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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오키나와 전투의 끝, 사이먼 B. 버크너 전사

by 소시민스토리 2024.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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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전투의 끝, 사이먼 B. 버크너 전사

오키나와 전투는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미 육군 제10군 사령관 사이먼 B. 버크너가 전사한다.

1945년 6월 18일 오전 버크너 준장은 제8해병연대가 싸우던 키얀반도 이토만 전투 시찰을 나갔다가 사망한다. 제8해병연대는 해병 1사단 배속되어 싸우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사이판 주둔 해병 2사단 소속으로 버크너가 예비대로 차출해 직접 운용한 부대였다. 제8해병연대를 격려하기 위해 전투 현장을 방문한 것이다. 

버크너는 현장이 잘 보이는 제3대대 관측소로 이동했다. 헬멧에 장군을 인증하는 별 3개가 박혀있다.

참모들은 위험하다고 하며 아무 표식이 없는 헬멧으로 바꿔쓰게 한다. 하지만 일본군은 이미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일본군은 96식 15cm 곡사포 8발을 발사한다. 그중 1발은 관측소에 맞아 폭발했고 버크너 사령관은 파편에 맞아 10분 만에 전사했다. 2차 대전 기간 전사한 미군 지휘관 중 가장 계급이 높았다. 

 

 

 

후임자는 버크너 직속 부하였던 미 제3상륙군단장 '로이 가이거'가 된다. 버크너는 주변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 제3상륙군단장으로 절친이었던 로이 가이거를 임명했었다. 버크너는 전투 전부터 본인이 죽을 경우 로이 가이거가 후임 지휘관이 되게 해 달라는 이야기를 종종 했다. 니미츠에게도 전달했고 버크너가 죽고 나서 니미츠는 로이 가이거를 사령관으로 임명하게 된다. 1945년 6월 19일 중장 진급과 함께 사령관에 임명된다. 

해병대 장군 중 유일한 야전군(Field Army) 지휘관으로 남게 되었지만 임기는 길지 않았다. 

 

타라와 전투 이후 육군은 해병대 사령관의 지휘를 받지 않는다는 약속이 존재했다.

더글라스 맥아더 미 남서태평양지역군 사령관은 '조세프 스틸웰'을 미 육군 제10군 사령관으로 보내고 싶어 했다. 스틸웰이 오키나와로 오는 단 5일 동안 로이 가이거가 지휘했다. 

1945년 6월 23일 미 육군 제10군 3대 사령관 '조세프 스틸웰'이 오키나와 도착 후 사령관에 임명된다.

 

도착해 보니 전투는 이미 끝난 상황이었다. 로이 가이거가 5일 동안 본인 임기 기간 중에 오키나와 전투를 마무리 지어버렸다.

1945년 6월 21일 오키나와 가데나 공항에 성조기를 게양했다. 오키나와 점령을 선언해버렸다. 

1945년 6월 22일 일본 육군 제32군 사령관 '우시지마 미쓰루'는 자결을 했고 남아있던 일부 일본군과 오키나와 주민들은 집단 자결을 했다. 1945년 6월 30일 일본군 작전 소탕이 마무리된다.

 

로이 가이거가 일찍 승리의 깃발을 올려버린 이유는 친구이자 상관이었던 버크너가 쟁취한 승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1954년 7월 버크너는 사후 대장으로 진급했다.

로이 가이거는 1947년 폐암으로 사망했다. 로이 가이거는 해병대 영웅이자 발전에 기여한 인물이었다. 

가이거는 해병대 파일럿 출신으로 1,2차 세계대전 모두 네이비 크로스 훈장을 수여받은 2명 중 1명이었다.

해병대가 독자적인 항공대를 갖는데 큰 기여를 했고 오키나와 전투에서 비록 5일이지만 야전군을 지휘한 유일한 해병대 사령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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