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대공습 이후 일본 본토 폭격
도쿄 대공습의 성공으로 본격적인 일본 본토 폭격이 시작된다.
1945년 3월 11~12일 일본 나고야를 새벽에 공습한다. 나고야는 중요한 산업도시로 미쓰비시 중공업이 있어 항공기 제작소, 부품 공장이 있다. 소이탄을 쏟아부어 초토화시키려 했지만 성과는 미흡했다. 나고야는 소방대책이 잘 되어 있고 도로가 넓어 큰 피해를 방지할 수 있었다. 석조 건물이 많고 도쿄 대공습과는 달리 바람이 불지 않아 불이 확산이 되지 않았다.
13~14일 새벽에 걸쳐서 오사카를 공습한다. 오사카 상공에 두터운 구름이 끼어 있어 노든 조준기로 위치를 잡지 못하고 레이다를 이용해 폭격을 했다. 레이다 폭격은 노든 조준기보다 명중률이 50% 이하였기 때문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가 기대보다 성과가 좋았다. 정확히 유도되지 않고 단순 낙하하는 멍텅구리 폭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목조 건물이 많아 화재가 컸다. 일본 오사카는 화재로 인해 약 21㎢ (약 630만 평)의 면적이 소실되었다. 사망자는 3,600여 명, 부상자는 8,000여 명이었다. 이재민은 50만 명, 가옥 전소는 13만 채가 넘었다.
16~17일에는 주요 산업도시 고베를 공습한다. 고베 공습은 폭격의 성격이 바뀐다. 기존의 효과가 좋았던 M-69 소이탄 재고가 부족했다. 유럽에서 사용하던 M-17 A1 소이탄을 사용한다. 유럽 폭격에서는 목조건물보다 석조건물이 많아 강력한 열이 발생하는 테르밋 소이탄을 사용했다. 고베 공습에는 마그네슘 테르밋 소이탄 M-17 A1을 대량 투하한다. 고베에서 마그네슘 테르밋 소이탄이 효과를 냈다. 가와사키 고베 조선소 등 산업시설을 위주로 폭격했다. 산업시설은 목조건물이 아니기 때문에 효과가 좋았다. 가와사키 조선소 함성 공장이 폭격 피해를 엄청나게 입는다. 고베 전체 면적의 20% 18㎢(약 540만 평)이 전소된다.
1988년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반딧불이의 묘>는 일본 고베 공습을 배경으로 한다. 영화에서 공습 당시 모습이 묘사된다. 강물에서도 타오르는 열기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오는데 테르밋 소이탄의 위력이었다. 네이팜탄은 물속에 들어가면 산소가 차단되어 연소가 중단되지만 테르밋 반응은 엄청난 고열(2,500~3,000도)을 일으킨다. 마그네슘 분말에 포함된 산소로 물속에서도 연소한다.
1945년 3월 18~19일에는 나고야를 재공습한다. 소이탄과 고폭탄이 함께 사용된다. B-29 한 대당 500lb (약 226kg) 고폭탄 2개를 싣고 남아있던 소이탄을 전부 싣는다. 남은 고폭탄과 소이탄 총 1,851톤 폭탄을 투하한다. 소이탄이 고갈되어 1945년 3월 19일 일본 폭격 1차 스테이지가 종료된다.
본토에서 소이탄을 실어 올 동안 잠시 정지한 것이다.
1945년 3월 20일~1945년 6월 일본 폭격 2차 스테이지가 있었다. 요코하마에 공습이 없자 미군이 나중에 상륙할 때 요코하마 항구를 쓰기 위해 폭격을 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일본인들은 요코하마로 몰려들었다. 요코하마로 피난민이 몰려들고 며칠 후 폭격을 개시했다. 요코하마 공습 사망자 총 3,700~4,600여 명이 사망했다.
1945년 6월~종전까지 일본 폭격 3차 스테이지를 종료하면서 일본 전역을 초토화 시킨다.
커티스 르메이는 소이탄이 떨어지고 고폭탄이 남아있자 정밀 폭격을 한다. 일본 본토 폭격은 소이탄을 이용한 야간, 지역 폭격만 시행한 것은 아니었다. 상황에 맞게 폭탄의 재고와 날씨, 상황에 따라 정밀 폭격, 지역 폭격, 주간, 야간 폭격, 고고도 폭격, 저고도 폭격 등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소이탄이 떨어지자 정밀 폭격으로 선회한다. 정밀 폭격은 주간, 야간 폭격을 시도했다. 1945년 3월 24일 B-29 248대를 야간 출격해서 나고야 미쓰비시 엔진공장을 정밀 폭격한다. 패스파인더(선도기)가 M-17 A1집속 소이탄을 투하해서 화재를 일으켜 타깃을 표시한다. 뒤 따르는 B-29 후속기는 고폭탄을 투하한다. 야간 정밀 폭격은 정밀도가 떨어졌다. 투하된 약 1,500톤 폭탄 중 60여 톤만 공장을 타격했다. 폭탄 투하로 발생하는 연기가 시야를 방해하기 때문에 정밀도가 떨어진다.
고폭탄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들을 고민한다. 모든 방법을 동원해 정밀 폭격을 시도하지만 고폭탄 정밀 폭격은 성과가 흡족하지 않았다.
1945년 4월 7일 미 전략 폭격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오지마에서 B-29 호위기 P-51 머스탱이 출격하기 시작한다. P-51 호위기가 출격하여 주간 저고도 정밀 폭격으로 전환한다. P-51 머스탱과 함께 또 다른 비밀병기 전자전: 재밍(무선방해)을 사용한다. 재밍 전술은 적 레이다에 방해 전자파를 방사하여 전파 체계를 교란, 무력화하는 전술이다. 일본 레이다와 같은 전자파를 방사해서 일본 레이다를 무력화시킨다.
레이다를 무력화시킨 다음 호위기 P-51 대동한 B-29가 폭격을 한다. 일본은 레이다가 무력화되자 레이다와 연동되어 있는 대공포 사격관제망이 무력화되어 속수무책 당하게 된다.
미쓰비시 중공업 나고야 발동기(엔진)제작소가 대파된다.
1945년 4월 중순에 본국으로부터 소이탄이 배달된다. 소이탄 공격 재개를 계획하고 있을 때 오키나와 전투가 시작되면서 1,900여 대의 항공기가 동원된 일본의 가미카제 공격이 시작된다.
B-29는 해군의 오키나와 전투를 돕기 위해 전술 폭격을 지원한다. B-29는 가미카제가 출격하는 규슈 17개 비행장을 집중 공격한다.
1945년 5월 14일~6월 7일까지 소이탄과 고폭탄으로 주요 대도시, 군사 거점을 폭격한다. 1945년 6월부터 종전까지 일본 폭격 3번째 스테이지로 중소도시, 부차적인 목표지점으로 확산이 되면서 일본 전역을 폭격한다.
큰 목표물 폭격은 어느정도 성과를 보이자 각 항공단별로 목표를 설정해 공습을 동시에 한다.
6월부터 시작되는 장마철 날씨에 맞게 주간, 야간, 정밀 폭격 등을 매일 바꿔가면서 일본 본토를 초토화시킨다. 도쿄 대공습을 시작으로 6개월 동안 일본 본토 폭격은 이어진다.
1945년 5월23일,25일 도쿄 대공습이 있었다. 석조, 콘크리트 건물 파괴를 위해 테르밋 소이탄을 투하했다.
25일 일 육군 참모본부가 폭격된다. 불이 나면서 옆에 있던 메이지 왕국으로 불이 옮겨 붙어 일왕의 거처인 궁전이 소실된다. 1945년 2월 14일 고노에 외 7명이 올린 <근위 상주문>에 지금 항복하지 않으면 소련에 점령당할지도 모르고 천황제를 폐지시킬 것이다. 차라리 미국에 항복하자고 한다. 히로히토 일왕은 싫어하면서 던져버린다. 상주문을 올린 일부 정치인들은 불충죄로 체포당한다. 일본의 항복 조건으로 '천황제 유지'가 되지 않는 한 절대 항복은 없다는 것이다. 끝까지 특공 정신으로 버틴다는 것으로 그 중심에는 대본영이 있으니 전략 폭격에 굴할 수 없는 것이다.
대본영과 일왕은 공습 당시 일본 왕궁 지하에 마련한 방공시설에 피신했다. 나가노 마츠시로 지역에 죠산, 미이즈루산, 가이가미산, 3개의 산에 지하 요새 '마츠시로 대본영'을 건설해서 대본영을 피신시킬 장소를 만들어 놓는다. 마츠시로는 험난한 지형으로 산악지대이다. 1944년 11월 '마츠시로 대본영' 건설을 시작해 완성된 3개 지하 벙커에 총 길이 약 11Km 정도이다. 1945년 8월까지 3/4 정도 완성 상태에서 종전이 된다.
엄청난 기밀 유지를 해서 경찰들고 모르고 있을 정도였다. 마츠시로 대본영 착공 당시 동원된 조선인 7,000여 명이었고 1945년 4월 기준 1만 명으로 추정된다. 최대 1,000여 명에 이르는 조선인이 폭발, 붕괴 사고로 사망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폭격기 승무원들은 긴장을 풀기 위해 농담을 한다. 일 무선 감청반은 미군이 자주 사용하는 주파수를 일일이 확인해서 폭격기 사이에서 반복적인 신호를 탐지한다. 분석을 해서 폭격기의 규모까지 알아낸다. 1945년 초에는 4~5시간 전 미 폭격기 방향과 규모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조기 경보망의 유기적인 시스템이 결여되어 감청된 정보를 가지고 확보된 시간적 여유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 감청반은 언제쯤 미군의 폭격이 시작되는지는 파악하지만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될지는 파악하지 못한다. 일본 요격기 부대장은 요격기를 출격해야 되나를 고민해야 한다. 엄청난 연료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이다와 기타 정보를 가지고 위치 확인 후 출격을 하기 때문에 미리 공격 시간을 알았더라도 출격 시간이 지연된다.
본토 방어 일본 요격기
일본 전투기 중 쌍발전투기는 효과가 있었다. 육군은 육군 쌍발전투기 Ki-45 토류, 해군은 야간 전투기 J1N1 겟코가 있었다. 겟코는 동체 뒤쪽 30도 각도로 경사포가 탑재되어 있다. 폭격기 밑으로 가서 긁고 가는 것이다. 1944년 8월 20일 Ki-45 토류가 중국 청두에서 출격한다. B-29 편대의 규슈 야하타 제철소 폭격을 저지하기 위해 토류 포함 87대 일본 요격기가 출격했다. B-29 61대 중 12대를 격추하고 2대를 파손한다.
해군은 J1N1 겟코를 이용해 B-29 6대를 격추한다. 이때는 B-29가 3대 편대 비행을 했다. 하지만 1945년 1월 커티스 르메이가 등판하면서 전투 상자 대형으로 바뀌면서 사각이 없어졌다. 전투 상자 대형으로 B-29 요격이 어려워져 일본 쌍발전투기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일본 전투기는 고고도 성능이 좋지 않았다. 고고도 비행 시 엔진 출력이 저하되었다. 1945년 4월 7일 이오지마에서 B-29 호위기 P-51 머스탱이 출격하면서 일본 전투기는 속수무책으로 격추당한다.
일본 군수뇌부는 새로운 항공기를 개발할 필요성을 느낀다. 3식 전투기 Ki-61 히엔을 만든다. Ki-61 히엔은 일본식 최초 물을 사용하는 엔진냉각, 수랭식 엔진을 탑재했다. 초기 생산 기체는 품질이 좋았지만 전쟁 후반 일본의 공업력은 점점 안 좋아져서 비 숙련공에 의해 항공기가 제작되다 보니 품질, 성능이 저하되었다.
고바야시 데루히코 소령은 Ki-61 히엔으로 B-29 3대와 F6F 헬캣 2대를 격추하는 성과를 올린다.
Ki-61 히엔의 유일한 공격 방법은 고고도에서 급강하하며 일격 이탈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격 이탈에 실패할 경우 다시 재공격을 위해 고고도 상승을 해야 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한 번 공격에 실패하면 재공격이 어려워 자살 공격을 감행한다. 히엔 양산형이 생산될 때 Ki-61 히엔에 일본 조종사들은 '살인 전투기'라는 별명을 붙인다. 타고 나가면 떨어진다는 것이다.
일본 4식 전투기 Ki-84 하야테를 개발한다. 1,800마력급 고출력 엔진을 장착했고 고도 6,000m에서 시속 640km였다. 상승률은 고도 5,000m에 도달했고 6~7분이 걸렸다. 1945년 1월 필리핀 전투에 사용한 Ki-하야테를 미군이 노획해서 미군 고옥탄가 연료를 넣어 성능테스트를 해본다. 미군의 P-47 선더볼트, P-51 머스탱과 성능이 대등했다. 일본 2차 대전 최고 전투기는 하야테였다. 하지만 대량 생산이 시작되자 성능이 저하된다.
해군은 전투기 단발 엔진 요격기 J2M 라이덴을 개발한다.일 제로전투기를 설계했던 '호리코시 지로'가 라이덴을 설계했다. 1943년 9월 J2M 라이덴을 대량 생산하고 실전 배치한다. 상승력은 고도 6,000m에 도달하고 5분 38초가 걸렸다. 최대 속도 고도 5,452m에서 시속 약 596Km였다. 하지만 속도와 상승력 확보에 중점을 두고 추진하다 보니 발동기 성능이 저하되어 기체 진동이 발생했다. 베테랑 조종사도 조정하기가 어려웠다.
베테랑 조종사와 정비공으로 구성하여 1944년 12월 일본 제343해군항공대(일명 츠루기 부대)를 창설한다.
B-29를 요격하려 갔지만 한 대도 격추시키지 못했다. B-29에 뺴앗긴 제공권을 찾기 위해 일본군은 고군분투했지만 전쟁 후반 일본의 산업 역량이 떨어지면서 전투기 생산, 성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다.
2차 대전 당시 B-29 출격은 총 31,387회였는데 일본 요격기와의 교전으로 격추당한 B-29는 87대뿐이었다.
유럽 폭격에서 독일 방공망에 잃은 미 폭격기는 5,541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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