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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오키나와 상륙를 대비한 미군의 작전

by 소시민스토리 2024.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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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상륙을 대비한 미군의 작전

미 해군은 오키나와 공략 준비를 6개월 간에 걸쳐서 한다. 일본 본토 규슈로부터 오키나와는 약 550Km 떨어져 있으며 당시 오키나와 인구는 약 40만 명이었다. 오키나와현 전체는 약 2,271㎢이며 제주도 면적 약 1,833㎢보다 더 크다. 오키나와 본섬은 약 1,206㎢로 제주도 면적 약 1,833보다 작다.

오키나와에는 전략적 가치가 높은 3개 대형 비행장이 운용 중이고 예상 병력이 상당할 것이라 추정되어 미군은 쉽지 않은 전투가 될거라고 예상한다. 

 

오키나와, 류큐 왕국은 사라지다

 

오키나와, 류큐 왕국은 사라지다

오키나와, 류큐왕국 미 제21폭격기사령부 사령관 커티스 르메이는 도쿄 대공습 성공으로 입지가 올라갔다. 도쿄 대공습 이후 일본 본토 폭격 도쿄 대공습 이후 일본 본토 폭격 도쿄 대공습 이후

bringbacon.tistory.com

 

오키나와는 민간인이 살고 있었다. 상륙을 하기 위해 지형, 병력 규모, 구성, 요새 파악 등 다양한 정보가 필요했지만 쉽지 않았다. 레이테 전투 때에는 필리핀 게릴라에게 정보를 획득할 수 있었지만 오키나와는 인간정보(휴민트 HUMIT =Human+Intelligence)를 획득하기 어려웠다. 6개월 동안의 항공 정찰을 통해 오키나와 지형 정보를 수집했고 잠수함 정찰을 통해 해안가를 촬영하는 등을 통해 지도를 제작했지만 그 지도는 완벽하지 않았다. 일본군 요새 규모가 확인 불가능했다. 미군이 예상한 일본군 병력은 처음에는 48,000명으로 예상했다가 55,000명을 예상한다. 상륙직전에는 66,000명을 예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일본군 병력은 약 10만 명이었다. 아시아 전선에서는 인적 자원을 투입하기 쉽지 않아서 정부 수집이  어려웠다. 

 

 

오키나와 상륙작전, 미군 병력의 규모

오키나와 상륙은 태평양 전쟁 중 가장 큰 상륙작전으로 2차 세계 대전을 통틀어서 미군이 수행했던 작전 중 가장 큰 규모의 작전이다. 오키나와는 미군 단독 상륙작전이고 노르망디 상륙 작전은 미군. 영연방군 연합 상륙작전이다. 

오키나와 상륙 지상부대는 '사이먼 B. 버크너' 사령관이 이끄는 미 육군 제10군을 투입했다. 예하에는 24군단과 제3상륙군단이 있고 24군단은 4개 보병사단을 가지고 있다. 제3상륙군단은 3개 해병사단을 가지고 있다.

24군단과 제3상륙군단, 총 7개 사단으로 병력은 총 18만 3천여 명이었다. 1945년 4월 1일 상륙 당일에 미군 병력 총 11만 6천여 명이 상륙할 예정이었다. 

미 제5함대 사령관 '레이몬드 스프루언스'가 이끄는 미 해군 병력은 총 35만여 명이었다. 미 해군 병력은 레이테 상륙에는 12만 명이었고 오키나와 상륙은 35만여 명이 동원된다. 수송선, 구축함 이상 함선은 1,600여 척이었다. 미 태평양함대가 총동원된 것이다. 

 

1945년 4월 1일 오키나와 상륙 L-day, 부활절 일요일 아침이었고 만우절(April Fools' DAy) 이였다. 

미 해병대는 상륙작전 당일 아침에 스테이크와 달걀 프라이를 먹는 전통이 있다. 

 

오키나와 전투 당시 일본군 방비 상태

1944년 오키나와 수비대는 일본 육군 제32군이 편성됐다. 오키나와 전투의 일본군 핵심 지휘관. 참모 3명이었다.  일본 육군 제32군 사령관 '우시지마 미쓰루' 중장은 일본의 전형적인 육군 야전 지휘관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에 참전해서 난징대학살에 연루되어 있다. 1937년 3월 일본 육군 제6사단 제36여단장을 맡고 있었다. 12월 난징 공략의 핵심 부대 중 하나였다. 난징 점령 후 시민들에게 무참한 학살을 가한 일본군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일본 육군 제32군 참모장은 '조 이사무' 중장이었고 관동군에서 군생활을 시작했다. 

상해 파견군 참모로 난징공략에 참전했다. 부하들에게는 금주, 금연을 엄격히 금지하고 요리사를 대동해 다니면서 위스키 파티를 즐겨 했으며 부대 폭력까지 자행한 인물이었다.

 

일본 육군 제32군 고급 참모 '야하라 히로미치' 대좌는 미국 유학파였다. 1940 태국 대사관 무관 보좌관을 역임했다. 태평양전쟁 초기에는 일 육군 제15군 참모로 버마 전선에 근무했다가 뎅기열로 일본에 후송된다.

미군을 잘 이해했던 장교였다. 육군대학교 교관 근무 중 제32군 작전담당 고급 참모로 오키나와로 파견된다. 

미국 유학 경험을 바탕으로 오키나와 방어 전술.전략에 영향을 미친다. 일본 육군 제32군은 4개 사단이 배치되었다. 4개 사단에는 9사단, 24사단, 28사단(미야코섬 주둔), 62사단으로 상당한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작전을 짜던 '야하라 히로미치'대좌는 처음에 자신감이 충만했다. 4개 사단과 2개 여단까지 갖추고 있어 병력이 충분하자 수제방어(적 상륙 위치인 해안선 부근 방어)가 가능했다. 3개 사단을 상륙 예상 지점 3군데에 배치한다. 남은 병력은 적 상륙 후 추가 투입해서 확실하게 상륙을 저지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예기치 못한 변수가 발생한다. 1944년 10월 레이테섬 전투로 대만이 위태로워지자 대본영은 미군의 대만 공략을 예상했었기 때문에 대만으로 제 9사단 병력을 차출한다. 제9사단은 청. 일전쟁과 러. 일전쟁에서 활약한 최정예사단이었다. 9사단과 24사단 중 9사단을 차출하기로 결정한다. 제24사단은 포병 화력을 보유한 보병사단이었기 때문이다.

 

일본군 사단의 약점은 화력이 약하다는 것이다. 일본군 사단은 포가 가벼워 운송 수단 없이도 이동이 쉬운 산포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24사단은 4년식 15cm 곡사포를 12문을 보유하고 있었다. '야하라 히로미치'대좌는 병력의 질 보다는 미군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화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9사단의 차출로 인한 2만 명의 병력이 감소가 된다. 그러자 수제 방어 전략에서 지구전으로 작전을 변경한다. 구축된 요새에서 장기전으로 이끌어 적에게 최대한으로 오랫동안 출혈을 일으키겠다는  "전략지구작전' 계획을 세운다.

보유 중화기를 산등성이 뒤. 동굴 진지에 은폐한다. 일본 대본영은 육군 제9사단을 차출하는 대신에 육군 제84사단을 증원하기로 약속을 했었지만 병력 증원은 없었다. 병력 부족으로 민간인까지 차출해서 고등학생까지 군대로 편성을 한다. 

 

 

오키나와 상륙를 대비한 미군의 작전

 

영국 태평양 함대 전체 항모 전력의 1/3(정규항모 6척, 경항모 4척 포함, 선박 200척 이상)이 참전을 한다.

영국 참전은 처칠의 요구에 의한 정치적 결정이었다. 영국 함대는 대만 방향 해상을 방어했다. 

'어니스트 킹' 미 함대 총사령관은 영국의 참전을 반대했다. 전후 영국의 영향력 행사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미군은 영국의 참전을 정치적, 군사적으로 반겼다. 

 

오키나와 공략 1단계 상륙전에는 '작전 통제권'을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미 5함대 사령관이 가지고 있었지만

오키나와 공략 2단계부터는 미 육군 제10군 사령관 '사이먼 B. 버크너'가 가진다.  해군, 항공기 운용 모두 작전통제를 한다. 오키나와 전투를 위한 미 육군. 해병대 합동 '제10군 전술항공대'를 편성했고 항공기가 약 600대 이상이었다.  지상군은 전투 기간 내내 해군의 함포사격 화력 지원을 받는다. 야간 작전 시 해군 조명탄 사격 지원도 받는다. 지상군을 화력지원하기 위해 항공기 전술 폭격을 했다. 미군의 포병 화력은 엄청난다. 

육. 해. 공군의 합동작전이며 제병협동(2개 이상 육군 전투병과의 협동 작전)을 한다.

오키나와에는 민간인이 살고 있어 민사작전(민간을 대상으로 벌이는 심리전)을 한다. 오키나와 점령과 함께 미군정을 실시했다. 전투가 길어지면서 민간인 통제애 대한 중요성이 부각된다. 

 

 

미 육군 제10군 사령관 '사이먼 B. 버크너'의 아버지는 남북전쟁 당시 남군 장교였던 '사이먼 버크너'로

남군 장군 중에 처음으로 북군에 투항했던 장군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1887년 켄터키 주지사에 당선됐다. 1886년 63세에 나이에 외아들 '버크너'가 태어난다. 버지니아 군사학교를 다니던 아들 버크너는 아버지의 후광으로 당시 미국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 추천서를 받아서 미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한다. 졸업하고 사관학교 교수. 군사학교 교관으로 군복무를 했다.

 

1919~1936년까지 대위부터 중령까지 18년간 교직에서 군생활을 했다. 2차 대전이 발발했고 1940년 준장으로 진급해서 알래스카 방위사령부 사령관으로 취임한다. 실전 경험이 없던 버크너는 1943년 5~8월 일본이 점령한 알류샨 열도 애투섬. 키스카섬 탈환 작전에서 방어군 사령관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한다. 

1944년 미 육군 10군 사령관으로 임명된다. 10군 사령관의 임무는 대만 공략을 지휘하는 것이었다. 

10군 사령관은 육.해군 합동작전을 지휘해야 한다. 미 해군은 상륙작전 경험이 많은 지휘관을 선호했다. 

미 제5상륙군단장 '홀랜드 스미스' 중장이 적임자였다. 하지만 홀랜드 스미스는 타라와 전투에서 3,500여 명의 미군 사상자를 내 '타라와의 도살자'로 불렸다. 사이판에서는 '홀랜드 스미스'가 미 육군 제27사단장 '랄프 스미스' 소장을 임의로 해임시켰었다. 

 

엄청난 파장이 있었고 육.해군 타협안으로 육군 지휘를 해병대 장군에게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미 해군은 스미스를 추천했지만 불가능했다. 그래서 미 육군의원회에서는 사이먼 B. 버크너를 추천한다.

추천 이유는 사이먼B. 버크너는 해군. 해병대와 사이가 좋았기 때문이다. 미 남서태평양지역군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는 정치적 인사라고 비판을 하기도 했다. 

사이먼 B. 버크너 미 육군 제10군은 대만 공략이 취소되면서 오키나와 전선으로 투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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