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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일본 열도 상륙작전 준비, 몰락작전

by 소시민스토리 2024.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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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열도 상륙작전 준비, 몰락작전

미군의 일본 열도 상륙작전은 '몰락작전(Operation Downfall)'이었다. 몰락작전의 기본내용은 1945년 11월 1일을 기해 미군 500만 명, 영국군 100만 명이 일본 본토에 상륙한다는 작전이다. 일본 점령 작전 기간은 최대 2년까지이며 필요하면 원자폭탄을 7발까지 투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몰락작전은 2단계의 하부작전으로 나뉜다. 올림픽 작전으로 1945년 11월 1일 규슈를 공격하고 코로넷작전은 1946년 3월 1일 혼슈를 공격하겠다는 단계가 있었다. 몰락작전의 1~2단계 소요 기간은 2년이 걸릴 수 있다.

올림픽작전, 규슈에 상륙하면서 미 육군 14개 사단 25만여 명, 미 해병대 9만 여 명 투입하고 항공모함 42척, 전함 24척, 400척 이상의 구축함, 상륙정 수천 척, 항공기 약 2,000대를 동원하는 작전이다.

 

 

올림픽 작전의 총지휘관은 맥아더였다. 코로넷작전, 일본 혼슈에 상륙하는데 미군 병력 72만여 명, 항공기 약 3,000대 투입하고 관동지방 2개 지점에 상륙해서 도쿄로 진격한다는 작전이다.  몰락작전 실행 시 사상자 예상 규모는 미군 예상 전사자 약 10만 명이며 약 100만 명의 부상자, 사상자 총 110만여 명으로 예상되었다.

미군으로서는 사상자에 대한 부담이 커진다. 그래서 원자폭탄 사용을 적극적으로 검토한다. 

 

미군 계획의 원자폭탄 완성기한은 1945년 8월 1일이었다. 1942년 초부터 원자폭탄 연구.개발하는 맨해튼 프로젝트가 한참 진행 중이었다. 1944년 12월부터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할 부대 준비를 한다. 제509 복합비행전대였다. 제509 복합비행전대는 B-29 폭격기 외 다른 수송기( C-47 스카이트레인, C-54 스카이마스터)도 배치되어 있어서 복합비행전대라고 불렀다. 미국 유타주 웬도버 육군 비행장에서 편성. 훈련을 하면서 원자폭탄이 완성 전이라서 모의 폭탄으로 투하 훈련을 한다. 

 

개발 중인 원자폭탄과 모양이 비슷한 호박폭탄(Pumpkin bomb)이었다. 호박폭탄을 싣고서 미 남서부 사막에서 B-29의 호박 폭탄 투하 훈련을 한다. 그사이 맨해튼 프로젝트의 관계자들이 마리아나 제도에 있던 미 제21폭격기사령부 사령관 커티스 르메이를 찾아간다. 1945년 2월 맨해튼 프로젝트 감독 기구 군사정책위원회 소속, 군사정책위원회 해군대표 윌리엄 R. 퍼넬 소장과 맨해튼 프로젝트 부사령관 토마스 파렐 준장이 르메이에게 신무기를 개발했으며 자리를 내달라고 말한다.

르메이는 티니안 노스필드 비행장에 자리를 내준다. 선발대가 투입돼서 준비를 했고 1945년 5월 훈련을 마친 제509 복합비행전대는 티니안으로 이동한다. 

 

 

1945년 5월 말 당시 미국의 목표위원회는 원자폭탄 투하 후보 도시 5곳을 선정했다. 고쿠라, 히로시마, 니가타, 도쿄, 요코하마, 교토였다. 미 목표위원회 위원장은 미 육군 공병대 소장 레슬리 그로브스였다. 1942년 9월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로 임명된다. 

 

총책임자는 미 전쟁부 장관 헨리 스팀슨이었다. 레슬리 그로브스는 미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를 1914년 낙방 후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에 입학해서 다니다가 다시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하여 공병장교에 임관한다. 1941년 전쟁부(현 국방부) 청사 건설 총책임자로 미 국방부 청사 펜타곤을 18개월 만에 완성한다. 

목표가 우선이고 달성을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1942년 9월 준장 진급 후 맨해튼 프로젝트 책임자로 임명된다. 

 

트루먼 대통령은 전쟁 마무리를 위해 루스벨트 내각 인물들을 그대로 기용한다. 대표적인 인물은 미 전쟁부장관 헨리 스팀슨이며 1945년 4월 13일 트루먼 대통령에게 어마어마한 무기를 개발중이라고 언질을 하고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1945년 4월 25일 트루먼에게 맨해튼 프로젝트 첫 보고를 한다. 그때 트루먼 대통령은 원자폭탄 위력을 알게 된다. 1945년 5월 1일 원자폭탄 사용에 대한 전문가 자문기관 잠정위원회가 설립된다. 그전에 1945년 4월 27일 레슬리 그로브스는 대통령도 모르게 표적위원회를 설립했다.

 

표적위원회는 원폭투하 후보 도시 17개를 선정한다. 후보지를 점점 압축해 나간다. 기준은 폭탄은 2발 이상 투하할 수 있어야 하고 첫발은 일본의 전쟁 의지를 꺾기 위해서 위력을 보여줘야 하고 두번째 폭탄은 '또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엄청난 효과를 보여줄 수 있는 인구가 많은 산업도시 약 100만 명이상의 인구가 살고 있어야 하고 폭탄 위력이 잘 발휘될 수 있는 장소여야 한다. 목표지역 지름 최소 3마일 (약 4.8Km) 이상이 되어야 한다. 폭탄을 투하할 때 레이다로 산업시설이 명확히 보이는 곳이어야 한다. 심리적 효과를 최대한 나타낼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모든 선정기준에 적합한 도시는 교토였다. 문화도시 교토는 똑똑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단순한 산업도시가 아닌 일본의 고도(古都)였다. 1945년 5월 28일 미 잠정위원회 회의에서 교토,히로시마,니가타 순으로 우선순위를 정한다. 교토는 헤이안 시대(794~1185년)부터 일왕이 머물던 수도였으나 메이지 시대(1868~1912년) 도쿄로 수도를 이전했다. 교토는 일본인의 자존심 같은 도시였다.

 

일왕의 거처가 있던 도쿄는 원폭 투하 후보지에서 제외되었다.  이전에 도쿄대공습으로 도쿄는 이미 파괴되었고 이전 공습의 여파로 큰 효과가 없을 것이다. 일왕이 살고 있는 도쿄를 파괴하여 일왕제를 건드렸을 때 일본 사회에 발생할 부작용을 우려했다. 

일본 왕궁은 B-29 폭격기가 폭격하지 않았다. 1945년 5월 25일 육군 참모본부 폭격 당시 불이 옮겨붙었던 적은 있지만 직접적인 폭격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교토는 원폭 투하의 후보지였다가 최종적으로 제외가 된다. 미 전쟁부 장관 헨리 스팀슨은 5월 31일 표적위원회 회의에서 레슬리 그로브스와 의견 충돌을 겪는다. 레슬리 그로브스는 맨해튼 프로젝트 책임자로서 원폭의 효과를 증명하고 싶었고 교토를 후보지로 생각하고 있었다. 헨리 스팀슨은 교토 투하를 반대한다. 이때 미 육군항공대 사령관 헨리 아놀드도 교토 투하를 찬성한다. 헨리 스팀슨은 미 제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을 찾아가서 교토를 제외하기 위해 직접 설득한다. 트루먼은 교토를 제외하라고 결정한다. 

 

1945년 7월 21일 트루먼과 포츠담회담에 참석한 스팀슨에게 그로브스의 보고서가 전달된다. 또 교토가 원폭 투하 후보지로 선정되어 있었다. 스팀슨은 화가 치밀었고 전쟁부 장관 권한으로 교토를 후보지에서 취소 시켜버린다. 1945년 7월 25일 교토를 대신해 나가사키가 후보지로 선정된다. 히로시마, 고쿠라, 니가타, 나가사키가 후보에 오른다. 이로서 교토는 후보지에서 제외됐다.

 

헨리 스팀슨은 교토를 제외했다. 스팀슨은 1927~1929년 필리핀 총독 당시 교토를 자주 방문했다. 1893년 스팀슨의 신혼여행지가 교토라는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도 있다. 일본 문화에 심취해 있고 문화재를 아끼는 사람이라 교토 원폭 투하를 반대했다고 추정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을 한 사람은 고고학자, 미술가 랭던 워너였다. 랭던 워너는 문화유산 보호를 위해 교토. 나라 등의 폭격을 반대했다. 

 

 

헨리 스팀슨이 정말 교토를 좋아했을까하는 의문은 남는다. 1942년 2월 진주만 공습 두 달 후 발령된 루스벨트의 행정명령으로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들 약 11만 명을 강제 수용소로 이주시킨다. 그 계획을 중심으로 이끌었던 스팀슨은 일본인의 인종적 특성을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일본인에 대한 강한 불신을 표출했다. 이런 일들로 추측해 보아 헨리 스팀슨의 교토 원폭 투하 반대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일본인의 마음속에 수도이며 정체성이라 생각하는 교토를 폭격했을 때 일본인에게 반미감정을 심어줄 수 있을 것이며 전쟁 수행의지를 불타오르게 할 수 있고 전쟁이 끝난 후 미군이 일본 통치 시 민심 통제에 도움이 안 될 것이다는 판단을 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일각에서는 유럽 전선의 상황이 영향을 끼쳤을거라는 의견도 있다. 1945년 5월 8일 독일 항복 이후 소련은 독일을 엄청나게 약탈하고 있었다. 공장설비를 다 뜯어가고 피해를 모면한 집까지 다 때려 부수고 불 지르고 독일 여성 200만 명 이상을 성범죄로 희생시켰다. 소련은 민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동부 독일인들이 미. 영 연합군 점령지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미국 지도자들과 헨리 스팀슨은 지역인들에게 민심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에게 너무 가혹한 처사를 해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라 추측하기도 한다. 

 

헨리 스팀슨은 1927~1929년까지 필리핀 총독을 지냈다. 1940~1945년 태평양전쟁 기간 내 미국 전쟁부 장관이었다. 귀족 가문 출신으로 미국의 명문 기숙학교 필립스 아카데미 앤도버 출신이며 1906년 뉴욕 남부 지방 검사로 임명된다. 1911년 미 전쟁부 장관에 임명된다. 1929~1933년 미 국무장관을 역임했다. 1924년 워싱턴 군축회의에 주도적 역할을 한다. 1933~1945년 민주당 출신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 1940년 미 전쟁부 장관에 임명된다. 2차 대전 내내 전쟁부 장관으로 재직했다. 전쟁 정책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47년 전쟁부가 국방부로 개편되어 육군.해군.공군을 총괄한다.

 

원자폭탄 투하 준비는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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