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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오키나와 지상전, 마에다 능선을 뚫어야 한다

by 소시민스토리 2024.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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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지상전, 마에다 능선을 뚫어야 한다

1945년 4월 말까지 일본군의 1차 방어선을 돌파했다. 하지만 미 육군 24군단은 엄청난 피해가 누적되었다. 남쪽으로 진격하려면 새로운 병력이 필요했다. 미 육군 제10군 사령관 '사이먼 B. 버크너'는 직접 미 1 해병사단을 투입한다. 미 육군 77사단이 투입된다. 그러면서 미 육군 96사단. 27사단은 전선 후방으로 배치된다. 

1 해병사단. 77사단. 7사단이 슈리성을 향해 진격한다. 일본군의 2차 방어선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오키나와 지상전 2단계 '하이라이트 전투'가 펼쳐진다. 

 

 

영화 <핵소고지>는 2017년 제89회 아카데미상 6개 부문 노미네이트에 올랐고 편집상, 음악 효과상을 수상했다. 배우 멜 깁슨이 영화감독을 맡았다. 쇠톱 능선으로 알려진 122m 높이의 마에다 절벽을 미군이 올라가서 점령해야 한다. 마에다 고지에는 중산시대에 지어진 성(그스크)우라소가 있었다. 직접 돌을 쌓아서 축조한 산성이 아니다. 자연적으로 생성된 절벽을 이용해 만들어진 산성이다. 마에다 절벽에 지어진 옛 산성에 일본군이 진지를 구축했다. 절벽이 톱니 모양의 가파른 절벽이어서 쇠톱 능선이라 부르기도 한다. 

 

오키나와 전투에 투입된 예비 부대로 훈련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병사들이 전투에 참여했다. 부대원들이 마에다 고지(핵소 고지 점령 과정)을 그린 영화다. 영화 <핵소고지> 실제 주인공 '데스몬드 도스 상병'이 많은 병사들을 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의 절반을 차지하는 도스 상병의 전선 투입 과정이 그려지면서 태평양전쟁 후반 미국 사회가 장기적인 전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볼 수 있다. 영화의 주요한 모티브, 집총 거부(양심적 병역 거부)는 하면서 자원 입대하는 모순을 보여준다. 집총거부로 인한 명령불복종으로 군법회의에 회부되기도 한다. 결국 의무병으로 참전해 많은 동료를 구한다. 오키나와 전투가 치열하고 참혹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다. 

실제 인물 '데스몬드 도스' 상병은 핵소고지 전투에서 50여 명이 넘는 병사를 구해 명예훈장이 수훈된다.

 

오키나와 지상전, 가카즈 능선 전투

 

오키나와 지상전, 가카즈 능선 전투

오키나와 지상전, 가카즈 능선 전투 1945년 4월 19일 시점에 미 육군 제24군단 사령관 '존 하지'는 1개 사단을 추가 투입한다. 27사단은 서쪽, 96사단은 중앙, 7사단은 동쪽으로 남쪽으로 해서 진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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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카즈 능선을 지나서 마에다 능선이 있다. 마에다 고지는 120m 정도 높이지만 경사가 가파른 절벽이었다.

1945년 4월 26일 우라소에 성 유적지를 따라 고지에 진입한다. 반대쪽 사면의 일본군이 반격해서 정면으로 반격을 제대로 할 수 없어 측면으로 경사가 낮은 길로 진격을 시도한다. 여기서도 일본군은 지뢰를 깔아 놓았으며 포격을 계속한다. 미군의 진격을 지지부진해진다. 이 상황에서 96사단이 후퇴하고 77사단이 4월 28일 교대하여 들어온다. 도스 상병은 77사단 소속이었다. 뉴욕시에서 징집한 병사들로 이뤄져 있어 77사단의 별칭은 '자유의 여신상 사단'이라 불렸다. 77사단 마크는 자유의 여신상이다. 

77사단은 마에다 고지를 넘으려고 시도한다. 일본군의 저항으로 앞서 96사단처럼 정면 돌파는 실패했다. 

전투 내내 항공기 지원도 받았지만 항공기 지원의 효율성이 떨어졌다. 당시에는 지상부대와 전투기 편대 사이 통신이 어려웠다. 아군 오폭 위험이 있어 근접 항공 지원이 쉽지 않았다.

 

 

일본군이 먼저 움직였다. 일본군은 정신적. 육체적 한계에 봉착했다. 미군은 계속해서 지원되고 있었고 일본군은 방어하는라 지쳐가고 있었다. 어차피 질 싸움이라 선택권도 많지 않았다. 일본 육군 제32군 고급 참모 '야하라 히로미치' 대좌는 계속적인 지연전을 주장했지만 제32군 참모장 '조 이사무' 중장은  총공격을 주장한다. 이에 사령관 '우시지마 미쓰루'는 동의한다. 5월 4일 일본군은 총반격을 시도한다.  동굴 진지에 숨겨왔던 야포도 공격에 필요한 지속적인 화력 지원을 위해 지상 진지로 이동시킨다.  동굴 진지에서 나와서 돌격 준비를 한다. 마에다 고지로 미군이 공격해 가자 일본군은 반격하기 위해 몰려나온다.

 

일본군은 해상 상륙작전을 시도한다. 거룻배에 모터를 단 상륙주정, 대발동정을 이용해 육상으로 공격을 하면서 병력을 해안으로 해서 적 후방에 침투시킨다. 결과는 처참했다. 마에다 고지를 점령하고 진격을 못하고 있던 미군 앞으로 진격한 일본군이 나타나는 순간 어마어마한 포격을 맞았고 상륙하려던 배도 금세 발각되어 격침당한다. 결과는 비참했다. 동굴 밖으로 이동한 포들도 사운드 레인징 관측 부대가 재빨리 위치를 탐지하여 전 군단 포병이 동원되어 공격한다. 그동안 하루에 한 두문 격파하기도 쉽지 않았던 포가 2일간 일본군 야포 40~50문이 격파된다. 일본군 1개 대대가 일부 전진에 성공했을 뿐이다. 하지만 다음날 미국의 역습으로 후퇴한다. 일본 육군 제32군 잔존병력의 약 60%가 단 하루 만에 전멸했다. 

 

병력을 잃은 일본군은 퇴각을 하면서 거동이 힘든 부상병은 수류탄으로 자폭을 지시한다. 상체를 움직일 수 있는 병사에게는 수류탄을 2개씩 주면서 1발은 미군이 오면 던지고 나머지는 자폭하라고 명령한다. 일본군 위생병들은 부상병들에게 '최후의 물'을 주고 간다. 물이 담긴 양동이에 청산가리를 풀어놓고 미군이 오면 마시고 죽어라고 했다. 퇴각 시 부상병들은 의무병이 남아 함께 항복하는 것이 인간적인 처사였지만 일본군 위생병들은 그러지 않았다. 일본군 부상병들은 울기 시작했다. 일부 위생병들은 양동이를 걷어차고 나온다. 

 

일본의 대반격으로 미군이 기회를 잡았다. 1945년 5월 11일 북오키나와 공세를 마무리했던 미 6 해병사단을 투입한다. 총 4개 사단으로 슈리성으로 진격한다. 일본군은 여전히 처절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미군이 마에다 고지를 넘고 일본군이 절반을 전사했음에도 많은 능선들에서는 일본군의 저항이 이어진다. 

슈가로프 능선에서는 10차례나 고지를 뺏고 뺏는 혈전이 반복된다. 1945년 5월 22일 미군은 슈리성 인근 능성 장악을 한다. 슈리성 코 앞에서 미군은 어마어마하게 내리는 비로 인해 멈춘다. 진흙탕으로 변해버린 이동로로 인해 차량도 힘들고 사람이 걷는 것도 힘들었다. 야전에서 취침해야 하는 병사들은 빗물 때문에 잠을 못 잔다. 거기에 시체나 오물 썩는 냄새는 진동했고 산발적인 일본군 포격에 병사들은 죽음의 공포까지 느끼면서 굉장히 고통스러운 상황에 빠진다. 

엄청난 화력을 쏟아부었지만 결국은 보병의 전투가 되었다. 기존 병력의 전투 손실률이 높아지다 보니 신병들의 비율은 높아졌고 전투력 유지가 쉽지 않았다. 오키나와 전투는 미군 전투 피로도와 비전투 손실률이 역대 사상 최고였다. 

 

미군의 진격은 지지부진했고 병사들의 피로도는 점점 한계에 부딪히자 사령관 사이먼 B. 버크너는 지나치게 신중하다는 비난을 받는다. 참모들과 예하 지휘관들은 불만을 표출했고 해군은 발끈한다. 기쿠스이 작전 일본군의 가미카제 공격으로 미 해군의 피해가 엄청나게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키나와 해역에 발이 묶여 적의 공격을 받아내기만 하던 미 해군은 분통을 터트린다. 

 

미 태평양 함대. 태평양 해역군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가 버크너를 직접 찾아간다. 작전 좀 빨리 끝내라고 독촉을 한다. 버크너는 여기는 육군작전 구역이며 육군 지휘관인 내가 알아서 하겠다며 응수한다. 

니미츠는 육군이 지지부진하는 동안 해군은 하루에 배 한 척 반씩 잃고 있다고 하면서 5일 이내로 전선을 움직이지 않으면 다른 사람 불러와서 움직이게 하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사령관 사이먼 B. 버크너는 자기 뜻을 굽히지 않는다. 이오지마 전투의 트라우마가 발목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산발적인 게릴라전이 계속되고 있던 이오지마에 해병대가 밀어붙였다가 큰 피해가 났고 저돌적인 공격으로 큰 피해가 나면 여론의 뒷감당을 할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한 명이라도 부하를 살리면서 천천히 진격하겠다는 것이다. 해군과 해병 입장에서는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니미츠와 버크너를 만나러 같이 갔던 미 해병대 사령관 '알렉산더 A. 밴더그리프트'는 1942년 8월~1943년 2월까지 미 제1해병사단 사령관으로 과달카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알렉산더 A. 밴더그리프트는  버크너의 말을 듣고 화를 내면서 역제안을 한다.

 

제2해병사단이 예비로 있으니 허락을 해준다면 일본군의 뒤통수를 돌아서 남쪽 해안의 미나토가로 상륙을 시키겠다고 제안한다. 보급이 어렵다며 버크너는 거부한다. 

밴더그리프트는 화가 엄청 치밀었고 워싱턴으로 날아가서 미 함대 총사령관. 미해군참모총장 '어니스트 킹'에게 말한다. 어니스트 킹은 부글부글 속이 끓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버크너는 승리의 결정적인 기회를 많이 놓친다. 슈가로프 고지 전투 당시 장마가 오기 전 밀어붙였다면 일본군 방어선이 뚫릴 수도 있었다. 5월 4일 총공세에서 일본군은 많은 전력을 소모했었다. 하지만 버크너는 지나치게 신중해서 결정적인 돌파 기회를 놓쳤다. 

슈리성 남쪽까지 포위망을 구축한 상태에서 비가 오는 와중에 미 제2해병사단이 남쪽에 상륙했다면 일본군이 슈리성을 빠져나가 방어진지를 구축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 전쟁은 5월에 끝날 수도 있었다는 평가도 있다. 사이먼 B. 버크너는 전선을 돌아다니면서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시켰다. 

 

 

슈리성은 14세기 무렵 창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1429년부터 450년 동안 류큐왕국의 중심이었다. 화재가 몇 차례 이어지고 소실된 후 방치되었다가 재건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1933년 슈리성의 정전이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일본군은 슈리성 지하 30m에 참호를 파고 일본군 총사령부를 만들었다. 미군의 집중 포격 대상이 되었다. 1945년 5월 27일 3일간의 포격으로 슈리성은 소실된다. 1989년 30년 만에 복원을 시작하여 2019년 1월 재건이 완성된다. 2019년 10월 대화재로 슈리성 주요 건물이 전소된다. 2026년을 목표로 슈리성 복원이 진행 중이다. 

 

 

미군은 슈리성을 향하여 약 20만 발의 포격을 한다. 슈리성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포격 시작 전 철수 결정을 하고 일본군 지휘부와 병력은 슈리성을 빠져나갔다. 슈리성에는 5천여 명의 일본군 잔존병력만 있었다. 

5천여 명은 집단 자살을 택한다. 자료에 따라 2,000~5,000여 명 일본군이 남아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부분은 거동이 힘든 부상병들이었다. 

1945년 5월 말 미군의 오키나와전투 지상전 1~2단계가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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