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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격전지 이오지마 전투

by 소시민스토리 2024.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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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전지 이오지마 전투

1944년 12월 미 해군을 덮친 기상재해는 태풍 코브라였다. 1944년 12월 17일 필리핀 해상에서 연료를 보급 중이던 윌리엄 홀시 사령관의 미 제3함대 38 기동부대는 태풍의 위험성을 간과하고 대피가 늦어졌다. 태풍 코브라는 구축함대를 강타했고 구축함 3척이 격침된다. 함선 9척이 대파되고 20여 척이 손상돼서 미 해군 790여 명이 사망했다. 홀시 사령관은 맥아더가 요청한 민도르섬 공습을 위해 태풍이 다가오는데도 급유 작업을 진행하다 태풍 피해를 입었다. 

1944년 12월 25일 태풍 피해에 관한 청문회가 소집되었고 홀시 사령관의 지휘권은 1945년 1월 26일 스프루언스에게 넘기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 본토 공격의 시작, B-29 폭격기

 

미 육군항공대 및 제 20공군 사령관 '헨리 아놀드'에게는 엄청난 성과 압박을 받고 있어서 새로운 활로가 필요한 B-29 프로젝트였다. 미 제21폭격기사령부 마리아나 기지가 완공된다. 1945년 1월 청두 전진기기 B-29는 1945년 3월 말 마리아나 기지로 단계적 철수를 한다. 

1945년 1월 미 제21폭격기사령부 사령관 '헤이우드 한셀'을 경질하고  제21폭격기사령부 신임 사령관은 '커티스 르메이'로 임명한다. 커티스 르메이는 부임하고 전임자 '헤이우드 한셀'처럼 고고도 정밀 폭격을 한다.

 

 

1945년 1월~3월 초까지 일본 본토 폭격 8차례를 실행한다. 6번은 정밀 폭격을 했고 2번의 지역 폭격을 했다. 

정밀 폭격은 한셀이 한 것보다 더 성과가 없었고 지역 폭격도 성과가 없었다. 

이 와중에 헨리 아놀드와 커티스 르메이에게 엄청난 압박을 주는 소식이 날아온다.

1945년 2월 16일 이오지마 상륙 3일 전에 제5함대 58기동부대 마크 미처 사령관이 도쿄를 공습했다. 

미 해군 58기동부대 함재기가 도쿄를 공습한 것이다. 미 해군과 해병대의 이오지마 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 비행기를 없애겠다는 목적이었다. 

미 제58기동부대 전력은 5개 기동전단에 정규항모 11척, 출진했던 함재기는 1,170여 대였다.

 

 

1945년 2월 16일 06시 00분에 도쿄 남동쪽 약 193Km 해상에서 출격하여 첫날 도쿄만 일대 비행장을 파괴한다. 야간에도 폭격하여 일본군 항공기 500대 이상 파괴하여 거의 괴멸시킨다. 이튿날 1945년 2월 17일, 미 제21폭격기사령부 2대 사령관 헤이우드 한셀이 파괴하려다 실패한 당시 일본군 항공기 단일 생산량 40%를 차지하던 공장, 도쿄의 나카지마 비행기 제작소를 대파시켰다.

급강하폭격기가 아닌 함재기들로 일궈 낸 성과였다. 미국 신문과 언론은 미 해군의 도쿄만 공습 성과를 집중보도한다. 미 해군이 성과를 내자 30억 달러 개발 비용인 든 B-29 프로젝트로 성과를 못 내고 있던 미 육군항공대 사령관 헨리 아놀드는 피가 마르기 시작한다. 

 

당시 헨리 아놀드는 심장마비로 쓰러진 뒤 플로리다에서 휴양 중이었다. 미 제21폭격기 사령부 사령관 커티스 르메이는 해군 성과 소식을 듣고 1945년 2월 19일 B-29 150여 대를 발진해서 같은 업체, 다른 공장 나카지마 비행기 무사시 제작소를 폭격시도한다. 하필 구름에 가려 대부분의 폭탄이 빗나간다. 

 

헨리 아놀드의 새로운 활로는 이오지마였다. 이오지마는 도쿄와 마리아나 기지와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일본군 레이다 기지가 이오지마에 설치되어 있어 이오지마를 우회해서 도쿄로 가야 한다. 우회해서 가려면 항로가 길어진다. 이오지마는 유황도(硫黃島)라고 해서 냄새가 고약했다. 면적은 20.3㎢로 작은 섬이다. 

B-29 평균 비행고도는 8,200m 이지만 폭격 정밀도를 높이기 위해 고도를 낮추었는데 그때 일본기 요격기에 공격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 폭격기에는 호위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마리아나 기지부터 호위 비행은 항속거리상 불가능했다. 만약 이오지마에서 호위기가 출격한다면 호위전투기 항속거리를 감안해서 최적지가 된다.

B-29가 작전나갔다가 돌아올 때 불시착하는 경우도 있어 불시착 기지가 필요했다. 이러한 이유로 이오지마는 전략적 가치가 있는 장소였다. 

30여 개 섬으로 이뤄진 오가사와라 제도에는 이오지마보다 조금 더 큰 치치지마가 있었지만 지형상 비행장을 만들기가 어려웠다. 당시 이오지마 비행장은 3곳이며 작지만 기착지로는 충분했다. 활주로 규모가 전투기를 출격할 정도로 충분했다. 

 

이오지마 상륙을 결정한 최종 시기는 1944년 9월 29일~10월 1일 미국 센프란시스코에서 열렸던 미 태평양해역군 실무회의(전략계획회의)에서 결정된다. 미 함대 총사령관 어니스트 킹, 미 태평양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미 제5함대 사령관 레이먼드 스프루언스가 참석하여 미 해군 수뇌부가 출동했고 육군에서는 미 제10군 사령관 사이먼 B. 버크너, 미 태평양지역군 육군항공대 사령관 밀라드 하몬이 참석을 했다.

 

1944년 9월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니미츠는 이오지마 공략을 거론했다. 미 합동참모본부 결정으로 맥아더의 육군은 1944년 12월 20일 루손섬을 공격하고 해군은 지원을 해준다. 미 해군은 1945년 1월 20일 이오지마를 공격한다.  1945년 3월 1일은 오키나와를 공격한다는 결정을 내린다. 해군이 오키나와를 공격하면 육군은 지원을 해주기로 한다. 작전명은 '디태치먼트 분리작전'이다. 1945년 2월 16일~ 2월 19일까지 3일간 이오지마에 미 전함의 사전 포격이 쏟아진다. 이오지마 상륙작전에 동원된 미 함선은 450여 척이었다. 1945년 2월 19일 3만여 명의 미 해병대가 이오지마 상륙을 개시한다. 미 해병대 상륙 시 일본군 공격은 없었다. 일본 계획은 미군 상륙 후 내륙 500m 진입하면 집중포화할 계획이었다. 미 해병대가 킬 존 진입하자 해안 진지와 2개 비행장에서 일본군이 집중포화한다. 치열한 집중포화는 이제까지 미군이 경험해보지 못한 공격이었다.

 

 

이오지마 상륙 첫날 미군 사상자 2,420여 명이었다. 이오지마는 미군과 일본군 모두에게 죽음의 격전지였다. 너무나 처참하게 싸우다 죽어서 엉켜있다보니 미군과 일본군을 군화를 보고 구별할 정도였다. "이 섬의 땅 1평을 차지하기 위해 피 1리터를 쏟아야 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1945년 3월 26일 한 달간의 격전 끝에 겨우 이오지마를 미군은 점령했을 때 미 해병대의 전사자는 6,821명이었다. 부상자는 21,865명이었다. 이오지마를 점령하기 위해 증원 부대 포함 미군 병력을 총 6만여 명을 투입했다. 한 달간의 전투로 전사상자가 3만여 명으로 2명 중 1명이 다치거나 전사했다. 

2차 세계 대전 미 해병대 최대 사상자였다. 이후 전투피로증 환자들이 발생한다. 이오지마에서 전투피로증 환자는 2,600여 명이 발생하고 이후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전투피로증 환자가 2만 여명이 발생한다. 

※전투피로증(Combat stress reaction(CSR)은 전투 스트레스로 인해 나타나는 일시적인 행동 반응으로 전투 효율을 감소시킨다. 당시에는 '전쟁발광증'이라 불렀다.

 

 

일본 이오지마 전투 준비

1944년 6월 이후 이오지마의 방어태세가 변화했다.1944년 6월 육, 해군 4개 대대 6천여 명이 배치되었다. 1944년 7월 미군이 마리아나 제도를 점령하면서 일본 군부에서는 방어태세를 획기적인 방어태세가 필요하다고 해서 새로운 지휘관 일본 육군 제109사단 사령관 '구리바야시 다다미치'였다. 도조 히데키가 직접 선발하여 발령을 내렸다. 1944년 당시 오가사와라 제도의 가장 큰 섬 치치지마와 이오지마 방어를 통합해서 구리바야시가 지휘한다. 구리바야시는 자신의 임무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오지마는 최전선이 될 것이며 지연전을 펼쳐 미군의 일본 본토 공격을 최대한 막아야 한다고 판단한다. 구리바야시는 미국 유학파로 미군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1944년 6월 8일 이오지마 부임 후 섬 구석구석을 직접 돌아보고 기존교리에 따라서 수제방어에 입각해 해안에 바짝 구축된 방어 진지들을 뒤로 물리라고 한다. 해안 가장자리의 수제 격멸이 아니라 적을 연안으로 끌어들여 연안 격멸로 교리를 바꾼다. 적군이 상륙을 하면 반격을 한다는 것이다. 

 

방어병력의 중심을 이오지마로 이동한다. 구리바야시는 미군이 이오지마를 공격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치치지마는 산지가 많아 비행장 건설이 어렵기 때문에 이미 3개 비행장이 건설,운용 중인 이오지마는 미군에게 전략적 가치가 있을 것이라 판단을 한다. 

1944년 사이판이 미군에 점령된다. 사이판으로 보내려던 일본 증원부대를 이오지마로 투입시킨다. 보병 제145연대, 전차 제26연대가 이오지마에 증원된다. 이오지마는 일본군 병력 6,000여 명에서 20,000여 명의 병력으로 증강된다.

 

구리바야시는 요새를 강화하는데 엄청나게 신경을 쓴다. 지하갱도를 파서 지하 기지를 연결하는 10~20m 깊이 교통로를 건설하여 미군 정찰과 폭격을 대비했다. 총 18Km 갱도를 건설한다. 갱도는 징용된 조선노동자들이 팠다. 이오지마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 군인, 노무자 200여 명이었다. 

1944년 당시 이오지마 면적은 약 20.3㎢로 여의도의 7배정도이다. 일본군 병력 20,000여 명과 노무자 2,000여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오지마에서 육군과 해군의 갈등이 있었다. 개전 후부터 이오지마 방어를 담당했던 일본 해군 육전대(약 7,000여 명)는 지하갱도를 만들자는 구리바야시의 말을 거부한다. 

 

해군의 임무는 비행장을 정비해 언제든지 해군기를 출격하는 것이지 지하 진지를 구축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거부를 한다. 당시 구리바야시를 압박한 문제는 갱도 건설에 필요한 시멘트, 철근 등 공사 자재 부족이었다. 

구리바야시는 해군에게 자재를 요청해주면 노동력을 제공하겠다고 하여 공사 자재를 보충한다.

구리바야시는 나중에 이 일을 두고 후회했다고 한다. 18Km 지하갱도 중 약점이 존재했는데 이오지마의 상징적인 랜드마크 스리바치산 아래 7층으로 된 지하요새를 건설했는데 구리바야시 사령부와 지하갱도로 연결이 되지 못했다. 산까지 연결하려고 갱도를 파고 있는 도중에 미군이 상륙을 했다. 해군 비행장을 만드는데 노동력을 낭비하지 않고 지하 갱도를 파는 데 총력을 다했다면 완성해서 더 치열하게 저항이 가능했을 것이라 안타까워했다. 

 

미군은 이오지마를 쉽게 점령할 수 있을것이라 오판을 했고 구리바야시 다다미치는 이오지마를 쉽게 미군에게 넘기지 않은 지휘관이었다. 미국을 잘 아는 지미파(知美派)였던 구리바야시는 권력에서 소외돼 이오지마로 좌천됐다는 평가가 있다. 당시 지미파(知美派)들은 일본 군부 내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미군을 오판해서 고전하고 있다는 쓴소리를 조금씩 내기 시작했고 수뇌부는 언짢아했다. 일본 군부는 지미파(知美派)의 쓴소리에 현장 지휘관으로 배치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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