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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마침내 항복한 일왕

by 소시민스토리 2024.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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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항복한 일왕

소련은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 소식을 듣자마자 만주로 향해간다. 

 

소련군의 만주 등판

 

소련군의 만주 등판

소련군의 만주 등판 1945년 8월 초 미국은 원자폭탄 3개 분량 핵물질을 확보하고 있었다. 원자폭탄 리틀보이 핵물질 농축우라늄은 1개 분량이었지만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드는 농축우라늄 제조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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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정치적 목적으로 만주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 했다. 소련군의 목표는 일본이 항복하기 전에 만주지역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점령하고 일본 관동군을 섬멸해야 한다.  

일본군은 광활한 만주지형을 이용해서 최대한 지연방어와 종심방어를 하려고 한다. 종심방어는 최대한 많은 병력을 후방에 배치하는 것이다. 지연방어를 해서 소련군이 약화되면 반격의 기회를 노리겠다는 것이다. 

 

 

1945년 8월9일 새벽 소련 자바이칼전선군과 제1극동전선군 동시에 공격을 한다. 소련군은 신중하고 철저히 만주 공격 작전을 준비했고 관동군이 강할 것이라 예상을 했다. 자바이칼전선군이 내려오는 서쪽지역에 있는  다싱안링산맥은 평균 해발고도 1,800~1,900M으로 천연 장애물이다. 다싱안링산맥 인근 국경 지역에 일본군 요새가 구축되어 있었다. 

일본군 입장에서는 소련군이 사막을 건너 험준한 다싱안링산맥을 넘어서 올 것이라고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소련군이 접근할 것이라 예상되는 북동쪽 연해주 방면으로 병력을 집중시킨다. 

관동군은 종심방어로 후방에 병력을 더 많이 배치했다. 

 

하지만 소련은 일본군의 허를 찌른다. 소련군 주력은 자바이칼전선군이었고 예상 밖 공격으로 전략적 기습을 달성했다. 소련군은 광활한 만주지역에서 싸우는 각 부대의 독립적 대응을 위해 지휘관에게 주도권과 유연성을 부여했다. 지휘관이 즉각적 판단과 대응으로 공격 템포를 유지할 수 있게 한다. 계속해서 일본군을 기습공격을 성공시켜 일본군은 혼란에 빠지게 한다. 일본 요새 지역은 우회로를 탐색해서 일본군을 당황하게 하는 진격을 한다. 

 

 

일본군은 소련군의 1파의 공격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한다. 일본군 지휘관은 절망한다. 소련군이 우회하고 종심 깊이 진출하고 후방을 공격하자 우왕좌왕하면서 마비에 빠진다. 

소련군은 하루 30Km이상을 전진한다. 일주일간 피해 수치는 일본군은 2만 명 이상 전사하고 약 60만 명이 포로가 된다. 

진격하는 소련군 뒤에 고립돼 있던 일본군은 제대로 저항도 못 한 채 항복한다. 소련군은 관동군 포위섬멸했고 만주를 점령해서 목표를 달성했다. 소련군은 1945년 8월15일 일본 항복 이후에도 전투는 지속된다. 

 

8월 11일부터 소련군 제1극동전선군 25군은 북한 지역에 진출한다. 해군과 합동작전을 하면서 옹기, 나진 청진 나남을 점령해 나간다. 8월 21일 북한 원산을 상륙해서 점령한다. 8월 24일~25일 소련 공수부대는 북한 평양, 함흥에 투입된다. 한반도 북부지역을 점령했고 한반도 분단의 불씨가 된다. 

 

소련군의 군기는 문제가 많았다. 4년간의 치열한 독소전쟁을 마치고 독일땅에 진격했을 때 독일에게 당한 것을 철저하게 복수하라고 소련정부는 조장했다. 전쟁이 끝난 후 점령지에서 나타나는 군기 문제는 보급 문제와 관련 있다. 보급이 안 되면 약탈을 하게 된다. 만주 공격 이후 북한에 소련군이 들어왔을 당시 약탈을 자행했다. 심지어 압록강 수풍댐의 발전기를 뜯어갔다. 소련댐의 발전기와 맞지 않았다. 공장 기계 설비도 많이 떼어갔다. 오직 심했으면 소련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은 주민 약탈하다 걸리면 즉결처분하겠다고 포고문까지 발표한다.

 

독소전을 마치고 만주로 이동한 소련군 부대들은 독일땅에 들어간 동려들은 독일땅에서 술먹고 놀면서 승리를 만끽하고 있을 텐데 자신들만 사막을 가로질러 산맥을 넘어 전투 중인 것에 억하심정으로 독이 올랐다. 만주에서 수많은 전쟁범죄를 터트린다. 1945년 8월 14일 만주 게겐먀오(갈근묘)사건이 벌어진다. 해방군이라는 이름으로 만주에 입성한 소련군과 만주로 이주해 온 일본인들에게 억압당하고 무시당하며 살던 중국인들이 합세하여 일본인들에게 집단 학살을 가한다.

 

일본 남성들은 전쟁에 동원되고 마을에 남아있던 일본 여성과 아이들 1,800여 명의 민간인에게 소련군은 집단 성범죄와 학살을 자행한다. 이 소문이 퍼지면서 소련군이 남하하자 일본인들은 집단 자살을 한다. 살기 위해 주변의 중국인 남성에게 급히 결혼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하얼빈, 창춘,선양 등 곳곳에서 약탈을 일삼았다. 

 

소련군은 참전결정을 할 때 약속 받은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일본 항복 선언은 아랑곳하지 않고 진격한다. 

한반도 38선까지 내려왔지만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에서 공세를 지속한다. 러일전쟁 승리로 사할린섬 남부를 일본이 점령하고 있었다. 남사할린 주둔  일본군은 88사단 병력 약 16,000명이 지키고 있었다. 여기에 소련군은 제2극동전선군 소련 제16군을 투입한다. 1945년 8월 11일부터 소련군은 남사할린 공격을 시작한다. 8월 15일까지 항복 이후에도 일본군이 저항하자 소련군은 공세를 지속해 남사할린을 점령한다. 

 

캄차카 반도에서 홋카이도까지 이어지는 쿠릴열도는 당시에 러.일 합의로 쿠릴열도 전체가 일본이 점유하고 있었다. 쿠릴열도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평양으로 나가는 길목으로 요충지다. 스탈린은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는 일념이 강했다. 쿠릴열도 약 56개 섬을 소련군은 병력을 투입해서 공격한다. 일본군도 전쟁에서 패하더라도 넘겨줄 수 없는 중요한 땅이라고 생각해서 많은 병력을 배치해 놓았다.

 

쿠릴열도 주둔 일본군 89사단, 91사단으로 총 병력 약 8만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섬을 호핑(건너뛰기)을 하며 하나하나씩 장악해 나간다. 가장 큰 전투가 벌어진 곳은 캄차카반도 앞에 있는 슘슈섬이다. 소련군은 1945년 8월 18일 슘슈섬에 상륙한다. 소련군이 상륙하여 항복을 요구하자 무력 침공으로 간주하고 일본군 수비대는 항복을 거부했다. 일본군 저항으로 점령이 지연되자 소련군은 더 적극적으로 공세를 펴서 쿠릴열도 전체를 소련이 점령했다. 

 

1945년 이후 소련(러시아)이 남쿠릴열도 4개 섬을 지배중이다. 홋카이도와 가까운 구나시리, 에토로후, 시코탄, 하보마이 남쿠릴열도 4개의 섬은 전통적으로 일본이 점령했던 섬이다.

일본은 지금까지 '북방 4개 섬'을 반환요구하고 있다. 쿠릴열도는 러시아와 일본의 첨예한 영토 분쟁 지역으로 남아있다.  

 

1945년 8월 9일 일본

일본은 소련군 만주 공격에 비상회의를 소집한다. 8월6일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되고 난 후 소련군이 만주를 공격개시하자 더 이상 희망은 사라진다. 

비로소 전쟁을 끝내자하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히로히토 일왕은 히로시마 원폭 투하 소식에 대경실색한다. 

전쟁을 그만하고 싶어했다. 군부 내 계전파는 8월 9일 원폭 투하된 날,  첫 번째 회의 최고전쟁지도회의가를 열었다. 당시 일본 총리 스즈키 칸타로는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말한다. 계전파는 항복 조건을 내건다. 전범 재판은 일본이 한다, 무장해제도 일본군이 실시한다, 연합국의 일본 점령을 금지한다(최소한 도쿄는 제외), 일본군이 무장해제를 하더라도 소규모 병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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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가 길어지고 있었는데 회의 중에 나가사키 원폭 투하 소식을 듣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화평파는 일왕제 유지로 항복하자는 것이었고 계전파는 모든 조건을 수용해야 항복할 수 있다며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두 번째 내각회의를 하게 되지만 팽팽한 의견 차이가 되풀이된다.

결국 주사위는 왕에게 넘어갔다. 유일한 해결 방법은 일왕의 결단 뿐이었다. 

 

세 번째 긴급 어전회의가 소집된다. 어전회의 소집은 육군참모총장과 군령부총장 서명이 필요했다.  일본 내각 서기관장 사코미즈 히사츠네가 미리 받아둔 서명으로 어전회의가 소집된다. 미리 짜고 친 것이다. 

1945년 8월 9일 23시 50분 회의가 시작된다. 일왕은 앉아있고 두 시간 동안 논쟁을 벌인다. 그러다 돌연히 스즈키 총리가 일왕 앞으로 가서 "왕께서 의견을 표명해 줄 것을 원합니다, 포츠담선언을 수락할 것인지 군부 의견을 수용할 것인지 결정을 내려주십시오"라고 한다.

일왕은 바들바들 떨면서 대답했다. "외무대신이 윤곽을 잡은 기초에 근거해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일왕의 발언 후 회의 참석자 11명은 동의 서명을 한다. 일왕의 법적 지위 인정 조건을 전제하에 포츠담선언을 수락한다는 결정을 내린다. 

 

일왕이 항복 결정을 내린 이후에도 국내에서 의견 대립이 해결되지 못하고 있었다. 계전파는 전쟁을 지속할 이유를 여전히 찾고 있었다. 1945년 8월 12일 자정에 연합군은 일본이 보낸 항복 선언문에 대한 응답문을 발송한다. 연합국 <응답문>의 내용은 '항복하는 순간부터 일왕과 정부의 통치 권한은 연합군 최고사령관에 종속된다, 일본의 최종적인 통치 형태는 국민이 자유롭게 표명하는 의사에 따라 결정한다'였다.

응답문을 본 외무성은 최대한 희망적으로 해석해서 일왕에게 보고한다. 

 

하지만 군부는 일왕제를 없애는 것이라며 강경하게 반대한다. 일부에서는 쿠데타 시도까지 한다. 전쟁을 끝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1945년 8월 13일 일부 육군성 장교들이 육군대신 아나미 고레치카를 찾아와서 쿠데타에 동참하도록 요구했다. 

겁이 난 아나미는 육군 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를 만나서 다음날 결정하겠다고 대답한다. 

1945년 8월 14일 오전 아나미와 우메즈가 만난다. 아나미는 쿠데타는 반대하고 조건없는 항복도 반대한다고 한다. 하지만 일왕은 마음을 굳혔다. 1945년 8월14일 13시 00분에 어전회의를 소집한다.

 

일왕은 연합국 응답문을 수용하고 필요하면 직접 국민에게 발표하겠다고 말한다. 일왕은 항복 방송 녹음을 결정한다. 1945년 8월 14일 23시 30분 일본 궁내성에서 녹음을 한다. 일왕은 종전선언문 항복 방송을 녹음한다. 같은 시간 쿠데타 '궁성사건'이 발발한다. 궁내성으로 쳐들어가서 항복 방송 녹음을 마친 일본방송협회 녹음반원이 감금된다. 쿠데타 세력 목표는 항복 방송을 막기 위한 녹음본 탈취였다. 그날 쿠데타 동참을 거부한 근위사단장을 사살한다. 궁내성을 점령하고 전화선을 절단시키면서 항복 방송을 막으려고 한다. 

 

1945년 8월 15일 05시 00분에 쿠데타 진압을 위한 일본 동부군이 투입되었다.

항복 방송 녹음본을 찾지 못해 탈취에는 실패한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녹음본을 복사해 따로 보관하고 있었다.  아나미 고레치카 육군대신은 자결한다. 계획이 실패하자 쿠데타 주모자 대부분은 자결을 한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왕이 녹음한 '항복 방송'이 송출된다. 

 

<항복 방송 내용 中>

"일찍이 미국과 영국 두 나라에 선전포고한 까닭도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시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며 타국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략하는 행위는 본래 짐의 뜻이 아니다"

침략에 대한 인정과 반성은 전혀 없다. 일왕은 평화주의자라고 주장하며 항복방송으로  일왕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원자폭탄 투하와 소련 만주 진격은 일본 군부가 더는 버틸 수 없게 한 요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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