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전투의 서막, 기쿠스이 작전
1945년 3월 24~30일 오키나와 상륙 전 미군은 1단계 일주일간의 상륙 준비 포격을 한다. 포격 목표는 오키나와 섬 상륙지점 2곳의 일본군 해안 진지였다. 미 해군의 함포 사격은 약 13,000 발이었고 함재기 폭탄은 3,095발 투하한다. 오키나와에 쏟아진 엄청난 화력으로 일본군은 '철의 폭풍'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미군도 격렬한 오키나와 전투를 상징하는 '철의 폭풍'이라고 표현했다.
오키나와 상륙를 대비한 미군의 작전
오키나와 상륙을 대비한 미군의 작전 미 해군은 오키나와 공략 준비를 6개월 간에 걸쳐서 한다. 일본 본토 규슈로부터 오키나와는 약 550Km 떨어져 있으며 당시 오키나와 인구는 약 40만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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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륙전 준비포격이 끝난 후 2단계로 오키나와 상륙을 위한 집결지(중간보급기지)를 확보하기 위해 게라마 열도에 미 육군 제24군단 77보병사단을 투입해서 5일간의 전투를 치르고 점령하여 상륙한다.
오키나와 근해에 일본군은 기뢰를 깔아 놓았다. 기뢰 제거하는 소해 작업은 까다롭고 위험하다. 사격으로 폭파시켰다. 기뢰는 수면으로 오르락내리락하며 이동하다가 터져서 피해가 상당했다. 소해 작업 중 계속되는 일본군 폭격기의 공격이 있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 해군 피해 중 약 15%가 소해작업 중 발생한다.
오키나와 전역 첫 소해 작업은 1945년 3월 22일부터 시작했다.
소해작업은 불시에 폭발할 위험이 있어 탐색부터 제거까지 정교하게 이뤄지며 날씨 영향도 많이 받는다.

1945년 4월 1일 오키나와섬 상륙 당일 L-day 아침부터 사전 포격을 한다. 미군 함대 포탄 약 44,000발, 로켓탄은 약 33,000발, 박격포탄은 약 22,500발을 쏜다. 상륙지점과 오키나와 곳곳을 포격했다. 이오지마에 상륙에도 일본군 저항은 없었다. 오키나와섬 상륙을 위한 1,200여 척의 상륙함대, 18만 3천여 명의 병력과 전투에 쓰일 물자들이 함께 상륙한다.
미 해군 상륙 지원은 미 제5함대 51기동부대 사령관 '리치몬드 K. 터너'가 이끌고 있었다. 54기동부대는 전함. 순양함으로 구성되어 포격 및 화력을 지원하는 부대, 상륙지원 부대, 물류. 보급지원하는 50기동부대 등으로 역할이 나누어져 있다. 미군은 일본 본토라서 가미카제를 포함 일본군의 엄청난 저항. 방어를 예상했다.
중형상륙함 LSM(전차 상륙함과 보병 상륙정의 중간 크기 수송함)은 로켓탄을 장착하기 좋은 길이 약 62m로 중형상륙함 크기였다. LSM(Landing Ship Medium)중형상륙함 60척을 LSMR(Landing Ship Medium Rocket) 로켓 상륙함으로 개조한다. 많은 로켓탄을 꽂아서 1분당 500발을 발사할 수 있다.
오키나와 전투, 미국과 일본의 항공전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항공전이 큰 부분을 차지했다. 이유는 일본 해군은 레이테 해전 결과로 수상함대는 몰락했다. 수상함대로 반격을 할 수 없어 일본 주변 섬에서 발진하는 항공기로 반격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중요한 기지는 규슈와 대만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항공기 전력을 규슈에 집중배치했다. 규슈에 일본 해군 제5항공함대, 일본 육군 제6항공대가 있었다. 제5항공대 사령관은 '우가키 마토메'였다. 일본 육군, 해군을 합쳐서 약 2,000대 항공기를 집결시킨다. 미군이 오면 항공기를 총 투입해서 결정적 반격을 가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텐고작전(천호작전)이 기획된다. 본토 결전, 결호작전을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한 차원에서 최대한 적에게 많은 피해를 입힐 이런 항공작전을 기획하고 있었다. 드디어 미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 제5함대 58기동부대가 4월 1일 오키나와 상륙을 하기 전에 일본 본토와 주변 섬의 항공기지를 폭격한다.
1945년 3월 18일 일본 규슈와 구레항을 공습한다. 일본 수뇌부는 맞서 싸우지 말라는 방침을 내리고 있었다.
레이테 해전과 대만항공전에서 일본 항공기들이 투입됐다가 크게 패했기 때문에 상륙이 확실해지면 결정적으로 맞서 싸우자는 방침이었다. 하지만 일본 제5항공대 사령관 '우가키 마토메'는 견적필전(見敵必戰, 적이 보일 때 맞서 싸워야 한다)으로 독단적으로 출격을 시킨다. 사후승인을 요청한다. 미 항모 프랭클린 등이 대파되기는 했으나 일본군 항공기 190대 이상 손실된다.

텐고작전 준비를 한다. 그러면서 정상 공격으로는 효과가 낮기 때문에 가미카제 특공을 준비한다.
가미카제 특공 작전의 이름은 '기쿠스이 작전'으로 한다.

국수(菊水)는 물 위에 뜬 국화 문장이다. 구스노키 마사시게 가문의 문장이다.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일본 막부~남북조 시대 무장이며 황도 정신(황국사관)을 대표하는 일본 무장이다.
※황국사관은 일왕이 무너지면 세계가 무너진다는 일본의 일왕 중심적 체제
막부 시대의 일왕은 권력이 약한 상징적인 존재였다. 지방군부 막부의 수장 쇼균과 지방 영주 다이묘들이 실질적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일본 가마쿠라 막부 초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막부시대를 열었다. 지방 영주의 권력이 커지는 중세의 전형적인 모습이 나타나는 시기였다. 가마쿠라 막부는 1180~1333년까지 200여 년 이어진다.
일본 제96대왕 '고다이고 덴노' 왕이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하고 왕이 직접 통치하는 친정(親政)을 시도한다.
자신을 지지하는 다이묘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고다이노 일왕을 도운 일본의 무장이 '구스노키 마사시게'였다. 구스노키 가문의 문장이 '기쿠스이'다. 구스노키는 가마쿠라 막부를 무너뜨리고 왕의 친정 체제인 '겐무 신정'을 시작했다. 일왕에게 충성을 바친 인물로 평가된다. 마지막에 일왕에 반기를 든 막부군에게 패하자 결국 자결을 한다. 메이지 유신 후 재평가되며 '다이난 공'으로 칭송된다.
당시 일본 왕가의 문장은 '일월문'이었지만 국화 문장은 1869년 메이지 유산 이후 채택된다. 일본 제82대 일왕(가마쿠라 시대) '고토바 덴노'가 국화꽃을 좋아해서 총애하는 신하들에게 국화 문장을 하사했다.
구스노키에게도 국화 문장을 하사하였다. 왕을 끝까지 보필한다는 의미로 국화 밑에 물을 덧붙였다.

기쿠스이 작전 진행, 야마토 해상 특공
일본 제5항공함대, 육군 제6항공군 중심이 돼서 항공부대를 총집결시킨다. 해군 약 940대, 육군 약 887대를 동원한다. 1945년 4월~6월 총 10차례 작전을 전개한다.
1945년 4월 6일 기쿠스이 1호 작전이 시작된다. 야마토 특공이 전개된다.
일본 해군의 상징 전함 야마토가 특공 공격에 나서게 된다. 일본의 계획은 야마토를 오키나와 연안에 좌초시켜서 고정포대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야마토 해상 특공의 핵심은 미군 공습으로 침몰될 바에야 강력한 포를 활용해 맷집으로 밀고 나가서 오키나와 서해안에 좌초시킨 다음에 주변에 있는 미군 상륙부대와 함정들을 최대한 많이 저격한 다음에 죽겠다는 것이다.
일본 연합함대 참모 '가미 시게노리'는 '해군작전의 신'이라 불렸다. 똑똑하고 작전에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일왕에 대한 광신적인 언행으로 유명했다. 전쟁말기로 가면서 적이 상상못하는 기상천외한 작전으로 기습을 주장한다. 야마토 특공의 발단에는 일왕이 있었다. 1945년 4월 기쿠스이 작전을 결정하고 형식상의 일왕의 재가가 남았다. 일왕은 작전을 보고 항공부대는 공격을 하는 데 해상부대는 뭐 하냐는 질문을 한다. 해군도 뭔가를 해야 했다. 가미 시게노리는 왕의 뜻은 수상함도 특공에 참가하라는 뜻이라며 자신이 주장했던 해상 특공의 아이디어로 입안을 한다. 일본 연합함대 사령장관 '도요다 소에무'는 일왕의 말이 있었기 때문에 해상 특공을 승인한다. 전함 야마토가 소속되어 있는 제2함대 사령장관 '이토 세이이치'는 야마토 특공 작전의 숨은 속뜻을 알고 극대노하며 엄청난 반대를 한다.
연합함대 도요다 소에무는 이토 세이이치와 해군병학교 선후배 사이인 참모장 '구사카 류노스케'를 직접 보낸다. 제2함대 수뇌부에게 연합함대 참모장은 작전명령을 전달하면서 구사카 류노스케에게 "제국 해군의 영광을 후세에 전하여 1억 총 특공의 혼이 되시오" 뜻을 전달한다. 이토 세이이치는 작전의 뜻(죽을때까지 항전)을 알고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야마토 특공에 영향을 미친 사건이 있었다.
1차 대전 이후 독일 함대의 운명이었다. 1918년 11월 독일 혁명으로 체제가 붕괴되고 파리강화회의가 있고 나서 독일 함대는 연합군 국가로의 분배가 논의 됐다. 그 소식을 들은 독일 제독.대양 함대를 지휘했던 '루트비히 폰 로이터'는 영국에 정박한 총 74척의 독일 함선 중 52척을 밑바닥에 구멍을 뚫어 자침 시켰다.
가미 시게노리는 독일 전함의 자침은 어이없는 일이라며 전투함답게 싸우다가 비장하게 최후를 맞이해야 한다고 말한다. 독일과 같은 최후를 막기 위해 야마토 특공을 계획한다.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육군 제32군에게 해군의 기쿠스이 작전 소식이 들렸다.
기쿠스이 작전과 야마토 특공작전을 들은 일본 육군 제32군 고급 참모 '야하라 히로미치' 대좌는 처음에는 감동을 한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니 어이가 없었다. 본국에 전문을 보내서 "성의는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라고 한다. 오키나와 상륙을 위해 출동한 미군 함대들이 수없이 많으며 전함만 18척이 있었다. 야마토 전함이 아무리 강해도 미 전함 18척의 집중 포격을 맞을 것이므로 특공 작전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다. 전함 야마토의 구성은 경순양함 야하기, 호위 구축함 8척, 총 10척이었다. 반면 미군은 전함 18척과 순양함, 구축함을 모두 합치면 수백 척이 있다. 전함 야마토가 미 함대 수백 척 사이를 가로질러 상륙지점에 원하는 대로 좌초시킨다는 작전은 참으로 어이가 없는 작전이다. 거기다 미군은 어마어마한 항공 전력까지 가지고 있다.
1945년 4월 6일 15시 20분 일본 제2함대 (1유격부대)가 출항한다. 미군은 일본 연합함대 움직임을 이미 꿰뚫고 있었다. 미군은 무선 감청 후 암호해독으로 내용을 파악했다. 1945년 4월 6일 09시 46분 미 정찰기 F-13에 야마토가 포착된다. 1945년 4월 6일 09시 55분 일본 연합함대는 제 2함대에게 무선을 발신한다. 그날 오후 미군은 암호해독 후 미 함대에 배포한다. 전문에는 '4월 6일 18시 00분에 분고수도 통과, Y-day 4월 8일 오키나와 도착, 야마토, 야하기, 구축함 8척 함대 구성' 등이 상세히 나와있다.
미군은 암호해독으로 야마토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미 제5함대 사령관 '레이먼드 스프루언스'는 일본 해군의 함대 공격을 막기 위한 미 제5함대의 컨틴전시 플랜(contingency plan 비상계획)으로
미 화력지원 부대 54기동부대(TF-54)에게 임무를 맡긴다. 포격 및 엄호부대인 미 제5함대 54기동부대 사령관은 '모튼 데요'였고 구식전함 10척으로 구성되었다. 컨틴전시 플랜을 발동하며 모튼 데요 사령관은 전함 6척을 중심 대응부대로 편성하고 출전준비에 마음을 다 잡는다.
미 제5함대 사령관 레이먼드 스프루언스는 "야마토는 호위함은 순양함 1척에 구축함 8대뿐이다. It's fair game TF-54 (공정한 게임이다), 슈퍼 전함 야마토는 1척이고 구식전함은 10척이어서 공정한 게임이다"라고 한다.
하지만 미 제5함대 58기동부대 사령관 '마크 미처'가 등장한다. 마크 미처는 해군 항공병과에 잔뼈가 굵은 사령관이다. 1942년 미드웨이 해전 당시 항모 호넷을 지휘했다. 전쟁 초반부터 항모부대를 이끌면서 항모, 함재기 효용성을 설파하기 위해 애를 쓴 사람이었다. 야마토를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1945년 4월 6일 밤, 야마토가 출격해서 오는 도중에 스프루언스에게 알리지도 않고 휘하 지휘관들에게 내일 아침에 중요한 출격이 있으니 함대 공격용 무장을 준비하라고 지시한다.
항공모함 해군 항공과 전함 해군 항해에는 오래된 알력 다툼이 있었고 윗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안전장치로 함대 사령관이 항공병과 출신이면 참모장은 항해병과 출신으로 임명한다. 함대 사령관이 항해병과 출신이면 참모장은 항공병과 출신으로 임명한다.
미 58기동부대 참모장은 알레이 버크(당시 대령)이었다. 알레이 버크는 6.25 전쟁에 참전했으며 미 해군참모총장을 역임한다. 마크 미처를 견제해야 하는 알레이 버크도 작전을 수긍한다.
1945년 4월 7일 08시 15분 미 항모 에식스의 F6F 헬캣이 일본 제1유격부대를 발견하고 09시 07분에 미 항모 함재기 발진이 시작된다. 9시 15분 함재기 출격 이후 스프루언스에게 전문을 보낸다.
"Will you take them or shall I?" 당신이 처리할래요, 내가 처리할까요?'
마크 미처는 알레이 버크에게 대신 전문을 보내라고 시킨다. 마크 미처가 쓴 전문 내용은 "특별한 명령이 없으면 정오에 공격을 개시하겠다" 며 길게 보냈다. 알레이 버크는 마크 미처의 마음을 알고 있었고 전문 내용을 짧게 수정해서 보낸다. "Will you take them or shall I?" 당신이 처리할래요, 내가 처리할까요?' 알레이 버크가 수정해서 보낸 전문이었다.
1945년 4월 7일 09시 30분 스프루언스로부터 회신이 온다.
"You take them 네가 처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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