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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일본 본토 공격의 시작, B-29 폭격기

by 소시민스토리 2024.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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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본토 공격의 시작, B-29 폭격기

1944년 6월 16일 B-29 일본 본토 첫 공습이 있었다. 일본 고사포는 1만여 발을 발사했다. 하지만 B-29 단 1대도 격추시키지 못한다. 야간에 고고도 폭격기를 겨냥한 대공포는 조준 사격이 아니다. 예상 접근로, 취약지역에 상공 등에 화망을 구성해야 한다. 화망을 구성하면 폭격기들이 화망안에 들어서는 것을 피하려고 한다. 화망이 형성된 중요지역 상공에 폭격기 접근 차단 효과가 있다. 미 전략 폭격기 B-29 폭격고도는 9,100~9,700m였는데 일본 99식 8cm 고사포는 유효사거리 고도 8,000m였다. 일본 고사포는 B-29 폭격기까지 다다르지 못했고 날아가는 미 폭격기 한참 아래에서 터졌다.

 

미국의 정밀 폭격, 폭격기 마피아

 

미국의 정밀 폭격, 폭격기 마피아

미국의 정밀 폭격, 폭격기 마피아 미국은 영국과 달랐다. 주간 고고도 정밀 폭격을 주장한다. 1939년 9월 2차 대전 루스벨트 대통령은 프랑스, 영국, 독일을 향해서 전쟁은 민간인, 요새화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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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말~1944년대에는 일본의 전쟁 패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생산체제는 무너지고 있었다. 전쟁 초기 승리에 들떠 남방지대 고무 자원이 공수되어 국민학교에 고무공이 지급되고 했는데 고무가 모자라 다시 회수하는 지경에 이른다. 항공결전을 주력으로 하다 보니 기하급수적으로 항공기 소모량이 늘어났다. 새로운 신형 전투기가 생산되자마자 전쟁터로 나갔고 방공용으로는 배치가 안 되었다.  

1943년 과달카날 전역 이후 도조 히데끼는 수세에 몰리며 히스테릭해졌다. 말을 하지 않고 메모를 써서 명령하는 일이 많아졌다. 어느날 비서에게 메모를 던졌다. 메모에는 일본 내 직조공장을 항공기 조립공장으로 바꾸라고 되어 있었다. 1943년 7월 일본 상공성 명령은 200평형 이상 규모의 직물, 방직공장을 군수공장으로 전환하라는 명령이다.

 

 

직조공장에 일하고 있던 여고생, 여성들에게 항공기 조립 기술을 가르친다. 여성 근로정신대는 12세~40세 일본 미혼여성 및 강제동원한 식민지 여성들을 군수공장에 배치해 노동력을 착취했다. 

1944년 일본 항공기 생산량은 약(1943년 대비)70% 증가한다. 비 숙련공인 여학생들이 항공기 주요 조립부품을 생산하다 보니 각 공장마다 표준화가 불가능했다. 

 

일본 A 공장에서 생산한 부품이 항공기에 조립해보면 맞지 않았다. 현장에서 깎아서 억지로 맞췄다. 그래서 실전에서 항공기 문제가 발생한다. 악순환은 계속 이어지고 해결책을 전쟁 끝날 때까지 찾지 못한다. 

일본 항공기 생산 1,000대를 생산하면 실전 투입 가능 항공기는 400대였다. 노련한 비행기 조종사들이 전쟁에서 다 죽고 초보 비행사만 남았다. 몇몇 남은 베테랑 조종사들이 초보 조종사를 가르치려 했지만 연료가 부족해서 훈련이 부족한 상태로 실전에서 훈련을 하기로 한다. 베테랑 조종사 지휘 아래 신참이 모는 7~8대가 출격한다. 한번 나갔다 오면 신참 비행사들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일본은 본토 공습에 대비해 미 폭격기 소리에 주목하고 있었다.

B-27 등 미 항공기 4종의 고도별 비행음이 담긴 레코드판 제작을 해서 국민학교에 등에 배포했다. 

 

 

2차 대전 동안 미국이 가장 많은 개발비용을 들인 B-29 슈퍼 포트리스의 개발 비용은 30억 달러였다. 

기존의 중폭격기 B-17 플라잉 포트리스, 대형폭격기 B-24 리버레이터를 가지고 있어서 B-29를 만들어야 되는지 비판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미 육군항공대 사령관 헨리 아놀드는 꿋꿋하게 버티면서 적극적으로 루스벨트 대통령을 설득해서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헨리 아놀드가 B-29 프로젝트에 집착한 이유는 새로운 차원의 폭격기였기 때문이다. B-29 폭장량 9톤이었고 더 중요한 항속거리는 최대 9,000Km였다.

 

헨리 아놀드는 B-29로 태평양 점령지에서 일본 본토를 바로 타격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일본 열도 길이는 약 3,000Km이기 때문에 항속거리가 긴 B-29가 필요했다. 처음부터 B-29는 일본을 타깃으로 했다. 

현지시각 1944년 6월 15일 오후 16시 16분 청두 항공기지에서 일본 본토로 첫 출격을 했다. 

6월 16일 새벽 00시 38분에 규슈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에 있는 야하타제철소에 도착해서 습격을 한다. 107톤의 폭탄을 370발 투하한다. 하지만 야하타제철소 가까이 떨어진 폭탄은 5발이었다. 시내에 떨어진 폭탄에 기카큐슈 시민 256명이 사망했다. 일본 본토 폭격 2개월 동안은 성과는 흡족하지 못했다. 인도-중국 권역에 유럽 전선에서 활약하고 있던 커티스 르메이를 불러들인다. 커티스 르메이는 1944년 8월 20일 제20 폭격기사령부 사령관으로 부임한다. 

일본본토 폭격 출격 횟수를 월 1~2회에서 월 4회로 늘렸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야하타제철소를 폭격한 이유

태평양전쟁 당시 야하타제철소는 일본의 가장 중요한 제철소로 압연 철강 제품 24%를 생산하고 있었다. 일본에는 철광석은 수입을 했고 석탄은 있어서 홋카이도에 이어 일본을 대표하는 탄광지대가 규슈이다. 탄광이 항구에 인접해 수송이 편리했다. 산업인프라 중에서 제철소를 공격하는 것이 미국 전략이었다. 

야하타제철소는 태평양전쟁 중반 철강 생산 능력은 약 300만 톤이었다. 

포항제철소 1기의 철강 생산 능력은 103만 톤이었다. 야하타제철소는 1940년대 당시 일본 제1의 체철소였다.

1930년대 일본 7개 제철소가 합병하여 국영 체제로 집중시켜 (구) 일본제철이 설립된다. 일본제철은 연합군의 재벌 해체 방안에 따라 1950년 4개 회사로 분할된다. 분할된 4개 회사 중 제철업을 승계한 2개 회사가 재합병(1970년)하여 신(新) 일본제철이 설립된다. 한때 철강생산 세계 1~2위를 다툰 신일본제철과 포항제철이었다. 

 

포항제철소 설립 당시 대일청구권 자금 및 제철 기술도입을 교섭하면서 야하타제철소와 그 후신인 신일본제철에서 기술을 전수했다. 다른 선진국들에서는 제철기술을 전수해 주지 않으려 했고 박태준 회장은 야하타제철소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어렵게 기술을 전수받을 수 있었다. 포항제철(포스코)은 2021년 제36차 글로벌 철강 전략회의에서 세계 최고 철강회사 1위에 선정되었다.

 

규수의 궂은 날씨에 일본 폭격을 주춤하고 있던 사이 1944년 7월 사이판이 함락된다. 마리아나제도에 B-29 출격기지 건설을 시작한다. 북마리아나 제도 사이판, 티니안, 괌에 대규모 비행장이 건설된다. 마리아나 기지 확보로 일본 본토 폭격은 차원이 달라진다. 핵심 혼슈를 비롯한 일본 전역이 B-29 공격 범위에 들어온다. 특히 가장 많은 인구가 밀집해 있는 최우선 타격 목표 도쿄를 공격할 수 있게 된다.

태평양지구 전략폭격을 지휘한 헤이우드 한셀은 폭격기 마피아의 핵심멤버 중 한 명이었다. 일본 항공기 공업시설을 타깃으로 한다. 도쿄에 자리한 4곳의 나카지마 비행기 무사시 제작소는 주로 일본 육군용 항공기, 엔진을 생산했다. 제로전투기 등 일본 해군 항공기는 주로 미쓰비시에서 제작되었다. 정밀 폭격 타깃은 혼슈에 자리한 항공기 공장이 된다.

 

제21폭격기사령부 사령관 헤이우드 한셀은 1944년 10월 사이판에 도착해서 보니 B-29가 집결이 지연되었고 도착한 B-29는 고장, 수리가 필요했다. 아직까지 활주로는 건설이 안 된 상태여서 제21폭격기사령부 도착 한 달 후에 첫 출격을 실시한다.

1944년 11월 24일 마리아나 기지에서 B-29가 첫 출격을 한다. 도쿄 나카지마 비행기 무사시 제작소를 정조준하며 B-29는 111대가 발진한다. 출격한 111대 중 B-29 88대만 목표 상공에 도착했다. 17대는 연료 문제로 회항을 하고 6대는 기계 결함으로 항로를 이탈했다. 목표 상공에 다다른 1대가 격추당한다. 

 

목표물 근처에 폭탄을 투하한 B-29는 24대였다. 당시 보고서에 따르면 공장의 1%만 피해를 입혔다고 한다.

조준 불가능한 기상으로 정밀폭격이 불가했다. 3일 뒤에 출격을 했지만 구름이 타깃을 가렸다. 1944년 12월 3일 나카지마 비행기 무사시제작소 3번째 출격을 한다. 엄청난 바람으로 실패를 한다. 1944년 12월 13일 4번째 출격을 한다. B-29 31대가 피격당해 4대가 격추당한다. 연달아 똑같은 코스로 날아오는 B-29를 일본이 기다리고 있다가 대공포 화망을 형성하고 요격기를 출격시켜 격추시켰다.

 

 

몇 달간 정밀 폭격의 성과는 미비했고 승조원의 희생을 점점 커지고 있었다. 헨리 아놀드 미 육군항공대 제20 공군 사령관은 초조했고 주변 압박이 심해지고 있었다. 미 제21폭격기사령부 사령관 헤이우드 한셀은 정밀 폭격에 대한 믿음이 워낙 강했고 주변에서 주간 지역폭격을 하라고 하지만 끝까지 거부한다. 

헨리 아놀드는 사면초가에 빠진다. 어니스트 킹 미 함대 총사령관. 해군참모총장은 B-29와 육군항공대를 데리고 해군항공대와 합류하면 전 세계에서 미 해군은 가장 크고 강력한 조직이 될 수 있다고 설득한다. 미 남서태평양지역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B-29로 지상군 작전 지원을 도와달라고 한다.

체스터 니미츠 미 태평양함대 사령관도 한 마디 보탠다. B-29로 해군작전을 지원해 달라고 한다. 

B-29로 정밀 폭격 성과를 내지 못하는 헨리 아놀드는 속이 타들어 간다. 1943년~1945년까지 심각한 심장마비만 4차례가 왔다. 심장마비로 쓰러졌던 1944년 5월과 1945년 1월에는  B-29문제로 골머리를 쏟고 있을 시기였다. 1950년 64세 나이에 심장질환으로 별세했다.

 

정밀 폭격의 가장 중요한 실패 요인은 기상이었다. 기술로 고려하지 못한 기상의 비밀이 있었다.

일본 상공에는 강한 바람(제트기류)이 불고 있다. 일본 고고도 상공에서 폭탄을 떨어뜨리면 그대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폭탄이 떨어지는 중간에 바람이 강하게 불어 폭탄이 마치 나풀거리듯 떨어진다. 미국 상공에는 제트기류 발생이 드물다. 한국과 일본의 기상에 제트기류가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제트 기류와 풍선 폭탄

 

 

일본은 제트기류를 알고 있었고 전쟁에 제트기류를 이용한다. 폭탄을 매달아 풍선을 띄워서 제트기류에 실어서 미국까지 보내는 작전을 시행한다. '후고병기'라고 부른다. 1944년 11월~1945년 3월까지 풍선폭탄 약 9,300개를 만들어 미국으로 날려 보낸다. 물자가 부족해서 고무로 풍선을 만들지 못하고 닥나무, 뽕나무 등의 속껍질이 원료인 일본 종이 화지로 만들었다. 화지를 곤약풀로 여러 겹 덧붙인 종이풍선이었다. 방수접착제를 발라 풍선 표면이 질겨서 오랜 시간 버틸 수 있었다.  풍선에 매달은 15Kg 폭탄 1발과 5Kg 소이탄 4발을 달았다.  숲이 많은 미국에 산불을 일으키려고 소이탄을 탑재했다.

 

미국에서 발견된 풍선 폭탄은 약 10%로 추정된다. 일본과 미국은 약 8,000Km 떨어져 있는데 풍선 폭탄은 3~4일 만에 도착했다. 제트기류 시속 200Km 강풍을 타고 미국으로 날아갔다. 가장 멀리서 발견된 풍선 폭탄은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였다. 디트로이트 교외에서 풍선 폭탄의 기계장치가 발견되었다. 1945년 5월 5일 미국 오리건주에 살던 미첼 목사 부부가 주일학교 학생 5명과 함께 숲으로 소풍을 갔다. 대형풍선을 발견하고 만지다가 폭발을 해서 목사 아내와 5명의 아이들이 사망했다. 목사는 주차 중이어서 생존했고 목사 아내는 임신 중이었으며 풍선 폭탄에 희생된 아이들의 나이는 11~14세였다. 

 

일기예보는 영국이 시초다.   찰스 다윈이 진화론의 바이블 <종의 기원>을 쓰기 전에 영국 해군 측량선 비글호를 타고 남미, 남태평양을 탐사하고 나서 5년간의 탐사를 토대로 집필한 <종의 기원>으로 진화론 기초를 정립했다. 영국 해군 제독, 과학자 '로버트 피츠로이'는 다윈이 탔던 비글호 선장이었다.

로버트 피츠로이는 세계 곳곳의 다양한 기상 현상을 접한다. 영국 근해는 바다가 험했다. 칼레해전 이후 영국을 빙 돌아가는 귀항길에 오른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북해의 거친 풍랑에 44척이 침몰했다. 영국 배들도 거친 풍랑에 속수무책이었다. 1855~1860년 영국 근해에서 7,402척이 난파한다. 언제 풍랑이 부는지 일기예보가 필요했다. 1861년 영국 일간지에 세계 최초로 일기예보를 정기 연재한다. 온도계, 기압계, 습도계 등 정밀한 측정기구가 발명이 되어 곳곳에서 측정을 해본다. 수집한 데이터를 보고 과학적인 측정량과 자연현상의 연관성을 파악하면서 기상학이 발전했다. 

 

미국은 2차 대전 이전까지 기상학 인력들이 많지 않았다. 미국이 기상학의 중요성을 깨달은 계기는 1차 대전 때 영국이 일기예보를 작전에 활용하는 것을 보고 2차 대전 개전 후 박사급 기상 전문인력을 대거 양성하여 육군과 해군에 골고루 배치한다. 2차 대전 후 전 세계 기상학을 선도한다.

미국 전자식 디지털 컴퓨터 에니악으로 기상관측자료를 분석하고 현대적인 기상관측, 분석, 예보시스템을 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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