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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일왕이 처벌되지 않는 도쿄재판

by 소시민스토리 2024.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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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왕이 처벌되지 않는 도쿄재판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며 파죽지세로 동아시아를 전쟁 속에 몰아넣었던 일본 제국은 포츠담선언을 통해 보내온 연합국의 마지막 항복권고에도 요지부동한다. 1945년 8월 일본 본토에 가해진 원자폭탄 투하로 비로소 전쟁이 종결됐다. 1946년 5월 침략 전쟁 범죄자 처벌을 위해 도쿄재판이 열렸다. 당시 수상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전범 28명이 기소된다. 그러나 기소명단에는 전쟁 내내 불렸던 하나의 이름, 일본의 절대적인 주권자이며 절대적 통치자 일왕 '쇼와 히로히토' 이름은 없었다. 일황은 처벌받지 않는다. 

 

도쿄 재판이 열린 곳은 침략전쟁에 필요한 장교 등용문이었던 육군사관학교였다. 역설적이게도 육군사관학교에서 도쿄 재판이 치뤄진다. 도쿄재판에서는 영어 일본어가 동시 통역된다. 

일본 총리대신 4명, 외무대신 3명, 군 출신 19명이 기소된다. 하지만 침략 전쟁의 핵심 인물 히로히토 일왕이 제외됐다. 

 

 

천황은 하늘 천天, 임금 황皇으로 '하늘의 임금'이라는 뜻이다. 일본 헌법 제1조에 천황은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규정되어 있다. 

일본 국민이 신처럼 떠받든 천황은 전쟁 후 1946년 1월 천황은 '인간 선언'을 한다. 

※인간선언은 패전 이후 미군정기에 들어서며 쇼화 히로히토가 천황의 신격을 부정한 선언이다. 

그만큼 일본인들은 천황을 신처럼 생각했다.

 

일왕은 정치적 실권은 형식적으로 가지고 있을 뿐 상징적 의미로 최고 존엄의 위치에 있다. 일황의 국사 행위는 내각의 조언과 승인이 필요하다. 황실 경제법에 황족의 생활비용이 규정되어 있어 내정비로 연간 3억 2,400만 엔 정도(한화 약 35억 정도)를 받는다. 

천황이라 부르면 우상화, 존칭의 느낌이 있어 수평적 느낌이 드는 일왕이라 부르기도 한다. 1998년 한국 정부에서는 '천황'호칭(고유명사) 사용을 공식적으로 명시했다. 천황은 왕보다 높다는 봉건적 인식 때문에 일왕이라 부르기도 한다. 천황제는 일본의 국가체제이며 문화로 받아들인다.

 

일왕은 정치적 개입없이 국가와 국민을 통합하는 상징이다. 일제 강점기를 포함 근대에서는 일본 천왕은 일본 그 자체였다. 1889년 일본은 대일본제국 헌법을 만들었고 제1조는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이 통치한다'였다. 제11조 '천황은 육해군을 통수한다'라고 되어 있다. 천황은 유일한 주권자이며 절대적 통치권자, 육해군 통수권자가 되었다. 수많은 연구 자료에서 전쟁 전부터 전쟁에 깊숙이 개입되어 개전, 종전단계에서 내각과 긴밀히 협의하며  천황의 승인 하에 선포하는 자료가 다수 존재하고 있다. 

 

"천황은 중대사에 관해 결정할 때는 끊임없이 나에게 주의를 환기 시켰습니다

폐하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주의를 준 때는 쇼와 16년 12월 1일이었습니다"

-도조 히데끼 진술서 中

천황의 전쟁 개입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물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난징 대학살은 천황이 개입되어 있다. 

모든 사단장 이상은 실질적으로 천황에게 직례(直隸)를 한다는 표현을 쓴다. 

※직례(直隸)는 직접 예속하다, 천황의 명령을 직접 받는다는 뜻이다. 

난징 대학살은 군이 개입하고 있다. 난징대학살 책임을 물어 난징 일본군 총사령관 마쓰이 이와네가 교수형에 처해진다. 마쓰이 이와네의 직속상관은 천황이다.

 

명백한 증거에도 전범 재판에 천황은 기소되지 않았다. 도쿄 재판의 재판장은 호주 출신의 윌리엄 웹이었고 천황 기소 면제에 반대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일본군은 호주 북쪽 뉴기니섬까지 침공했다. 미국은 거리상 멀어 상대적으로 일본 공습 위험이 적었다. 호주는 일본군이 코앞까지 닥치며 일제 침략의 위험 속에 있었다. 따라서 호주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고조되어 있었다. 연합국 중 중국은 미국 영향을 받아 천황 소추를 양보하지만 호주는 마지막까지 천황 기소를 주장했다. 

 

천왕이 처벌받지 않은 이유 

1944년 4월 일본 고위 관계자가 황족에게 편지를 보낸다. 

 

"마침 도조가 히틀러와 더불어 세계의 증오를 받고 있으므로 그에게 모든 책임을 지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도조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면 어느 정도는 그쪽(천황, 황실)의 책임을 완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943년 과달카날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은 패전은 필시상황이라 판단하고 1944년 4월 사이판전투가 벌어진다. 사이판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 편지가 보내졌다고 확인된다. 사이판이 만약 무너지게 되면 미국 B-29 폭격기가 일본 본토를 폭격할 수 있는 항속거리가 확보될 수 있다. 당시 일본지배층은 패전이 확실시된다고 판단하고 패전 수순을 논의하고 있었다. 황족의 편지로 보아 치밀한 논의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이판 만세절벽은 사이판 전투에서 패전한 뒤 일본군과 일본 민간인이 자살을 감행한 장소이다. 

1944년에는 조선 청년 징용, 일본군 위안부 등 조선인을 전쟁터로 강제동원하던 시기였다. 

일본에서는 병사들을 자살 특공대 가미카제까지 감행하면서 '일억국민총옥쇄'라고 외치며 전쟁의 광기를 보여주고 있던 태평양전쟁 말기였다. 

옥쇄(玉砕)는 천황을 위해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지다, 일제가 국민을 침략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사용한 구호다.

일본인은 전쟁으로 인해 사망자 수는 민간인 포함 약 310만 명이었다. 310만 명 중 1944년 4월 11일부터 1945년 패전까지 일본인 사망자 수가 가장 많았다. 

일본 국민 입장에서는 천왕이 곧 일본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전쟁에서 진다는 두려움보다 천왕이 사라질까 봐 더 두려워해서 천황제 폐지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도조 히데끼는 육사 출신 정치가로  육군대신 겸  수상직을 겸한다. 도조 히데끼가 수상이었을 때 진주만을 공격하여 아시아태평양 전쟁을 시작했다. 역대 총리 중 권력이 가장 강했던 인물이었다. 

도조 히데끼는 도쿄 전법 재판에서 말한다.

 

"국책의 모든 책임은 내각 및 통수부를 보좌하고 보필하는 책임자에게 있고 천황폐하는 어떠한 책임도 없습니다" -도조 히데끼

한 번만 주장한 것이 아니라 틈만 나면 계속해서 천황은 책임이 없다는 것을 주장했다. 

 

다음 날 이런 말을 한다.

"천황의 의사에 반하여 진언을 한 사례가 있습니까?"

라고 전범 '기도 고이치' 변호인 윌리엄 로건이 질문한다.

"그런 사례는 전혀 없습니다. 일본국 식민이 천황폐하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전쟁은 천황의 책임이라고 인정하는 대답을 한다. 천황 책임을 계속 방어하던 와중에 말실수를 한 것이다. 

헌법에 명시된 대로 천황 의사에 반할 수 없는 일본 제국 식민이다 

'천황 의사에 반하지 못한다'라는 도조 히데끼의 진술로 천황을 기소하지 않으려 하는 미국 관계자들과 변호인들은 패닉에 빠진다. 

재판 결과를 뒤집을 만한 결정적인 진술이 된다. 

 

6일 뒤 재판이 열렸다.

당시 미 수석 검사 조셉 키넌은 "전쟁을 한 것은 히로히토 천황의 의사가 아니었습니까?"라고 도조 히데끼에게 질문한다.

"동의를 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평화를 사랑하는 폐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희망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폐하의 조칙에는 이런 말이 들어 있습니다. '이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지만 내 의사에 반하는 것이다'라고요"

다시 천황을 두둔하고 있다. 도조의 이전 발언으로 긴장한 관계자들이 검사장을 시켜 천황이 책임이 없다는 것을 유도한 답변이었다. 미국은 천황을 처벌하는 것을 여러 가지 정치적 이유로 원치 않았다. 미국이 주도한 도쿄재판의 한계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당시 일본 국민들 사이에도 천황에게 전쟁 책임이 있다는 입장이 존재했다. 패전 직후 천황 처벌을 원했던 일본 국민들의 편지가 있다. 

 

"헌법에는 통치의 대권은 엄히 천황폐하가 장악하시고 있다. 선전포고도 강화체결도 폐하가 하시도록 되어있다. 게다가 폐하는 대원수이시다. 천황폐하에게 전쟁 책임이 없다는 것은 불합리도 너무 심하지 않은가, 이래서는 천황의 대권을 부정하는 것이 되며 헌법 위반이며 천황의 숭엄함도 없어지니 헌법도 휴지 조각에 불과하다" 

천황 책임을 묻는 것은 일본 전체 여론은 아니지만 상식적으로 판단을 하는 일본 국민도 존재했다. 

1948년 천황퇴위에 대해 찬반여론 조사를 한 적이 있다. 퇴위 반대 68.5%, 황태자 양위 18.4%, 천황제 폐지 4%로 나왔다. 천황제 유지를 일본 국민은 지지하고 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의 옥음(천황의 목소리) 방송을 한다. 

"충성스럽고 선량한 너희 신하와 백성에게 고한다...

타국의 주권을 배제하고 영토를 침탈하는 것은 

애초부터 짐의 뜻이 아니었다....

게다가 적은 새로이 

잔학할 폭탄을 사용하여

번번히 무고한 사람들을 살상하는 ...

상해를 벌이는 등 

진실로 예측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전쟁을 계속 한다는 건

마침내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인류 문명을 

파괴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짐이 제국 정부로 하여금

공동선언에 응하도록 한 까닭이다"

 

딱딱한 문어체와 어려운 한자로 이뤄진 옥음방송을 들은 일본인조차 어려워서 무슨 말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 당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은 사람이 다수였다. 일본인 다수는 천황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감격하는 사람도 있었다. 옥음 방송을 통해 천황의 목소리를 처음 접한 일본인이 대부분이었다. 

옥음방송에는 전쟁 항복 선언을 말하지는 않았다.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국, 영국, 중국, 소련 4개국에 대하여 그 공동선언(포츠담선언)을 수락할 뜻을 통보하게 하였다"라고 했고 항복 선언은 하지 않았다. -대동아전쟁종결조서(옥음방송)中1945년 8월 14일 

 

일본 언론은 천황의 책임 회피에 부응한다. 천왕이 종전 선언을 할 때 눈물짓던 일본인 사진은 조작되었다. 패전에 우는 소년 사진은 사진기사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증언했다. 가미카제 대원 출격 전 웃는 사진도 조작된 사진이다. 상징, 조작을 통해 천황에 대한 미화 작업을 한다.

옥음방송과 언론의 협력으로 군국주의자에서 평화주의자로 모습이 바뀌었다. 천황을 평화주의자로 변화시키기 위해 치밀하게 작업했다.

 

천황이 처벌받지 않을 수 있도록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은 더글라스 맥아더 사령관이다.

1945년 재판 전 맥아더와 만나서 신변을 위탁한 천황이었다. 

1945년 9월 22일 천황과 맥아더가 만나기 전 이미 미국 정부가 맥아더에게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천황을 전쟁범죄자로 기소하는 어떠한 행동도 특별한 지시 없이는 행동하지 말 것"이라고 했다.

천황의 평화주의자 변신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은 일본을 통치해야 하는 입장에서 천황을 처벌 시 일본 국민 동요를 의식했다. 미국이 천황제를 지켜줬다는 생각이 강해 일본은 미국의 원폭투하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호의적이다.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맥아더가 해임되어 일본을 떠나게 됐을 때 일본인 수십만 명이 맥아더에게 감사하다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1946년 맥아더는 아이젠하워에게 전보를 보낸다. 천황을 처벌하면 일본인들의 동요가 심해져서 최소 백만 명의 병력이 추가로 필요할 것이라는 전보를 보냈다. 1946년 1월 재판 열리기 전 맥아더는 천황 소추를 포기했다. 세균전 부대 731부대 사령관 이시이 시로는 불기소된다. 731부대 생체실험 보고서의 정보는 15만~20만 엔에 입수하면서 인류를 위한 의학 발전으로 은폐했다. 도쿄재판은 미국에 의해 기획되고 연출된 정치적 재판이었다.

 

당시 큰 피해자였던 중국 총통 장제스는 국공내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공산주의 억제를 위해 천황 소추에 반대한다. 한국은 식민지국가였기 때문에 전쟁의 죄를 묻는 재판에 참여할 수 없었다.

뉘른베르크재판, 도쿄재판 모두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범죄자 처벌을 위한 재판이었다. 미국 입장에서 일본 제국의 한반도와 조선인은 모두 일제 구성원으로 가해국의 일원이었다. 오히려 전쟁 재판의 대상으로 조선인이 BC급 전범 재판에 기소되었다. 전쟁 피해국이 아닌 공범자로 전락했다. 

 

도쿄 재판은 아시아가 빠져 있었다. 중국이 참여하기 했지만 국공내전으로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했고

일본의 전쟁 범죄와 침략 전쟁의 본질을 규탄할 아시아 국가의 자리는 없었다. 미국과 영국이 주도한 서구 중심 재판이었다. 

 

1946년 5월~1948년 11월까지 2년 반에 걸쳐 진행된 도쿄재판에서 침략 전쟁을 결정하고 수행한 죄와 반인륜범죄를 묻는 재판에서 전범 용의자들을 "나는 모든 혐의를 부정합니다, 나는 무죄입니다"라고 외친다.

잔혹행위는 전쟁 중에 일어난 우발적 사건이며 아시아태평양전쟁은 미국의 침략에 대응한 자위전(自衛戰)이었으며 아시아에서 공산주의 확산 방지가 목적이었다고 주장한다.

일본은 미. 영의 적 소련을 이용해 반공으로 환심을 유도하려는 포석을 깔고 있는 주장이다. 

라다비노드 팔은 도쿄 재판 인도 대표 판사이며 일본인 전범 무죄를 주장했다. 야스쿠니 신사에 기념비도 마련되어 있다. 

 

 

미국이 판을 짠 도쿄 재판은 도조 히데끼를 비롯해서 7명이 사형, 16명이 무기금고형, 2명은 유기금고형을 선고받고 A급 전범 외에 BC급 전범 재판 중 984명이 사형 선고를 받는다. 도쿄 재판 11명의 판사는 모두 연합국과 관련되어 있어 일본 보수 측에서는 지금까지도 승전국이 주도한 불공평한 재판이라고 주장한다. 

일본이 곧 천황이며 천황이 처벌받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은 전쟁 책임이 없다는 인식을 가진다.

전쟁 후 일본을 다스리던 미 군정은 중국에서 국공내전, 한국전쟁이 심화된 틈을 타서 전범을 석방 면죄해 준다. 1957년 만주국관계자 전범인 아베 총리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가 총리에 취임한다. 

A급 전범들이 나중에 정계로 진출한다. 공식적으로 '전범'이라는 단어가 삭제된다. 1952년 5월 미군정에게 독립한 일본 정부는 도쿄 재판의 전범들의 공민권을 회복시켜 준다. 사면을 시켜주는 것이다. 사망 이유를 전범 처형에서 공무사(公務死)로 변경한다. 군인은 연금을 보장해 주고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면서 도쿄재판의 판결은 수용하지만 전범, 처형에서는 사면을 했기 때문에 일본은 전범이 없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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