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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미군 병사 집으로 가는 길, 점수제도와 마법 양탄자 작전

by 소시민스토리 2024.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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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병사 집으로 가는 길, 점수제도와 마법 양탄자 작전

1945년 4월 12일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이 사망했다. 1945년 4월 30일 독일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했다.

독일의 항복은 일본 전쟁 수행에 전혀 영향이 없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1945년 5월 13일 당시 일본 전 총리 겸 정치가 '고노에 후미마로'는 빨리 항복해야 한다고 히로히토 일왕 쇼와 덴노에게 상주문을 올린다. 일왕은 '아직도 우리에게는 미국에 일격을 가할 힘이 남아있다'라며 거부했다. 

 

일본 내부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일본 육군은 독일 패망으로 소련군 병력이 극동지역으로 더 이동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1945년 5월 일본 육군 추정 소련군 35개 사단이 만주-소련 국경선에 배치되어 있었다. 일본 육군 내 일부는 신속한 전쟁 종결을 주장했다.

 

1945년 4월 7일 스즈키 내각이 수립됐고 한달 후 5월 1일 본격적인 종전 논의가 이루어진다. 4월 30일 히틀러가 자살한 이후였다. 군부, 계전파의 눈치를 보던 화평파들은 심각성을 인식했고 군의 반대를 넘어서 종전, 항복을 준비해야 하며 일왕을 설득해야 했다. 일본 제42대 총리 '스즈키 칸타로'는 일본 제10대 내대신 '기도 고이치'에게 일왕에게 전쟁 종결을 설득하라고 한다. 소련과의 종전 협상을 본격적으로 추진한다. 

일본은 마음이 급했다. 1945년 4월 30일 히틀러가 사망하고 난 후 5월 8일 독일은 항복선언을 했기 때문이다. 

 

미군 태평양전선으로 이동 준비 

미군은 1945년 5월이 되기 전부터 유럽 전선의 병력은 태평양전선으로 병력 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1944년 9월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연합군과 독일군은 3개월 간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1944년 8월 팔레즈 포켓 전투에서 독일군은 연합군의 포위망에 갖춰 섬멸당하며 전선이 무너졌다. 독일국경으로 전면적인 퇴각을 하면서 전쟁의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한 미군 미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은 태평양으로 병력 이동 준비를 명령한다.

 

미군 육군은 부대를 4개 그룹으로 구분한다. 종전 후 유럽 안보를 지킬 주둔군, 태평양전선으로 재배치할 부대, 미국 철수 후 재정비해서 추후 태평양전선 투입 부대, 소집해제 후 해체할 부대로 분류하기 시작한다. 

1945년 5월 유럽전선이 종전되자 6월에 미군 병력 이동을 시작한다. 태평양전선에 미 육군 약 140만 명이 있었고 연말까지 100만 명을 증원할 계획을 세운다.  유럽전선에서 미 육군 약 300만 명이 있었고 1/3은 태평양 전선으로 차출한다. 

유럽전선에서 태평양전선으로 미 1군 사령부, 7군단,13군단이 이동한다. 미 육군 제1군 사령관은 코트니 호지스였다. 미 육군 제7군단 사령관은 J. 로턴 콜린스였다. 

 

 

코트니 호지스는 1904년 미국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했다가 1년 만에 기하학 낙제로 퇴교조치 당한다. 

1906년 병(兵)으로 육군에 입대한다. 1909년 장교임관 시험에 도전한다. 육사 동기들은 1909년 6월에 졸업하면서 장교임관이 되었고 호지스는 11월에 장교임관을 한다. 

장교임관 후 성실하게 군 복무를 한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투입된다. 당시 미 육군 제1군 사령관은 1911년 육군사관학교 입학한 '오마 브래들리'였다. 1904년에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던 코트니 호지스 보다 후배였지만 미 육군 제1군 부사령관으로 근무한다.  오마 브래들리가 1944년 8월 미 육군 제12집단군 사령관으로 영전하면서 후임으로 미 육군 제1군 사령관이 된다.  2차 대전 종전까지 유럽 전선에서 활약한다. 

 

 

 

미 육군 제7군단 사령관 J. 로턴 콜리스는 2차 대전 기간 대부분은 한 전선에만 경력을 쌓았는데 태평양전쟁과 유럽전선 양쪽 모두 무훈을 세웠다. 1941년 10월 하와이에서 편성된 미 육군 제25보병사단에 1942년 사단장으로 부임해서 과달카날, 뉴조지아 전역에서 미 육군이 열세에도 불구하고 선전했다. 

'번개 조 Lighting-Joe'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이때 당시 미 육군 제1군 사령관이었던 '오마 브래들리'는 J. 로턴 콜린스를 불러들인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앞두고 태평양처럼 상륙전을 많이 치러본 지휘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 육군 제25보병사단 최연소 사단장 (당시 46세)이었고 제7군단 사령관으로는 당시 군단장 중 가장 젊었다. 한국과도 인연이 있다. 1949~1953년 미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다. 1950~1953년 6.25 전쟁 기간 내내 미 육군의 수장이었다. 

 

미 육군 제3군 사령관 조지 S. 패튼은 태평양 전선 배치를 강력 희망했다. 유럽전선이 끝나자 미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에게 찾아가서 태평양전선 배치를 희망한다. 조지 마셜은 중국 정세를 핑계로 완곡하게 거절한다.

하지만 다른 이유가 있었다. 더글라스 맥아더와 조지 S. 패튼은 상극이었다. 두 사람을 같은 전구에 놓이면 의견 충돌이 일어날 것이 뻔했다. 적당한 핑계로 돌려보낸 것이다. 

 

미군 병사 집으로 가는 길, 점수제도와 마법 양탄자 작전  

유럽전선에서 독일군과 싸웠던 정예부대들이 태평양전선으로 오지 못한다. 길고 긴 전쟁이 끝나가자 오래 복무한 병사들은 집으로 가고 싶어 했다. 공평하게 제대 순서를 정하기 위한 점수제도가 있었다. 

1944년 9월 미 전쟁부(현재 국방부)에서 발표한다.  '포인트 시스템'을 도입했고 쌓인 점수에 따라서 85점 이상이 되면 제대시키겠다고 한다. 복무 1개월마다 1점, 해외복무(유럽전선, 태평양전선)는 2점, 훈장 1개당 5점을 준다. 18세 이하 부양 자녀 1명당 12점을 준다. 최대 3명까지 인정해 준다. 

 

주요 전투. 전역참가는 5점을 준다. 전투와 전역 구분이 쉬운 육군은 점수 주기가 쉬웠다. 해군은 기준이 모호했다. 함정단위로 싸우는 해군은 함정이 주요 전투에 참여하면 '배틀 스타'를 부여한다. 배틀스타를 받은 함정 승무원은 5점을 받는다. 미 함정 중에 배틀 스타를 가장 많이 받은 함정은 항모 엔터프라이즈였다. 

2차 대전 미해군 최고의 수훈함 USS 엔터프라이즈는 배틀스타 20개를 수여받았다. 

85점 이상이면 제대할 기회를 부여받는다. 포인트 제대점수를 먼저 쌓고 종전 후 점수 순서대로 제대했다. 

 

미국전쟁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Band of Brothers)' 마지막 편의 제목은 포인트(Points)이며 점수가 채워져 제대를 앞두고 들뜬 병사들과 점수 미달인 병사들이 남아 갈등과 사고를 일으키는 에피소드다. 

점수제도는 문제점을 가져온다. 유럽전선에서 태평양전선 부대로 재배치해야 하는데 점수 제도에 대한 불만이 속출하자 병력 셔플링(섞기)을 한다. 점수 높은 병사는 미국으로 복귀하거나 해체 예정 부대로 전출시킨다. 점수가 낮은 병사들은 태평양전선 투입 부대로 전출시킨다. 전입과 전출이 많으면 팀워크가 무너진다.  당시 분위기가 어수선하고 뒤숭숭했지만 점수 미달 병사들로 100만 명을 확보할 수 있었다. 

 

점수제도는 1945년 일본 항복 후에도 문제가 된다. 제대할 병사들이 수두룩해졌고 제대 점수를 기준 85점에서 50점으로 낮췄는데 제대한 병사가 너무 많아져 본국으로 수송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수송선이 유럽과 미국 수송선 상황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지만 태평양 전선은 거리가 멀어 배편이 부족했다. 그래서 필리핀에서 큰 문제가 생겼다. 1945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때 점수를 채우고도 집에 못 간 병사들이 적체되었고 출발 예정이던 수송선은 취소가 되었다. 미군 4,000명이 몇 달 동안 마닐라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유럽과 아시아 곳곳에서 시위가 일어나자 미 군부는 선박을 총동원, 항공모함, 전투함, 소형 선박까지 총동원해서 병사를 수송한다. 1945년 9월 ~12월까지 매달 평균 120만 명씩 제대했다.

대대적인 병사 수송작전의 이름은 '마법 양탄자(Operation Magic Carpet)'였다. 770여 척의 선박을 동원해 약 800만 명을 수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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