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잡학지식

원자폭탄 투하 직전 비사

by 소시민스토리 2024. 4. 22.
반응형

원자폭탄 투하 직전 비사

1945년 7월 26일 포츠담선언으로 '즉각적인 항복 선언'을 하라는 최후통첩을 받은 일본 수뇌부의  

반응은 실망이었다. 일본은 일왕제 유지 보장을 기대했지만 포츠담선언에서는 언급이 없었다. 

 

일본을 향한 최후통첩, 포츠담 선언

 

일본을 향한 최후통첩, 포츠담 선언

일본을 향한 최후통첩, 포츠담 선언 포츠담회담은 이전 회담과는 달리 2명의 정상이 바뀌었다. 1945년 7월 17일 ~8월 2일까지 열리고 있던 포츠담 중간에 열린 총선으로 영국 총리가 처칠에서 애틀

bringbacon.tistory.com

 

화평파 입장에서는 일왕제 유지가 보장됐다면 일왕을 항복하도록 설득할 수 있었다. 일왕제 유지 보장 문구가 없자 일본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는 일왕을 찾아가서 포츠담선언은 내용이 애매모호하니 기다려보자고 한다. 일본 외무성은 포츠담선언에 무대응 하기로 결정한다. 

포츠담선언의 정부 발표도 하지 않고 최대한 아무 행동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일본 내 포츠담선언 내용이 유포되고 있었다. 공식적인 정부 발표는 하지 않고 언론을 통해서 포츠담선언은 미국, 중국, 영국이 꾸민 모략이며 아무 대응도 하지 않겠다고 보도한다.

 

일본 정부의 노코멘트 대응에 반발하는 세력이 등장한다. 계전파 군부 3인방 육군대신 아나미 고레치카, 육군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 군령부총장 도요다 소에무였다. 

계전파 군부 3인방이 무대응을 반대한 이유는 정부의 무대응은 일본군 사기를 저하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포츠담선언에 대한 비난 성명을 강력히 제안한다. 계전파 기세에 눌려 스즈키 총리는 기자회견을 한다.

1945년 7월28일 기자회견에서 "포츠담회담은 카이로회담의 재탕에 불과하고 나는 포츠담선언에 대해 묵살하겠다. 일본은 끝까지 전쟁에 매진하겠다"라고 발표한다. 묵살이라는 용어가 논란이 된다.

스즈키 발언의 묵살 (默殺) 은 (모쿠사츠)이며 노코멘트를 의미했다. 모크사츠는 거부의 뜻이 아니었다.  

※묵살(默殺)은 의견이나 제안 따위를 듣고도 못 들은 척함

 

모쿠사츠의 뉘앙스 차이에서 오해가 비롯된다. 일반적 의미의 '묵살'과 '노코멘트'는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 외교관계에서는 '용어' 하나에도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일본의 포츠담선언 '거부'로 전 세계에 보도된다. 일본 수뇌부는 잘못된 해석으로 인한 오역을 바로 잡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언론보도가 오해임을 알고 있었다. 미국은 감청을 통해 일본의 논의 과정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잘못된 해석임을 알면서도 '거부'로 발표한다. '일본의 거부'는 원폭 투하의 명분이 되었고 포츠담선언은 일본에 대한 최후통첩의 역할을 하게 된다. 

 

'모쿠사츠' 단어의 오역은 원자폭탄 투하로 이어진다. 오역을 이용해서 미국은 원폭투하의 명분으로 삼았다. 

1945년 포츠담회담 중 발표된 포츠담선언에서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일본은 '항복'이 아닌 '종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종전'이란 용어에 일본의 속내가 담겨져 있다. 절대 항복하지 않았다는 것은 패전하지 않았다는 의미를 보여주고 싶어한다. 일본의 표현은 전쟁에서 지지 않았으며 전쟁의 가해 책임을 '종전'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회피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일본.독일의 항복 선언일과 각국의 승전기념일의 날짜가 다르다. 유럽승전일은 독일이 항복 문서에 서명한 1945년 5월 8일이다. 미국 대일 승전일은 일본이 항복문서에 조인한 1945년 9월 2일이다. 유럽 대일 승전일은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1945년 8월 15일이다. 승전일 기준은 항복선언과 항복문서 조인이다. 

 

독일은 2차대전 종전일을 "0의 시간(Stunde Null)"이라 표현한다. 패전하고 항복한 날은 0(제로)에서 다시 시작하는 날이다는 뜻이다. 군국주의와 결별하고 새로운 독일을 시작한다. 과거 독일의 나치즘이 유럽과 전세계를 파괴한 것을 통렬하게 자기반성하는 표현이 '0의 시간' 이다.

하지만 일본은 '종전'이라는 표현을 고집한다. <조선총독부 종정기록>, <조선 종전의 기록> 등의 책 제목에서도 종전을 고집한다. 종전(終戰)은 싸움이 멈췄다는 의미만 존재한다. 종전 (終戰) 은 전쟁의 책임과 패전의 이유에 대한 자기성찰이 없다. 종전(終戰)은 일본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전쟁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용어로 사용된다. 

 

원자폭탄 투하 명령서 날짜

원자폭탄 투하 명령서 날짜는 1945년 7월25일이었다. 포츠담선언은 1945년 7월 26일이었다. 포츠담선언 하루 전날 이미 원폭 투하 명령을 내렸고 1945년 7월16일 트리니티 원폭 실험 성공 후 바로 결정되었다. 

미국은 소련이 참전하기 전에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겠다는 것이다. 원자폭탄 사용을 빨리 결정한 이유였다. 

전후 소련과의 공존을 생각한 루스벨트 전임 대통령 생각과는 전혀 다른 구상이었다.

 

레슬리 그로브스 맨해튼 프로젝트 책임자가 1945년 7월24일 원폭 투하 명령서 초안을 작성했다. 미 전쟁부 장관 헨리 스팀슨과 미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의 승인을 받아서 최종명령서가 완성된다. 

미 육군항공대 제8공군 사령관 칼 스파츠에게 투하 명령을 내린다. 칼 스파츠는 줄곧 유럽전선에 있다가 독일 항복 후 진급해서 태평양전역 미 전략공군사령관으로 태평양전선으로 이동했다. 

참모장은 커티스 르메이가 들어온다. 명령서에는 8월3일 이후에 날씨가 허락하는 대로 히로시마, 고쿠라, 나가사키, 니가타 중 한 곳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라고 명령한다. 

두 번째 원폭 폭탄 투하는 추가 승인 절차가 필요없다. 칼 스파츠 장군의 판단으로 팻맨을 언제, 어디에 투하할지 결정한다. 가능한 빨리 투하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8월3일 이내에 일본이 항복한다면 명령은 취소할 수 있었다. 일본이 항복을 하지 않는다면 원폭은 투하된다.

제509복합비행전대에 작전 실행 명령은 8월2일자로 내려진다. 

 

 

원자폭탄 사용에 대한 미군 수뇌부의 반대가 일부 있었다. 미 육.해군 최고사령관 참모총장 윌리엄 D. 리히는 반대했다. 오랜시간 루스벨트 대통령과 각별한 사이였다. 1899년 해군 임관 이후 1939년까지 일선에서 복무했다. 루스벨트는 1913~1920년까지 미 해군 차관보로 근무했다. 당시 미 해군 항법국에 근무하던 리히와 인연이 되었다. 1939년 8월 윌리엄 D. 리히는 미 해군참모총장을 지낸 후 현역 은퇴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하면서 루스벨트 대통령이 다시 측근으로 불러 1942년 7월 현역에 복귀한다.

 

 

군사자문으로 리히에게 루스벨트는 많이 의존한다. 중요한 결정은 대부분 리히와 상의한다. 

매일 아침마다 전황에 관해 의견은 나눈다. 리히는 원자폭탄 사용을 반대했다. 해상 봉쇄만으로 일본은 침몰할것이라 생각했고 도덕적 비난을 받을 수 있는 원자폭탄 사용에 비판적이었다.

당시 연합군 최고사령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도 원폭이 아니어도 일본은 패망한다며 반대했다.

미 육군항공대 사령관 헨리 아놀드도 전략폭격으로도 끝낼 수 있다며 원폭 투하를 반대한다.

 

 

원폭 투하에 대한 과학계의 찬반 논쟁

 

원자폭탄을 직접 개발한 과학자들은 죄의식을 느낀다. 미국 과학계 내 원자폭탄 사용 찬반 논란이 일었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한 인물 중 한명은 헝가리 출신 미국 과학자 레오 실라르드였다. 1930년 대 말 우라늄 핵분열 실험 성공 후 핵분열 에너지의 위력을 확인했다. 일부 과학자들이 핵분열 에너지를 무기로 쓸 수있는 가능성을 직감한다.

 

 

레오 실라르드는 1938년 미국으로 이주 후 독일과학자들의 핵무기 개발을 우려하여 미국이 빨리 개발해야 한다고 설득한다. 1939년 3월 천재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찾아가서 루스벨트에게 보낼 편지에 서명을 부탁했다. 아인슈타인이 사인을 한 실라르드의 편지로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하지만 일본 원자폭탄 투하 계획에는 반대했다. 원자폭탄 개발 초기에는 히틀러가 원자폭탄을 먼저 가지면 안된다는 마음으로 개발했지만 히틀러는 자살했고 독일의 항복으로 원자폭탄의 위협이 사라졌다. 

원자폭탄의 사용은 평화를 위협하는 것이며 국제사회는 미국과 소련의 양강 구도로 변화하고 있어 미국이 지금 핵폭탄을 사용한다면 소련도 개발을 할 것이고 걷잡을 수 없는 핵무장의 단계적 확대를 예견했다.

 

맨해튼 프로젝트 시카고 야금 연구소에서 플루토늄 생산 원자로 설계를 연구하고 있었다. 맨해튼 프로젝트 참여 과학자 70명의 서명을 받아 1945년 7월 실라르드 청원서를 낸다. 도덕적 책임을 고려해서 원자폭탄은 가급적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혹시 사용하게 된다면 실전에 사용하지 말고 일본에게 피해없이 위력을 보여주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일본이 항복할 기회를 줘야 한다. 피해가 적은 바다 위에 투하하여 효과를 증명하는 방안이 고려된다. 전후에도 과학자위원회를 창설해서 원폭 사용 결정에 과학자 참여 기회를 청원한다 등의 내용이었다. 

 

레오 실라르드는 미 국무장관 제임스 F. 번즈와 면담을 한다. 원자폭탄 위험성에 대해 열변을 토하자 번즈는 화를 낸다. 정치영역의 문제이며 정치가와 군인들이 결정할 일이라며 역정을 낸다. 레오 실라르드는 원자폭탄을 개발한 과학자들을 무시하는 것에 충격을 받았고 번즈는 과학자들이 정치 개입한다며 서로 기분이 상했다.

원자폭탄의 위험성을 이유로 사용을 반대한 과학자 세력이 있었고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 사용은 정치적인 영역이며 한 번은 써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얼마나 위력적인 무기인지를 확인을 해야 공포심을 갖고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고 생각한다. 1945년 6월 잠정 위원회 회의에서 대다수 과학자 의견으로 원자폭탄 한 번은 사용하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린다. 

 

원자폭탄 투하 결과를 과학자들이 가장 먼저 확인했다. 일본 항복 후 본토에 가장 먼저 들어간 사람은 과학자들이었다. 원자폭탄의 위력과 피해가 궁금했다. 1945년9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방문해 원자폭탄 피해 현황을 파악한다. 잔류 방사능을 측정한다. 핵폭발 후 방사성 낙진의 피해 범위를 파악했다. 미 방사석학자. 맨해튼 프로젝트 의료책임자 스태포드 L. 워랜이 피해 상황을 조사했다. 맨해튼 프로젝트 참여한 물리학자 필립 모리슨과 로버트 서버가 조사를 위해 일본을 방문했다. 로버트 서버는 씬맨, 팻맨 원자폭탄 이름을 착안한 사람이다. 방사선량 수치와 피해를 조사했다. 처참한 광경을 기록하지만 조사 당시 촬영 필름과 기록을 공개하지 않는다. 2020년 방영 다큐멘터리 <히로시마 75년 후>로 공개한다. 차마 볼 수 없는 당시의 참상들이 여과없이 방영된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