게 돌려준다. 미안하고 고마우면 계란말이 한 개를 고맙다고 주기도 했다. 잘 사는 집의 아이들은 보리쌀을 섞어서 도시락을 싸야 하니까 위에만 살포시 보리쌀을 섞어 났다가 검사 끝나고 나면 다른 친구에게 보리밥을 떠서 주는 친구도 있었다. 

 

쌀이라고 다 같은 쌀이 아니었다. 정부미가 있었고 소위 아키바리라는 일본산 쌀이 있었다. 정부미도 귀한 시절이었는데 정부미는 쌀이 힘이 없고 물렀다. 아키바리쌀은 색깔도 하얗고 쫄깃해서 있는 집 아이들만 먹을 수 있는 비싼 쌀이었다. 

깐깐한 선생님은 위에만 보리밥이 있는것을 알고 도시락을 뒤집어 검사하기도 했다. 보리쌀을 100% 밥을 하면 까만색 보리밥이 되었는데 꽁당보리밥이라고 놀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나마 도시락도 싸지 못해서 점심시간에 수돗가에 가서 물로 배를 채우는 학생도 많았다. 

 

"꼬꼬댁 꼬꼬 먼동이 튼다

복남이네 집에서 아침을 먹네

옹기종기 둘러앉아 꽁당 보리밥

꿀보다 더 맛 좋은 꽁당 보리밥

보리밥 먹은 사람 진짜 건강해"

-혼.분식 장려 노래 <꽁당 보리밥>

 

쌀밥보다 보리밥을 권했던 이유는 쌀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 후반까지 쌀만 주식으로 먹는 가정은 보기 드물었다. 굶는 아이들도 많았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베이비붐 세대가 되면서 인구는 늘어났지만 농업생산기반 시설이 부족했고 쌀 증량 기술도 부족해서 국민들이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쌀 양이 부족했다. 

 

 

식량문제 해결하고자 1969년  혼. 분식 장려 운동을 시작한다. 미국은 가난하여 식량난을 겪고 있던 한국에 밀가루 지원을 했다. 밀가루로 부족한 쌀을 대신해서 분식으로 식량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혼. 분식이 건강에 좋다고는 했지만 나라가 가난해서 쌀이 부족해서 식량난을 해결하고자 하는 방편이었다. 

※혼식(混食)은 쌀과 잡곡을 섞어 먹는 것이다.

※분식(粉食)은 밀가루 음식을 먹는 것이다.

 

1969년부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은 쌀을 먹지 않는 날로 정했다.

분식의 날 (무미일 無米日)은 매주 수요일, 토요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쌀 음식 판매를 금지했다. 식당에서는 이 날은 쌀 음식을 판매할 수 없고 밀가루로 만든 국수, 수제비 등을 판매해야 했다. 설렁탕에도 일정양의 밀가루 음식을 사용하도록 했다. 요즘 설렁탕, 국밥 등에 국수가 말아 나오는데 분식의 날( 무미일 無米日) 때문에 생긴것이다. 분식의 날 (무미일 無米日) 밥을 몰래 팔다가 사복을 입고 단속하러 다니던 요원에게 

걸리면 최단 1개월에서 최장 6개월까지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다. 가게를 신고한 사람에게는 거액의 포상금 5,000원을 주었다. 1970년대 자장면 한 그릇이 60원이었다. 요즘 식당에 쌀밥을 담는 규격화된 그릇(공깃밥)이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막걸리, 증류식 소주 등 쌀을 이용한 술 제조도 금지했다. 

 

 

혼.분식을 장려하기 위해 혼. 분식 장점을 어마어마하게 부각하고 쌀이 인체에 안 좋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홍보를 한다. 보리는 쌀보다 칼슘 2배, 철분 10배, 인 2배가 들어있다는 둥, 흰쌀 편식은 체질의 산성화를 초래한다고 하는 둥하면서  혼. 분식을 권장하였다.

캠페인을 널리 알리기 위해 당시 인기 코메디언 구봉서, 서영춘 등 스타들이 혼. 분식 홍보를 하기도 했다. 극장에서는 혼. 분식을 장려하는 대한 뉘우스가 반영됐고 신문에도 분식을 장려하는 기사가 실렸다. 

 

 

"애국하는 마음으로 혼.분식을 합시다!"

"분식을 주식으로 쌀밥을 부식으로!"

-당시 공익 광고 

 

 

당시 주부들은 쌀로 요리를 하다가 갑자기 밀가루로 요리를 하라고 하니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국가가 나선다. 행정기관이 주부 대상으로 식생활 개선을 위한 혼. 분식 특별 요리 강습  '요리 강습회'를 주최한다.

식빵, 비스켓, 서양식 과자 등을 만드는 법을 배웠다. 

재건국민운동본부에서 식생활 센터에 분식상담소를 차려서 매일 두 번 강습을 진행했다. 분식 활성화를 위해서 아침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분식에 대한 각종 상담을 했다. 1973년에는 식생활 개선운동으로 '전국주부경진대회'를 열어서 밥 짓고 빵, 국수를 얼마나 잘하는지 콘테스트를 했다. 

이런 와중에도 주부들은 식구들의 생일날에는 꼭 흰쌀밥과 미역국을 해준다. 하얀 흰쌀밥이 그만큼 귀하던 시절이었다.

 

혼. 분식 장려 운동으로 라면이 급성장했다. 쌀 소비를 억제하면서 1965년부터 라면의 선풍적인 인기가 시작된다. 1967년 커피, 홍차는 35원이었다. 그때 라면값은 10원이었다. 저가정책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한끼를 해결할 수 있어서 국민 음식으로 발돋움했다. 당시 라면을 생산하던 삼양식품이 그야말로 대기업 반열에 올라섰다. 

1970년대 말 통일미가 개발된다. 통일미는 저렴하고 작황이 좋아 쌀 자급자족이 가능해지면서 1977년 행정명령이 해제되고 1980년대 중반 이후  혼.분식 장려운동은 유명무실해지면서 정책은 폐지된다. 

이때부터 쌀을 주식으로 하던 식탁에 밀 음식도 주식으로 자리잡으면서 식생활은 서구화됐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다. 혼. 분식 장려운동으로 인해 빵, 라면 문화가 자리 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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