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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태평양 전쟁과 소이탄 개발

by 소시민스토리 2024.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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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과 소이탄 개발 

1945년 2월 19일 미 3개 해병사단이 이오지마에 상륙한다. 

 

격전지 이오지마 전투

 

격전지 이오지마 전투

격전지 이오지마 전투 1944년 12월 미 해군을 덮친 기상재해는 태풍 코브라였다. 1944년 12월 17일 필리핀 해상에서 연료를 보급 중이던 윌리엄 홀시 사령관의 미 제3함대 38 기동부대는 태풍의 위험

bringbacon.tistory.com

 

이오지마에 미 해군 군종 신부 19명, 목사 58명이 이오지마에 함께 상륙한다. 군종역할은 죽어가는 장병들과 전사한 장병들을 영적으로 위로하고 출전 전 격려 기도와 예배를 드린다. 군종 신부와 목사의 가장 큰 역할은 장례식을 주관하는 것이다. 

이오지마 전투에서 참전한 군종 목사의 수기에는 "하루 100명의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2차 대전 기간 육군과 해병대 병종 중 군종의 사상률이 3번째 높았다. 1위는 보병이고 2위는 육군항공대였다.

미군은 지휘관의 이,취임식이나 주요 회의에는 군종 장교의 기도로 시작한다. 기독교, 천주교, 유대교, 이슬람교, 몰몬, 힌두교, 불교 등 모든 종교의 군종이 있다.

현재 미 육군은 정규군이 48만 명이며 군종 장교는 2,600여 명이다. 미 육군 현장 부대 군종은 1,400여 명이다. 군종은 병사들의 정신적인 부분을 관리해 주고 군인 개인의 상담과 함께 가족 공동체를 관리한다. 군인 가족이 파병을 나갔을 경우 본국에 남은 가족을 보살피는 역할을 한다. 

 

이오지마와 관련된 대표적인 두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2006년 12월 개봉), 아버지의 깃발(2006년 10월 개봉)가 있다. 두 영화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작품이다.

 

일본군 지휘관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구리바야시의 일본 내 평가는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장군이라고 평가되어 미화되고 있고 영화도 만들어졌다. 

제공권, 제해권이 없는 고립된 섬에서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지구전이었다. 구리바야시는 일인십살(一人十殺), (1명이 10명의 적을 죽인다)을 명령했고 항복금지였다.  이오지마 전투에서는 일본군 포로 약 200여 명이었고 종전 후 후속작전으로 일본군 포로 총 1,000여 명이 항복한다. 구리바야시는 항복을 못하게 하여 일본군에게 삶의 희망조차 찾을 수 없게 한다. 구리바야시의 마지막 명령은 자살 돌격이었다. 

 

이오지마의 가장 큰 문제는 식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물을 파도 유황 냄새만 진동한다. 빗물을 모아서 식수로 사용해야 한다. 참혹한 현실에서 2만여 명의 병사가 함께 생활했다. 힘든 환경에서도 2만여 명의 병사를 지휘했다. 

 

미 제21폭격기사령부 사령관 커티스 르메이는 전략 폭격의 노선을 바꾼다. 중 저고도로 야간에 지역 폭격을 시작한다. 전쟁에는 윤리가 없다, 전부다 적이다, 일단 다 쓸어버리자는 생각을 한다. 이오지마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던 르메이는 이오지마의 참담한 현실을 봤다. 전략 폭격대가 해병대 피에 대해서 보답할 차례라고 생각했다. 이오지마 공격 전 인근을 함께 미 제5함대 사령관 '레이먼드 A. 스프루언스'와 미 제21폭격기사령부 사령관 '커티스 르메이'는 순찰을 했다. 스프루언스는 르메이에게 이오지마를 공격해야 하는지 몇 번을 되물었고 르메이는 확신을 주었다. 하지만 이오지마 전투는 미 해병대의 피해가 컸고 르메이는 책임감을 느꼈다.

 

마리아나 제도에서 1944년 11월 B-29는 59대 뿐이었다. 미국 5개 생산공장에서 한 달에 약 100여 대의 B-29를 생산하여 마리아나제도에 증원했다. 1945년 7월 B-29는 총 985대였다. 1944년 11월부터 종전까지 미 제21폭격기사령부에 공급된 B-29는 총 1,437대였다. 이중 일부가 손실되어 985대만 남은 것이다. 

당시 기준 티니안 비행장은 세계 최대 규모였다. 6개 활주로를 운용한 티니안은 2개 비행장(노스필드, 웨스트필드)을 가지고 있었다. 티니안 비행장은 5만여 명의 병력을 위한 보급 물자를 수용한 미 최대 공군기지였다. 

B-29는 1대당 당시 가격은 64만 달러였고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1,000만 달러, 1대당 약 120억 원이다.

1대당 120억을 1,437대를 만들었으니 약 17조 원이 들었다. 

 

B-29 프로젝트에 기여한 르메이의 조력자는 2차 대전 당시 미 육군항공대 장교 '로버트 맥나마라'였다.

하버드 경영대학원 경영학 석사이며 1940년 8월 하버드 경영대학원(HBS)회계학 조교수로 임명된다. 나이가 34살로 하버드 최연소 조교수가 되었다. 전쟁이 나자 1943년 미 육군항공대 대위로 임관을 하고 커티스 르메이 부대에 소속된다. 당시 B-17를 계속 사용할 것인지 B-29를 대량 생산할 것인지 논쟁이 있었다. 로버트 맥나마라는 B-29 대량 생산이 비용 대비 더 효율적이라는 입장을 강하게 내세운다. B-29를 일본 본토 폭격에 집중 투입될 수 있게 한다. 르메이가 일본 본토를 폭격할 때도 효율적인 방법을 할 수 있는 조언을 많이 해준다. 

 

전쟁이 나자 '로버트 맥나마라' 같은 경영학자들이 1942년 미 육군항공대 <통계통제국>을 설립한다. 이들은 '전쟁은 경영이다'를 실천한다. 전쟁 수행을 경영학, 통계학적으로 분석하면서 '맥나마라'는 전략 폭격 의사결정에 깊이 관여한다. 저고도 폭격 선회에도 큰 역할을 했다.

 

 

살상무기 소이탄 개발

소이탄은 1차 세계대전 때 개발된다. 1차 대전 당시 독일 비행선 체펠린으로 영국 런던을 폭격하면서 처음 사용된다. 독일은 폭격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화재를 일으킬 무기로 소이탄을 개발한다. 개발은 쉽지 않았고 여러 방법을 찾다가 방향을 찾기 시작한 것은 테르밋을 이용하면서부터이다.

테르밋 가루는 알루미늄 가루와 녹슨 철 가루 산화철을 합친 것이다. 여기에 불을 붙이면 녹슨 철에 결합된 산소가 알루미늄으로 옮겨가면서 강력한 연소반응으로 고온, 고열(2,500~3,000도)을 발생하여 쇠를 녹이며 용접된다. 골트슈미트 반응이라고 한다. 

 

독일은 테르밋을 이용해 소이탄을 개발한다. 테르밋 분말에 폭약을 첨가해서 떨어뜨리면서 터트리면 고온의 화염이 발생하고 건물을 불태운다. 독일은 기술을 완성하기 전에 종전이 된다. 

미국의 폭격기 마피아는 정밀 폭격에는 소이탄보다 고폭탄을 이용해서 정확하게 떨어뜨리고 박살내야 한다고 생각했고 고폭탄이 소이탄보다 우월하다는 믿음이 확고해서 미 육군 항공대는 소이탄 개발을 하지 않는다.  화학병과는 소이탄에 관심을 보인다. 1차 대전 이후 1925년 6월 제네바 의정서에 독가스 사용이 금지된다. 미군 화학병과에서는 소이탄 연구를 한다. 그러다 2차 대전에서 독일 전략 폭격을 통해 소이탄 가능성을 확인한다. 유럽 전략 폭격 당시 테르밋 소이탄을 영국과 독일은 쏟아 붓기 시작한다. 

 

1943년 영국의 독일 함부르크 폭격에는 마그네슘 소이탄이 투하됐다. 마그네슘 소이탄의 효과를 보고 미국은 만들려고 했지만 마그네슘은 전략 물자였다. 마그네슘 합금은 가볍지만 강도가 높아 항공기, 무기 등의 재료로 많이 쓰인다. 소이탄을 만들 정도로 많은 양의 마그네슘을 확보할 수 없었다. 저렴하고 효과적으로 불을 낼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화염 방사기에서 힌트를 얻는다. 1차 대전 현대식 화염 방사기는 독일군에 의해 최초로 사용된다. 휘발유를 쓰면 효과가 좋지 않다. 휘발류를 사용하면 휘발성이 강해 짧은 시간 연소 후 증발해 버린다. 휘발유에 천연고무를 섞어서 끈적끈적한 젤리 형태로 만들면 효과가 좋다는 것을 알아냈다.

 

하지만 1941~1945년 일본이 말레이시아를 점령하면서 천연고무 공급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1940년 설립된 국방연구위원회(NDRC) 과학자들에게 천연고무 대체품 개발을 요청한다. 

하버드 대학 유기화학자 '루이스 피저'는 혈액 응고와 뼈, 칼슘 대사에 필요한 비타민K를 최초로 합성했고 말라리아 치료제 '퀴닌', 스테로이드 호르몬 코르티손을 개발했다. 

루이스 피저에게 젤리를 만들 수 있는 대체품을 의뢰하였고 루이스 피저는  '네이팜'을 개발한다. 가솔린에 섞어서 끈적끈적한 형태를 만들수 있는 분말 형태의 증점제(네이팜제)를 만들었다. 전쟁후기 증점제(네이팜제) 분말을 지급해서 현장에서 가솔린과 섞어 네이팜탄을 제조해 떨어뜨린다. 

 

개발 초기에는 네이팜탄을 제조해 공급했다. 가솔린처럼 폭발성이 강한 물질이 젤리처럼 어디 붙어서 한 번에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타는 것이다. 

네이팜을 개발하고 나서 효과적인 화재 발생을 위한 네이팜 용기를 개발하기 위해 고민을 시작한다. 미 석유 기업 스탠더드 오일 '뉴저지사'와 연구를 진행한다. 그래서 신형 소이탄 M69를 개발한다. 

B-29에서 투하된 집속 소이탄은 설정된 높이 도달 시 38개 M69 소이탄이 분리되어 지붕을 뚫고 내부로 떨어진다. 조금 있다가 신관이 작동해서 TNT가 터지면서 안에 있던 네이팜을 불이 붙은 상태로 바깥으로 분출한다. 불이 붙은 상태로 여기저기 들러붙어 불에 약한 목조건물은 계속 불이 타오른다. 떨어진 직후 불이 커지기 전에만 물로 소화가능하다. 타고 있을 때는 물로 잘 커지지 않는다. 1942년 M69 소이탄이 완성됐고 1943년 성능시험 및  네이팜제 개량을 완료시킨다. 1944년 M-69 소이탄 대량 생산을 시작한다. M69 소이탄은 종전까지 약 3,000만 개가 생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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