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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운명의 원자 폭탄, 오펜하이머

by 소시민스토리 2024.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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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원자 폭탄, 오펜하이머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 8월 9일 일본 나가사키에 3일 간격으로 원자 폭탄이 투하된다. 히로시마, 나가사키는 폐허가 된다. 

 

"우리는 과거로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나는 죽음이요, 세계의 파괴자가 되었다."

-오펜하이머

 

 

오펜하이머는 물리학자이면서 원자 폭탄을 만드는 일을 총 지휘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원자 폭탄의 아버지로 미국의 영웅이 됐지만 그 뒤에 감춰진 삶은 비극적이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은 대한민국의 역사에 원자 폭탄 개발은 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오펜하이머 사망 당시(1967년 2월 20일) 국내 일간지에 보도됐을 정도로 한국인에게 관심을 받았다. 

 

 

 

영화 <오펜하이머>는 2023년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에 의해 만들어졌다. 

미국은 인류 최초로 원자 폭탄을 만들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1939년 시작되어 1945년에 끝났다.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 의해 발발한 전쟁으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이자 최악의 전쟁으로 평가받는다. 1939년 독일 과학자들은 우라늄이 분열되는 현상을 발견했다. 일반적으로 원자는 쪼개지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는데 원자가 쪼개지는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원자가 분열되면서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나오는 현상을 발견했다. 이 사실을 발견하면서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과학자들은 전쟁으로 인해 더 이상 정보 교환이 불가능했고 소통이 단절되었다.

 

일부 과학자들이 이것을 잘 활용하면 엄청난 폭탄을 만들 수 있는 것을 알게 된다. 히틀러는 전쟁 중이었고 만약 나치 정권이 핵폭탄을 개발한다면 세계는 재앙이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나치 독일의 원자 폭탄 개발을 두려워한 과학자들 중에 나치의 탄압을 피해 떠나는 유대인 과학자가 많았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독일의 과학자들이 망명했다. 미국에 와서 생각해보니 나치 독일에 있는 뛰어난 과학자들이 원자 폭탄을 만들면 다른 나라들은 독일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사실을 빨리 미국 정부에 알려야 했다. 지금 미국이야말로 원자 폭탄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몇 안 되는 나라이기 때문에 먼저 원자 폭탄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미국 정부에 알려주고 압력을 가해서 빨리 폭탄을 만들라고 이야기한다.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과학자들은 편지를 쓴다. 미국으로 망명한 독일 과학자 중 가장 유명한 아인슈타인이 편지를 쓰면 루스벨트 대통령 마음이 움직일 것이라 판단한다. 

아인슈타인 이름으로 나치 독일의 원자 폭탄개발을 경고하면서 미국이 먼저 만들어야 한다는 편지를 쓴다. 

아인슈타인이 편지를 직접 쓴 것은 아니다. 이름만 빌려 준 것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편지를 받고 움직이지 않았다.

 

영국도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영국 정부는 심각하게 이 문제를 연구해서 비밀리에 원자 폭탄 개발을 위한 프로젝트르 시작했다. 하지만 영국은 본인들이 만들기에는 힘들 것이라 판단하여 원자 폭탄 개발 정보를 미국에 넘긴다. 원자 폭탄 개발 프로젝트 '맨해튼 계획'이 시작된다. 

맨해튼 계획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실시된 미국의 원자 폭탄 개발 계획이다. 

맨해튼 계획은 철저히 비밀리에 진행된다. 당시 부통령 트루먼도 계획의 존재를 몰랐다고 한다. 

 

맨해튼 계획은 보안을 위해 오지에서 진행된다. 맨해튼 계획 주요 거점은 로스앨러모스 (Los Alamod. N.M.), 오크리지 (Oak Ridge, Tenn.), 핸포드 (Hanford)였다.

뉴멕시코 로스앨러모스 황량한 사막에서 과학자들은 모였다. 연구소에 들어온 과학자들과 그의 가족들은 철저한 감시와 통제 속에서 3년 넘게 생활했다. 

초대형 맨해튼 계획의 리더는 오펜하이머였다. 프로젝트는 군대가 주도하고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것은 과학 기술의 문제여서 군 책임자가 있고 과학 기술 책임자가 있어야 했다.

 

 

군 책임자는 '레슬리 그로브스'였다. 레슬리 그로브스는 미국 국방부 청사 펜타곤 건설 총감독이었다. 

그로브스는 과학자 집단의 책임자를 선택해야 했다. 과학자 집단은 당시의 최고 과학자들이 집결되어 있다. 

노벨상 수상자 이탈리아 출신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 독일 출신 물리학자 '한스 베테', 미국의 화학자 '윌러드 리비', 미국의 물리학자 '줄리언 슈윙거', 미국의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맨해튼 계획에 참여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는 유태인 출신 물리학자다. 

아인슈타인은 격식을 타파하며 유머러스하고 자발적으로 철저한 아웃사이더 성격을 가졌고 오펜하이머는 유머가 없고 카리스마가 넘치고 관심받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을 가졌다. 아인슈타인은 광전 효과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오펜하이머는 천재 과학자집단을 이끄는 리더가 된다. 로스앨러모스 연구소가 있는 사막 지역 척박한 곳에 전 세계 과학자들을 모아놨는데 마치 감옥 같았다.  개성이 강한 과학자들을 하나로 모았고 불과 3년 만에 원자 폭탄을 완성시킨다. 

 

오펜하이머가 맨해튼 계획으로 오기 전에는 괴팍하고 괴짜고 자만심에 가득 찬 거만한 사람이다 등의 말을 들었다. 오펜하이머가 젊은 시절 저질렀던 여러 이상한 일 중에 가장 악명 높은 사건이 있다. 

지도 교수를 독사과를 이용해 암살하려 한 사건이다. 오펜하이머는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했다. 당시 미국은 학문의 세계에서 이류 국가였다. 하버드에 만족하지 못해 학문의 중심지 유럽으로 간다. 영국 캠브리지 대학교의 물리학과에서 공부했다. 러더퍼드 교수에게 가고 싶어서 지원서를 냈지만 오펜하이머를 뽑지 않았다. 영국까지 왔지만 생각대로 일이 풀리지 않자 좌절한다. 신경쇠약에 걸려 지도교수를 독살하려고 했고 독 사과를 먹기 전에 발각되어 죄를 덮어주는 대신에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된다. 

 

오펜하이머는 독일로 간다. 독일의 '괴팅겐' 도시로 갔는데 새로운 학문 양자역학이 태동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괴팅겐 대학교에 입학한다. 이를 바탕으로 미국 물리학계의 리더로 성장한다. 문제아 오펜하이머의 변화는 스승 막스 보른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막스 보른(1882~1970년)은 독일 태생의 영국 물리학자이며 오펜하이머의 스승이다.

막스 보른은 유태계 독일인이었다. 나치의 탄압으로 안타값게도 독일을 떠나야 했고 이런 상황들을 보면서 오펜하이머는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다. 

 

오펜하이머가 이끄는 맨해튼 계획은 폭탄이 완성이 되지 않은 상태로 전쟁이 끝났다. 1945년 4월 30일 히틀러의 자살로 독일의 전쟁은 끝나게 되고 독일은 5월 8일 항복문서에 정식으로 서명했다.

원자 폭탄은 나치 독일이 먼저 만들까 봐 미국이 먼저 개발을 시작했다. 그런데 나치 독일이 항복했으니 개발을 중단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견들이 엇갈렸다. 당시 일본과의 전쟁이 진행 중이었고 미군의 피해가 상당했다. 원자 폭탄을 사용해서 미군의 희생을 막자는 주장이 생긴다. 

오펜하이머는 원자 폭탄 개발을 진행했고 인류 최초의 원자 폭탄 리틀보이(Little Boy), 팻 맨(Fat Man)이 개발되었다.

 

원자 폭탄 실험을 할 때 핵실험용으로 개발했던 장치를 가젯(Gadget)으로 불렀다. 가젯(Gadget)은 세계 최초의 핵무기 실험에 사용됐던 내파식 플루토늄 폭탄이다.

특정 순간 핵 물질이 중앙에 동시에 모여야만 작동하는 폭탄은 정교한 계산이 필요했다. 모든 것을 정교하게 계산해야 했다. 손 계산을 했던 팀을 총 지휘한 과학자는 리처드 파인만이었다. 그는 그 계산을 위해서 미국 전국 고등학교에서 각 학교의 1등을 다 모아서 계산을 시켰다. 전체 아이디어가 가능한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당시 최고의 수학자 '폰 노이만'을 섭외한다. 폰 노이만은 검토한 뒤 가능하다고 결론짓는다.

 

이 말을 들은 오펜하이머는 핵 실험을 하기로 결정한다.  계산해 보니 32면체가 가장 적합한 형태이며 어떻게 터트리면 되는지 계산을 완수해서 정확하게 터트리는 방법을 찾아내어 핵실험에 성공한다.

1945년 7월 16일 트리니티 사이트에 실험용으로 만들어진 원자 폭탄 '가젯'으로 실험을 한다.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1945년 7월 16일 오전 5시 29분 미국 뉴멕시코 앨라모고도 사막에서 인류 최초의 원자 폭탄 폭발이 성공했다. 

핵실험 성공 후 기쁨을 나눴지만 원자 폭탄 개발 성공은 이제 과학자들의 손을 떠나 권력자들의 무기로 재탄생하는 순간이 되었다. 완성된 원자 폭탄 앞에서 오펜하이머의 마음은 복잡해졌다. 

 

일본은 1941년 12월 7일 미국 하와이주 오아후섬 진주만에 있는 미 해군 기지를 공격했다. 군인 3,500명 사상자, 민간인 100여 명 사상자가 발생했다. 군함 20여 척이 침몰, 손상됐고 항공기 300여 대 파괴, 손상됐다. 일본의 기습 공격으로 진주만은 초토화되었다. 다음날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에 전쟁을 선포한다.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다. 태평양전쟁(1941~1945년)은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벌어진 전쟁이다. 

 

 

사이판에서 4Km가량 떨어진 티니언섬에는 인류 최초의 원자 폭탄 적하장이 있었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리틀보이', 나가사키에 투하된 '팻 맨'이 있었다. 티니언섬에서 전투기에 두 개의 원자 폭탄이 실렸다. 

히로시마에 리틀보이를 투하한 폭격기는 '에놀라 게이'였고 '에놀라 게이'는 조종사 어머니의 이름이었다. 

첫 원자탄, 히로시마에 떨어진 리틀보이는 에놀라 게이에 실려서 출발한다.

실제 최종 조립은 히로시마로 향하던 폭격기 안에서 기술자들이 탑승해서 조립했다. 오펜하이머는 정확한 원폭 투하를 위해 날씨가 좋지 않거나 작은 변수가 생기면 투하를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만약 실패하면 일본에 신무기를 넘겨주는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인류 최초 전쟁에 쓰인 원자 폭탄, 리틀보이가 투하된다. 

57초 만에 폭발했고 18Km 상공까지 구름이 치솟았다. 폭발 지점을 중심으로 12Km 이내는 완전 파괴되었다. 

히로시마 인구 34만 3천여 명 중 10만여 명이 즉사했다. 

그리고 사흘 후 두 번째 원자 폭탄 팻 맨이 나가사키에 투하된다. 산악지대 나가사키는 강렬한 섬광을 동반하며 폭발했고 평야지대 히로시마보다 피해는 적었다. 콘크리트를 녹일 정도로 폭발 당시 3,900도까지 온도가 올라갔다. 폭발 중심에서 2Km 떨어진 곳에서 안경 유리가 녹아버렸을 정도였다. 

원자 폭탄 투하 후 일본은 항복선언을 한다. 

 

원자 폭탄 투하 후 오펜하이머에게 당시 군 책임자였던 '그로브스 장군'은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당신을 로스앨러모스 총 책임자로 뽑은 것은

내가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다,

당신과 당신 부하들이 자랑스럽다"

 

하루아침에 총책임자였던 오펜하이머는 스타가 되었다. 미국의 전쟁 영웅이 되었다. 하지만 기쁘지만은 않았다. 자신이 한 일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과학자라는 죄를 알아버렸다"

오펜하이머는 핵 개발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을 소집했고 더 이상의 핵무기 사용을 반대하는 로스앨러모스 과학자 협회를 결성한다. 

"핵무기를 통제할 수단이 필요하다"

"평화적으로만 사용해야 한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면담을 요청한다. 

"내 손에 피가 묻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핵폭탄은 그만 만들어야 합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엄청나게 화를 냈다.

"무슨 소리! 미국이 소련보다 먼저 수소 폭탄을 만들어야 합니다"

오펜하이머와 트루먼 대통령의 의견은 완전히 달랐다. 

 

원자 폭탄보다 어마어마한 위력을 내는 수소 폭탄을 개발하자는 주장이 등장했고 트루먼도 여기에 동의한 것이다. 원자 폭탄 투하 후 오펜하이머는 변한다. 끝까지 수소 폭탄 개발을 반대한다. 

결국 미국은 물리학자 애드워드 텔러를 통해 수소 폭탄을 개발한다.

 

 

미국 정부는 수소 폭탄 개발을 반대하는 오펜하이머를 소련의 스파이로 몰고 간다. 생각보다 빨리 소련이 핵폭탄을 개발한 것이다. 1949년 8월 29일 소련 최초의 원자 폭탄 실험을 성공시켰다. 

실제로 스파이가 있었다. 스파이는 클라우스 푹스(1911~1988년)는 독일 태생의 영국 물리학자로서 맨해튼 계획에 참여했으나 원자 폭탄 제조 관련 정보를 제공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을 포함한 최고의 과학자들은 앞으로의 참상을 막기 위해 핵무기를 막고자 했다.

하지만 냉전에서 주도권을 쥐고 싶었던 미국은 소련의 핵무기 개발로 핵 군비 경쟁이 시작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물러설 수 없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핵무기를 엄청 많이 만들어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는 전략을 세운다. 반대하는 오펜하이머가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고 스파이 혐의를 씌워서 제거하려고 한 것이다. 

이른바' 오펜하이머 사건' 1954년 4월 12일 청문회가 개최된다. 

 

온갖 이야기가 '카더라'통신으로 난무하게 된다. 전 애인 '진 태드록'은 열성적인 공산당원이었다. 헤어지고 다은 여성과 결혼했지만 만남은 계속하고 있었다. 오펜하이머가 공산주의자인가를 밝히는 청문회에서 진 태드록과의 사적인 부분까지 밝혀진다. 

청문회 이후 원자력 위원회 자격이 박탈된다. 청문회를 열었지만 공산당에 가입했거나 스파이 혐의는 뚜렷한 물증이 없었다. 1967년 62세로 후두암으로 사망한다.

 

2022년 12월 15일 미국 에너지부 장관의 성명을 통해 오펜하이머는 68년 만에 스파이 누명을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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