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 브랜드 시작, 포니
1973년 중화학 공업화가 선언된다. 박정희 대통령은 철강, 조선 등과 함께 자동차 공업 육성을 주요 과제로 삼았다. 1년이 지난 1974년 10월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포니가 공개되었다. 한국의 자동차 시작을 알리는 포니가 탄생하였다.
1980년대 포니 택시 택시 요금은 600원이었고 스텔라 중형택시 요금은 800원이었다. 포니 이전에는 일본차를 카피한 차들이 대부분이었고 레코드 로얄, 마크IV 같은 일본차나 미국차를 수입해서 조립해서 차를 만들었다. 포니가 국산차의 포문을 열어주었다. 자동차 산업은 어려운 산업이다. 자동차를 생산하고 대중화시킨 나라는 극소수로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이다. 한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자동차 산업을 일으켜서 대중성을 갖춘 자동차 국가적 브랜드를 소유한 국가로 후발 자동차 산업국 중 독보적인 아시아 국가가 한국이다. 현대기아자동차는 현재 가장 권위 있는 상 중에 미국 시사주간지 U.S뉴스&월드리포트'에서 각 차량의 품질과 상품성을 고려하여 평가하는 '최고의 고객 가치상'에 2년 연속 선정되었다.
식민 지배를 당한 국가의 꿈은 고유 브랜드를 가지는 것이다. 박정희 정부에서 60년대부터 자동차 국산화율을 80%까지 높이고자 했다. 1960~1970년대 초 한국 경제 상황으로는 자동차라는 집약적인 물품을 만들 수 없었다. 자동차 산업은 양산까지 가능해야 하는 산업으로 여러 기술이 집약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한국의 자동차 산업이 놀라운 성과를 낸 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 시작점이 포니에서 시작됐다.
1950~60년대는 럭셔리 모델이 유행했고 이후 컴팩트 모델로 바뀌면서 대중화가 된다. 1970년대 이후에는 창의적인 디자인을 가진 자동차가 인기가 있었다.
시발(始發) 자동차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산 자동차로 6.25 전쟁 이후 미군이 버린 지프 엔진을 조립해 생산했다. 우리 자동차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는 시발자동차였다.
영화 <백 투더 퓨처>에 나오는 차, 드로리안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여행할 때 타고 다니는 차다. 드로리안을 디자인 한 사람은 포니를 디자인 한 사람이다. 드로리안은 포니 쿠페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 된 차다.
당시 출고된 포니의 가격은 227만 3,270원이었다. 당시 인기가 있었던 70년대에 분양한 현대 압구정동 아파트 가격은 880만 원이었다. 포니는 가장 비쌌던 아파트의 1/4 가격이었다.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첫 해 출시하자 마자 약 1만 726대 판매기록을 올렸다. 당시 시장 점유율은 43.6%였다. 그다음 해에는 54.1%로 급상승했다.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 두 대 중 하나는 포니였다.
포니는 해외 모델의 부품을 수입하거나 합작했던 기존 차량보다 가격이 쌌으며 국산화가 약 80% 정도였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1960년대 정부 목표는 자동차 국산화율 80% 달성, 자동차 생산 50만 대 달성이었다. 1960년대 초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고 미국에 차관을 요청한다. 하지만 미국은 차관 요청을 거절한다. 미국은 한국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노동집약적인 경공업이 적합하다고 한다. 경공업만으로는 경제발전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하고 독일로 투자를 받기 위해 떠났다. 독일에 가서 독일 고속도로 아우토반을 보고 놀랐다. 아우토반은 히틀러가 독일의 경제부흥을 위해 1930년대부터 건설한 대규모 고속도로이며 전후 자동차 산업의 폭발적 성장을 견인하며 '라인강의 기적'의 기반이 되었다.
고속도로와 자동차를 보고 한국에도 중공업을 가져야 강한 국가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1970년대는 남한과 북한이 경쟁하던 시대였다. 북한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은 고속도로 건설과 자동차 개발이었다. 60년대였으니 허황된 이야기로 여겨졌다. 부족한 자본과 기술력에도 경부고속도로 건설로 꿈을 키웠다.
경부고속도로는 서울 서초구에서 부산 금정구까지 연결되며 국토 대동맥으로 불린다. 당시에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경부철도를 타고 12시간이 걸렸다. 반나절이 지나야 도착한 대전역에서 국수 1그릇 30원을 주고 서둘러 허기를 채우고 남은 길을 떠났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5시간 만에 서울에서 부산을 갔다.
경부고속도로 총 공사비는 430억 원이었다. 1959년 정부 총예산의 13%에 해당한다. 자본뿐만 아니라 기술력과 장비도 모자랐던 시절이었다. 그때 현대건설이 혜성처럼 나타났다. 현대건설은 태국 파타니-나라티왓 고속도로(1968년 3월 준공)를 준공한 경험이 있었다. 태국에서는 적자를 기록했고 그때의 기술을 바탕으로 베트남 항만 공사를 수주했다.
정치적 반대 여론과 시위가 들끊던 상황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노선을 직접 검토하고 토목공사에 군대까지 투입시킨다. 경부고속도로 개통사업은 전 국가적 사업이었고 정주영 현대건설 회장과 함께 성공시킨다.
개통당시 경부고속도로 통행량은 하루 평균 1만 대에 그쳤다.
정부 지침은 1972년에서 1980년까지 국산 자동차 50만 대 생산하고 자동차 수출 1억 5천만 달러 달성이었다.
국산 자동차 계획에 착수한 현대 자동차와 신진 자동차, 기아산업이 자동차를 만들겠다고 한다.
기아와 신진은 일본 모델을 수입해서 만든다고 했고 현대자동차는 우리 고유 브랜드를 만들겠다고 제안서를 낸다. 제안서를 본 박정희 대통령은 '고유모델'에 마음이 기울였다.
정주영 회장과 박정희 대통령은 사이가 돈독했고 그런 계기가 있었다.
1972년 8월 3일 사채동결조치를 발표한다. 정부가 기업들이 빌린 사채를 동결시키고 일정 기간 갚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을 발표한다. 1970년대 정부가 금융을 지배하기 때문에 은행 문턱이 높았다. 1970년대 은행에서 대출받지 못한 기업들은 연 46%에 달하는 사채시장에 눈을 돌렸고 1969년부터 부실기업이 등장했다. 정부는 부실기업 정리 방침으로 이유를 조사했더니 부실기업의 원인 중 하나는 부동산 투자였다. 부동산 투자는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연결되어 있었다. 경부고속도로 지역거점에 부동산 투자를 기업이 한 것이다. 부동산에 투자해서 자금이 막히면서 부실기업이 등장했다. 국가 경제를 위해 8.3 사채 동결 조치를 결정한다.
1965년 한국 기업의 부채비율은 93.7%였다. 1971년, 394.2%로 급상승한다.
현대자동차의 또 다른 위기는 1968년 11월 출시 '코티나' 자동차였다. 영국에서 만들어진 코티나는 급하게 조립한 탓에 고장이 잦았다. 영국에도 없는 모델인 픽업트럭까지 만들었으나 빈번한 고장으로 조롱거리가 된다. 당시 한국의 도로는 비포장도로가 많아 서스펜션이 고장이 잘 나서 차도 팔리지 않고 할부금도 못낸다는 사람이 많았다.
당시 현대자동차는 40%가 넘는 고리사채를 쓰고 있다보니 힘들었다. 위기에 처해 있던 현대를 박정희 대통령이 구해주기 위해 사채 동결 조치를 했다는 설이 있다.
1973년 중화학 공업화 선언 이후 부품개발 능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8.3 사채 동결 조치는 중화학 공업 개발의 힘이 되었다. 조치가 없었다면 기업은 줄도산했을 것이고 중화학 공업 육성에 제동이 걸렸을 것이다.
기업을 살리면서 산업합리화 자금도 추가 투입했고 이어서 80년대에는 부실기업 인수하는 그룹에 특별 세제 헤택을 제공했다. 이런 조치들이 재벌기업 형성과 밀접한 연관이 된다. 부실기업을 인수하다 보니 문어발 확장이 된 것이다. 정부가 주도한 직접적인 기업 지원은 장점과 단점이 있을 수 있다.
1991년 기아자동차가 부도가 난다. 1998년 현대가 기아를 인수한다. 이때 7조 1,700억 원 부채 탕감을 조건으로 현대자동차가 기아자동차를 인수한다. 22개월 만에 법정관리에서 기아자동차는 벗어난다.
외환위기 전 업계 순위 8위 연간 195만 대의 판매량을 기록하던 기아자동차의 부도는 국민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1970년대 현대 국산 자동차의 개발 성공은 불가능했다. 당시 1년에 7,000대를 만들던 회사였던 현대는 자본금이 불과 17억원이었다. 국산화 50만 대 달성을 위해서 1억 달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포니의 디자이너였던 조르제토 주지아로에게 준 디자인 가격만 무려 120만 달러였고 지금 환율로 15억원 정도이다. 포니가 태어날 때까지 많은 땀과 노력을 쏟았던 현장 사람들이 있었다. 1974년 자동차 설계기술을 배우기 위해 이탈리아 연수를 가기도 했다.
포니가 완성되기까지 걸렸던 시간은 2년 반이 걸렸다. 포니(Pony)는 조랑말을 뜻한다. 한국의 최초의 국산 자동차인 만큼 국민이 이름을 지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국민 공모를 통해 탄생한 이름이다. 5만 8천여 통의 공모 엽서가 도착했다. 유신, 아리랑, 새마을 등이 많았다. 포니라는 이름의 심사는 여대생이 맡았다. 당시 공모 엽서를 정리하던 여자 대학생들(아르바이트)이 있었는데 수출을 염두에 둔 차이기 때문에 젊은 감각을 참고하기 위해 여대생들에게 투표를 시켰다. 여대생들은 압도적으로 포니가 좋다고 했다. 회사 경연진들이 검토 결과 여대생 투표결과를 적극 반영했다. 국내 1호 수출 자동차 포니는 해외를 달렸다. 남미 에콰도르를 시작으로 중동, 아프리카까지 수출된다.
포니를 오븐에 넣었다. 정식 명칭은 페인트 부스지만 역할은 오븐과 비슷하다. 남미 에콰도르, 중동의 높은 온도로 유명한 나라로 수출하기 위해 포니를 오븐에 넣었다. 어느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날아온 비보는 운전대가 녹았다는 것이다. 중동에서는 더운 날씨 때문에 자동차 실내 온도는 100도 이상이 된다. 자동차에 칠한 페인트를 고온으로 말리는 페인트 부스에 100도 이상 열을 올려서 몇 차례 실험 끝에 결함을 해결했다.
내구성을 강화한 포니는 본격적인 수출길에 오른다. 1982년 포니는 새로운 모델, 포니2를 출시한다. 1984년까지 포니시리즈로만 50만 대를 생산한다. 마이카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린다. 1980년대 저유가와 맞물려 자동차 산업의 호황기를 맞았다. 카폰을 달기 시작했다. 자동차에 안테나를 달아야 했고 안테나는 부의 상징이 되었다. 자동차 카폰은 자동차 가격과 맞먹을 정도로 비쌌다. 자동차 필수템 전국도로 안내지도는 조수석에 있었다. 마이카 시대가 도래했고 여행을 떠나기 시작하면서 휴게소가 활성화되어 호두과자를 맛볼 수 있었다.
예전에는 백마역, 대성리 등 기차역 근처였던 그때 MT장소들이 마이카 시대가 되면서 전국 방방곡곡 숨어있던 전국의 관광지가 개발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 현대, 기아, 대우가 있었던 트로이카 시대였고 마이카 시대를 맞아 계속해서 경쟁하듯이 차를 만들어 냈다. 이러한 경쟁 덕분에 소비자는 품질 좋은 차를 구매 가능했다. 1980년대는 기본대가족 중심의 가족 단위였는데 기아자동차의 봉고는 대가족 이동에 적합해서 인기가 있었다. 봉고가 승합차와 트럭을 합해서 첫해 12만 대 판매고를 달성했다. 한때 위기에 빠졌던 기아에게 큼 힘이 되어준 봉고였다. 이후 승합차를 보면 봉고차라고 불릴 정도로 봉고가 고유명사가 되었다. 봉고는 미니밴, RV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자동차의 스텔라는 안정적인 중산층이 타는 차였다. 깔끔한 디자인과 가성비로 승부한다는 모티브로 출시했다. 스텔라는 국내 판매율 1위로 국민차였다.
대우자동차에서는 성공한 CEO만 탄다는 로얄 프린스를 출시한다. 로얄 프린스는 기사가 따로 있는 차였다. 요즘 세단과 승차감에 차이가 없고 묵직한 안정감과 편안함을 추구했다. 차가 무겁다 보니 엔진을 강해야 해서 엔진출력을 올리면서 연비가 아쉬웠다. 로얄 프린스 출시 이후 고급차 경쟁이 시작되었다. 현대자동차가 그랜저, 체어맨을 출시한다. 하지만 국내 기술로 만든 소형차와 달리 고급차는 외국에서 부품들을 수입해 왔다. 대우의 로얄 프린스가 잘 팔리자 현대는 스텔라 후속 모델로 소나타 시리즈를 출시한다.
이후 로얄 프린스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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