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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1945년 8월 운명의 날

by 소시민스토리 2024.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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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운명의 날

B-29 에놀라게이는 연료 약 26,500리터(7,000갤런)와 원자폭탄 리틀보이 4~5톤을 탑재하고 최대 중량 15,000파운드(6,800Kg) 초과한 채 이륙한다. 1545년 8월 6일 05시 22분에 에놀라게이는 이오지마 상공에 도착했다. 이오지마 상공에서 2대의 B-29와 합류한다. 1 대는 관측. 촬영용, 1대는 폭발력 측정용으로 과학자들이 타고 있었다.  

B-29를 호위하는 2대의 P--51머스탱이 따라붙는다. 07시 10분 에놀라게이는 순항을 하다 햄샌드위치로 아침을 먹는다. 

히로시마, 고쿠라, 나가사키에 먼저 날아간 정찰용 B-29는 기상상태를 확인한다. 07시 30분 맨해튼 프로젝트 무기 책임자 윌리엄 S. 파슨스 대령이 폭탄 창에 들어가 리틀보이 기폭장치와 신관을 장착한다.

정찰용 B-29로부터 08시15분 히로시마 기상 관측 보고가 전해진다. 다른 두 후보지보다 히로시마가 훨씬 기상상태가 양호하다는 것이었다. 원폭투하는 히로시마로 결정된다. 

 

히로시마 라디오 방송에서는 B-29가 기상관측을 위해 나타났을 때 공습경보를 발령했다. 

에놀라게이 승무원들은 요격 대비 방탄복을 착용했다. 하지만 대공 포탄이나 요격기는 없었다. 

일본은 1~3대 비행기가 날라오자 관측기 일거라 생각했고 대규모 폭격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전 1~2대의 B-29 정찰형 F-13, 기상관측형 WB-29 출격은 종종 있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 히로시마 시민들은 에놀라게이를 보고 반짝반짝하며 예쁘다고 감탄했다. 파란 하늘에 은빛이 날아가니 신기해서 쳐다봤다. 호위기 P-51 머스탱은 작전 공간을 주기 위해서 빠진다. 

 

 

리틀보이에는 메시지와 서명이 적혀있었다. 그중에 하나에 "인디애나폴리스 병사들이 일왕에게 인사를 보낸다"라고 쓰여져 있었다.

1945년 8월 6일 08시 15분 4톤짜리 리틀보이를 투하한다. 4톤짜리가 빠져나가고 에놀라게이는 기체가 가벼워지면서 경로 선회 후 급강하해 현장을 빠져나간다. 

약 9,470m 고도에서 리틀보이는 투하됐고 600m 상공에 도달하여 기폭장치가 작동된다. 08시16분 02초에 리틀보이는 폭발했고 항공기에서 투하된 지 43초 후였다. 

 

 

히로시마는 엄청난 구름에 휩싸였고 모든 것은 순식간에 고온으로 증발해 버렸다. 

폭발 장면 확인을 위해 에놀라게이는 기수를 돌린다. 탑승 승무원들은 폭발 광경을 목격한다. 

에놀라게이 기장 폴 티베츠 대령은 "우리는 방금 역사상 처음으로 원자폭탄을 투하했습니다"라고 말한다.

에놀라게이가 현장을 빠져 나가는 동안에 에놀라게이 꼬리 사수 조지 '밥' 캐런은 오랫동안 히로시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계속 사진을 찍고 인터폰으로 상황보고를 한다. 기록을 맡은 B-29 카메라는 사진 촬영이 안 돼서 캐런이 찍은 사진이 히로시마 원폭의 유일한 스틸 기록이 된다. 박물관에 기증되어 아카이브 보존 중이다. 관측용 B-29에서 촬영한 영상도 존재하지만 휴대용 16mm 카메라로 촬영해 화질이 나쁘다. 히로시마 원자폭탄 폭발 장면은 화질이 좋지 않다. 

 

히로시만 직경 1.8Km 지역이 폭풍으로 초토화되었고 직경 3.2Km 지역을 불덩어리가 휩쓸었다. 고열로 인해 거의 모든 물체가 증발해버렸다. 히로시마 원폭 폭발 순간에 3,000~4,000도의 고열이 발생했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일본 정부는 심상치 않다는 것을 감지하고 다음날 일본 원폭 개발 총책임자 니시나 요시오 물리학자를 히로시마에 급파한다. 원자 폭탄이 맞는지 확인, 조사하고 원폭이 맞다고 보고한다. 일본 수뇌부는 원폭 투하 사실을 하루 만에 확인하게 된다. 

일본 수뇌부는 판단 착오를 일으킨다. 일본 군령부총장 도요다 소에무는 개전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미국이 원자폭탄을 만든것을 알겠지만 많이는 없을 것이며 기껏해야 1~2개 있을 것이므로 계속해서 전쟁을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일본 육군 대신 아나미 고레치카는 원폭 투하 사실 자체를 부정한다. 일본 육군의 주장은 원폭인지 아닌지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언론 통제를 하고 있었다. 

미국이 히로시마에 신형 폭탄을 투하했다고 발표한다.

 

1945년 8월 9일 두 번째 원자폭탄이 투하된다. 소련이 만주 침공을 개시한 날이다. 찰스 스위니 소령이 조종하는 B-29 복스카에 내폭형 플로토늄 폭탄 팻맨을 탑재하고 티니안에서 출발한다. 

최우선 목표는 나가사키가 아니었다. 투하 목표는 일본 육군 조병창이 있던 고쿠라였다. 1차 목표는 고쿠라였고 기상 악화 시 2차 목표는 나가사키였다. 고쿠라에서 나가사키는 약 160km 떨어져 있다.

반드시 육안으로 확인 후 투하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제1차 목표 고쿠라 상공에 도착해보니 날씨가 안 좋고 공장 연기가 자욱했다. 야하타 제철소가 고쿠라와 인접해 있다. 전날 제21폭격기사령부 르메이의 B-29들이 

야하타 제철소를 폭격했고 연기가 다음날까지 피어 오르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래도 폭격을 하려고 시도하는데 일본군 대공포 공격이 시작되고 일본 요격기가 출격한다. 

전략적으로 주요한 목표인 고쿠라에 약 한 시간 동안 3번이나 고쿠라 상공을 선회하면서 폭탄 투하를 시도한다. 야하타 제철소 방어를 위해 대거 설치되어 있었던 대공 포대가 대공포를 쏘아 대기 시작한다. 통신감청으로 일본 요격기 출격을 확인하고 목표를 변경한다. 

 

 

나가사키로 향한다. 나가사키에 도착하니 구름이 덮여 있었고 연료는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순간 갈라진 구름 사이로 하늘이 열린다. 투하 목표지점은 아니지만 육안으로 조준. 투하 가능했다. 1945년 8월 9일 11시 02분 나가사키 원자폭탄 팻맨을 투하한다. 나가사키 상공 1,650피트 (약 500m)에서 폭발한다. 나가사키는 히로시마와 같은 운명이 된다. 

나가사키의 원자폭탄은 주거지역이 가까운 곳에서 폭발한다. 언덕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에 떨어졌다. 원자폭탄의 폭발력이 언덕에 막혀버린다. 

히로시마는 약 6만 명이 원폭 직후 사망하였고 나가사키는 약 3만 5천~4만명이 사망했다.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

일본은 식민지로 삼거나 점령했던 지역들에서 일본 공장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 포함 식민지 노동자들이 많았다. 일본에서 유학하고 있던 학생들도 많았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 조선인, 중국인, 대만인 등 강제 징용자들이 원폭 피해를 당한다. 고종의 손자 의친왕의 차남이며 고종의 손자 이우 왕자가 피폭을 당하여 사망한다. 나가사키  형무소에는 조선의 독립 운동가가 수감되어 있었다. 일본 메이지시대 5대 감옥 중 하나로 악명이 높았다. 나가사키 형무소의 출장소 우라카미 지소가 펫맨이 떨어진 폭심지와 불과 100~300m 거리에 있었다. 우라카미 지소 수감자 81명 포함 총 130여 명 사망한다. 수감자 81명 중 조선인 13명, 중국인 32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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