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류큐왕국
미 제21폭격기사령부 사령관 커티스 르메이는 도쿄 대공습 성공으로 입지가 올라갔다.
하지만 미 태평양함대. 태평양해역군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의 눈치를 봐야 한다. 르메이의 제21폭격기사령부는 육군항공대 제20 공군 소속이며 니미츠의 태평양해역군 관할이었다. 마리아나 해역의 B-29 기지 보급, 물류지원은 해군이 해주고 있다. 해군이 지원을 해주지 않으면 전략 폭격이 불가능하다. 제21폭격기사령부는 완전히 독립적이지 않았다. 해군과 육군항공대는 이해관계로 이오지마, 오키나와 공략을 결정한다. 1945년 3~8월 기아작전에 최대 B-29 1500여 대를 동원해서 기뢰투하를 한다. 오키나와 전투를 위한 지원을 한다. 3월 27~31일 일본 공군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규슈지역 16개 비행장을 폭격했다.
오키나와, 류큐 왕국은 사라지다
홍길동이 세운 율도국은 오키나와라는 설이 있으며 류큐 왕국은 조선과 교류가 있었다.
오키나와는 15세기 무렵 독립된 국가 <류큐 왕국>이었다. 오키나와 사람은 일본 본토인 (남방계 얼굴)과 다른 북방계 얼굴이다. 술도 다르다. 규슈 소주는 25도, 오키나와 소주는 40도이다. 오키나와어는 일본어와 다르다. 현재는 일본어와 함께 오키나와어 일부를 사용한다.
일본의 첫 번째 식민지는 홋카이도였다. 일본의 두 번째 식민지가 오키나와였다. 오카나와는 처음 '유구국(류큐)'이라 하여 조선왕조 실록에 기록이 있다. 유구에서 사람이 왔는데 석성 축조 등 유구국의 건축기술을 조선이 들어오려던 기록이 있다.
오키나와 문화는 전통적인 일본의 문화와는 달랐다. 류큐(유구국)의 가장 큰 섬은 오키나와섬이다. 오키나와는 북산(호쿠잔), 중산(츄잔), 남산(난잔)으로 나뉘어서 (추정) 1322~1429년 삼산시대라고 부른다.
1429년 중산국 쇼하시왕이 삼산을 통일하고 중산국지역의 슈리성을 수도로 삼아서 류큐(유구국) 왕국이 성립된다.
류큐왕국은 지리적으로 동아시아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 지금은 오키나와 섬 전체 면적의 20%가 미군기지이다. 1972년 일본에 반환한 이후에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한국, 중국, 대만, 일본, 필리핀까지 포함되는 전략적 가치를 지닌 중요한 지역이다. 중요한 위치에 있다 보니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동남아 무역의 중간 지점으로 중계 무역지로 발달했다.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전국 시대를 통일한다. 조선 출병을 위한 병력이 필요하여 사쓰마번에 병력을 요청하자 어렵다며 유구국(류큐국)에 병력을 요구한다. 유구국(오키나와)은 중국-조선-일본 중간 무역 중심의 경제구조였기 때문에 병력 요구를 거절한다.
전쟁이 끝난 후 1603년 도쿠가와 막부(에도 막부)가 창설되고 에도 막부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류큐국이 말을 듣지 않는 것에 몹시 거슬렸다. 1609년 도쿠가와 허락으로 사쓰마번에서 류큐를 침략한다.
류큐 7대왕인 쇼네이왕을 사쓰마번으로 압송한다. 사쓰마번은 류큐의 무역을 감독하며 간접적으로 지배한다. 중국과 류큐 간 무역 수입을 수탈하기 위해서 류큐왕국을 그대로 존속시키며 속국으로 지배한다. 사쓰마번 속국이라고 하면 중국과 무역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우려해서 존속시킨다. 근대 전까지 독립국가로 류큐왕국은 존재했다.
일본은 서구 열강들의 류큐 진출로 지정학적 위치 중요성이 있는 류큐를 내어줄 수도 있을 것이라 우려했다.
그래서 점령을 위해 2차례 걸쳐서 류큐처분을 한다.
류큐처분은 류큐왕국을 없애고 일본의 행정구역으로 편입시킨 2번의 사건을 뜻한다.
1872년 류큐의 마지막 왕 쇼타이왕 시기에 1차 류큐처분으로 류큐왕국을 류큐번으로 삼으면서 일본땅으로 복속을 시킨다. 류큐왕국은 중국에 조공을 하던 나라였다. 독립국가로 중국과 조공, 책봉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류큐처분으로 류큐왕국을 없애고 일본에 부속되면서 청나라에 조공을 중단하라고 명령한다.
1875년에 조공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는데 1876년에 조선과 일본 사이 체결된 불평등 조약, 강화도 조약이 있었다. 강화도 조약 1조가 '조선은 자주의 나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였다. 속뜻은 청나라에 대한 조공을 중단하라는 뜻이었다.
류큐처분으로 위기를 느낀 류큐왕국은 밀사를 중국으로 파견한다. 당시 청나라 실세 '이홍장'을 만난다.
이홍장은 1840년,1856년 2차례 치른 영국과의 아편전쟁으로 패했고 1850~1864년 홍수전이 세운 태평천국과 14년간 내전이 이어졌고 청나라의 운명도 장담을 할 수 없었던 시기였다. 이홍장은 류큐 밀사의 류큐 지원 요청을 무시한다.
1879년 3월 제2차 류큐처분을 하면서 군사를 동원해 슈리성을 점령하고 왕을 폐위한다.
류큐번은 폐지되고 오키나와현으로 강제 병합된다. 류큐왕국은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진다.
메이지유신 '부국강병'을 목표로 군사력을 강화한 일본에게 류큐왕국은 저항하지 못했다.
미 제18대 대통령 율리시스 S. 그랜트는 일본의 류큐왕국 합병을 보고 동아시아를 다 점령하는 것이 아닐까 우려하고 있었다. 미국 입장에서 미국의 앞마당은 태평양이다. 일본의 점령지 확대는 태평양에서의 미국 패권의 위협이 된다. 대통령 퇴임 후 류큐 처분 소식을 듣고 청나라를 방문한다. 류큐 남부는 청나라가 관리하고 류큐 중부는 청. 일이 공동 관할하고 류큐 북부는 일본이 관할하는 류큐 3분 안을 제시했다. 이홍장은 결론을 내지 않았다. 주저하는 사이 일본을 류큐왕국을 점령한다.
1943년 11월 22~26일에 중국 장제스, 미국 루스벨트, 영국 처칠 3개국 정상 등이 모인 카이로 회담이 열린다.
카이로 회담은 영.미 연합군이 고전 중이던 버마전선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은 버마전선을 탈환해서 일본의 확장을 막아야 했다. 중국군과 영국 해군을 동원하고 싶어 했다. 미국은 오키나와를 중국이 관리해 주기를 제안했지만 장개석(장제스)은 거절했다. 당시 장제스 비서였던 '왕총혜'가 거절한 이유를 물어보았다. 장제스는 만주, 대만을 반환받는데 오키나와까지 받겠다고 하면 욕심쟁이로 보일까 봐 거절했다고 대답한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본인을 욕심쟁이라고 본다면 제대로 협상이 안될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중국은 내분으로 어지러웠던 시대적 상황에서 이홍장, 장제스는 오키나와 관리(점령)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만주사변으로 시작해 계속됐던 일본과의 전쟁으로 제안을 선뜩 받아들이기에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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