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민간인 피해가 컸던 지상전 3단계 작전
미군은 오키나와 전투 지상전 1,2단계를 끝내고 3단계를 시작한다.
슈리성이 위기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일본 육군 제32군 사령관 '우시지마 미쓰루'는 옥쇄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겠다며 슈리성을 빠져나간다. 5월 4일 총반격 실패 후 '야하라'가 작전을 주도한다.
슈리성에서 키얀반도로 철수를 한다. 일본군은 키얀반도 동굴에서 마지막 항전을 준비한다. 미군은 이런 일본군을 소탕해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1945년 5월 22일 일본군 키얀반도로 철수를 시작했고 장마가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일본군은 은폐를 하기 위해 민간인 복장을 하고 이동한다. 미군은 일본군 철수 징후를 파악하는 것이 늦었다. 6월 4일까지 일본군은 키얀반도로 철수 완료하고 재정비한다.
미군은 키얀반도와 오로쿠 반도의 일본군을 소탕해야 했다. 오로쿠 반도에는 기존의 5,000여 명의 일본 해군부대가 방어중이었다. 키얀반도에서는 일본 육군 32군이 최후의 방어선을 전개한다. 일본군과 미군은 키얀반도 천연 동굴지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민간인 피해가 가장 많이 발생한다.
민간인들도 남쪽으로 피난을 내려왔다. 민간인 대피가 안 된 상태에서 전투가 시작됐고 남쪽으로 미리 피난을 왔다. 민간인이 먼저 남쪽 자연 동굴에 은신하고 있었다. 그 동굴에 일본군도 들어왔고 동굴 속에 피난민과 군인들이 섞여 있었다. 미군의 소탕작전이 이루어지고 민간인들의 피해가 가장 컸다.
오키나와 전투 민간인 피해 규모
군인 전사자보다 민간인 사망자가 더 많았다. 일본은 2번의 류큐처분으로 류큐왕국을 일본 오키나아현으로 1879년 병합하고 난 후 다양한 황국신민화 정책을 시행했다. 1940년 표준어 장려를 이유로 오키나와어 사용을 금지했다. 오키나와어를 사용하면 벌칙 표찰을 착용해야 했다. 일본인으로 동화시키기 위해 의식을 주입했다. 오키나와전투 당시 현지인 부대 병력이 약 39,000명이 이었다. '철혈근황대'라고 해서 무기와 피로 일왕을 지킨다는 뜻으로 학생의용대를 만들었다. '히메유리 학도대'라고 해서 15~19세 여고생 약 240명을 간호조무사로 동원했다. 동원된 오키나와 젊은 학도들은 전투 마지막까지 방공호에 갇혀있다가 해산됐거나 방공호에서 참혹한 사건이 발생해 희생된다. 일본군과 민간인이 뒤섞여 포격 및 폭격으로 사망해서 민간이 피해가 커지는 원인이 됐다. 일본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미군에게 잡히면 엄청난 고통을 받는다는 세뇌교육을 시켰다.
치비치리 동굴에서 민간인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1945년 4월 2일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 다음날 치비치리 동굴로 약 140명의 주민이 피신했다. 그중에서 89명이 사망했다. 중국 전선을 경험한 재향군인과 중국전선에 동행한 종군간호사가 함께 피신했다. 동굴에서 일본군이 저지른 난징대학살을 이야기하면서 미군이 들어오면 우리를 어떻게 할지를 이야기한다. 악귀와 짐승 같은 영국과 미국을 향한 귀축영미에 대한 세뇌가 되어있었던 오키나와 주민들 중 중국에서의 경험을 들은 18살의 여학생이 어머니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한다.
어머니는 실천을 했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강제 집단사가 발생한다. 독약 주입과 방화 등으로 약 89명이 사망했고 12세 이하 사망자가 41명이었다.
동굴에서 살아남은 약 50명이 사건의 진실을 증언해서 세상에 알려진다.
치비치리 동굴에서 약 800m 떨어진 시무쿠 동굴에 주민 1,000여 명이 피신했다. 여기 피신했던 주민들은 다 살아남았다. 미국 하와이에서 온 당시 72세였던 주민 히가 헤이지, 당시 63세 히가 헤이조 두 사람이 있었다.
자신들은 미국을 가봤는데 미국인은 우리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는 말을 한다. 일본의 선전과는 다르다고 주민들을 설득했다. 결국 미군에게 투항해 주민 천여 명의 목숨을 구했다.
동굴에 들어간 일본군은 주민들을 포로로 만들지 않기 위해 직접 죽이기까지 했다. 민간인의 옷 속에 폭탄을 숨겨 미군에게 투항한다고 보내서 폭탄이 터지도록 하기도 했다. 민간인을 미군 공격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오키나와 사람들이 일왕에게 충성하기 위해 집단자결을 했다고 주장했으며 민간인을 죽인 것은 미군이라고 주장했다. 미군 포격으로 인한 민간이 피해도 존재했다. 미 해군은 대상 구분 없이 VT 신관이 탑재된 포탄을 사용했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군과 피난민이 섞인 동굴 안은 아비규환이었다.
오키나와 당시 항복을 권유하는 미군 전단지의 효과가 미미했던 이유들이었다.
오키나와 전투에 민간인은 4명 중 1명이 사망했다.
일본군은 남부로 피신하면서 민간인 복장을 했다. 일본군의 민간인 복장은 포격 및 폭격으로 인한 민간인 사망 원인이 되었다. 야하라 히로미치 대좌 일본 육군 제32군 고급 참모는 일본군들이 오키나와 현지인들에 대해 자행한 핍박과 무의미한 죽음 강요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야하라 히로미치가 주장한 오키나와전투 3단계, 오키나와 남부의 지구전으로 더 많은 민간인이 사망했다.
당시 일본군 지휘관들에게 민간인은 군사작전에 방해되는 존재였을 뿐이다.
야하라 히로미치 대좌 일본 육군 제32군 고급 참모는 전쟁에서 살아남았다.
오키나와전투 민간인 피해에 대한 일본 교과서의 왜곡이 이어진다.
1954년 7월 일본 자위대가 창설된다.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 내 치안유지를 위한 경찰예비대가 창설된다. 그러면서 일본 재무장 정당화를 위한 터 닦기 작업으로 교과서 왜곡을 시도했다.
1955년 체제 이후 제1여당으로 장기집권 중인 자유민주당은 보수적인 역사관과 일본 재무장을 강조한다. 당시 미국 또한 일본의 재무장을 원했다. 동아시아의 방위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일본의 자위대 확대를 요구한 것이다. 1956년 일본 문무성 '교과서 조사관 제도'를 신설했다. 문무성은 교과서 검정 주요 지침을 내린다.
태평양전쟁에 관해 일본에 불리한 점은 되도록 쓰지 않거나 완곡하게 표현할 것, 태평양전쟁이라는 용어 대신 '대동아전쟁'이라고 사용할 것을 지침으로 내린다.
대동아전쟁은 태평양전쟁을 합리화하는 용어이다.
1958년 일본 문무성은 학습지도 요령을 개정한다. 일본의 중국 침략은 대륙진출로 기술되기 시작하고 일본의 가해 표현은 사라진다. 1982년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이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1981년 교과서 검정에 일본군에 의한 주민 살해 문구 삭제를 요구한다. 하지만 오키나와 주민들의 반발로 무산된다.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는 재판으로 이어진다. 1997년 8월 29일 15년간의 재판 끝에 일본 최고재판소 판결은 '오키나와 주민 집단 자결은 일본군이 관여'를 인정했다. 2007년 교과서 검정에 일본군 명령. 강제 문구 삭제를 시도했다.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과의 갈등이 대두되었다. 주일미군 주둔 이후 끊이지 않고 미군 범죄 문제가 발생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반미 감정이 극대화되며 미군기지 반환을 요구한다.
주일미군 갈등과 역사 교과서 문제가 결합되면서 2007년 9월에 오키나와 주민 약 11만 명이 모인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일본 내에서도 오키나와 역사 교과서 논란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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