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과 미국의 전략 폭격, 폐허가 된 독일
전략 폭격에 대한 영국과 미국의 생각은 완전히 달랐다. 전쟁에서 윤리와 도덕을 논하는 길보다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것이 사람을 많이 살릴 수 있는 방법이다는 관점과 아무리 전쟁이라도 최소한의 윤리는 지켜야 된다는 관점으로 나뉜다.
2차 대전 초반 독일의 전략 폭격으로 런던 등 영국 주요 도시 16곳이 파괴되었다. 영국입장에서는 똑같이 전략 폭격을 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최소한의 윤리를 지켜야 한다는 미 항공대 주장에 영국군 반응은 현실을 모르는 소리라고 한다. 전략 폭격에 투영된 양국 지도자들의 철학은 달랐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상적인 면모가 있었고 처칠 수상은 굉장히 현실적이었다.
영국 폭격기는 2차 대전 당시 총 출격 횟수는 364,514회였다. 영국 폭격기 승무원은 약 12만 5천 명이었다.
영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독립된 공군을 창설했다. 1918년 영국 왕립 공군이 창설됐고 미국 공군은 1947년 창설된다. 1차 대전에서 겪어 본 강력한 독일 항공대의 공중우세를 막기 위해 영국 공군을 창설했지만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영국은 섬나라이지만 전 세계 식민지를 두고 있었다. 18세기 중반부터 영국의 외교정책은 고립주의였다. 유럽대륙에서 세력 균형이 유지되는 한 영국은 유럽 내로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영국은 스스로를 '영예로운 고립'이라 칭했다. 만약 전쟁이 난다면 영국의 강한 해군력으로 적 지상군을 저지하고 유럽 대륙을 봉쇄해서 장기전으로 전쟁을 끌고 간다는 영국의 전통적인 전쟁 수행방식이다.
그런 차원에서 영국은 대규모의 지상군이 필요없고 육군 지상군 소수정예 상비군으로 본토 방어가 충분하다고 판단하여 작지만 강한 육군은 만든다. 영국군의 전략은 수세적이고 방어적이다. 새로 등장한 공군은 유일한 공세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 식민지 통치와 운영에 필요한 경찰 역할을 육군 대신 공군에서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식민지 위로 비행기를 띄워 정찰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미국과 일본은 지정학적 위치로 항공기를 항모에 띄우지 않으면 대륙까지 가기에 너무 멀다. 영국은 도버해협(최단 거리 34Km) 너머가 바로 유럽이다. 영국 본토가 출격기지 공군 비행장역할을 할 수 있어 영국의 지정학적 위치도 공군 창설이 빨랐던 배경 중에 하나이다. 영국은 전략 폭격 무기를 개발하고 교리를 발전시킨다.
반면 독일은 전술 폭격에 집중했다. 수평 폭격 시 현저하게 떨어지는 명중률 때문에 독일 공군력은 지상군을 지원하면서 전선을 빠르게 돌파하는 정확한 폭격 방법으로 급강하폭격기로 정밀 폭격한다. 독일 급강하폭격기 Ju-87 슈투카 명중률 60%였다.
급강하폭격기 효과가 좋게 나오자 영국 본토 항공전에 전략 폭격으로 동원했다가 실패한다. 독일은 전략 폭격에서 폭격기의 항속거리를 간과했다. 미국, 영국은 항속거리, 속력, 폭장량에서 앞서는 4발 중폭격기( 핼리팩스, 랭커스터, B-17, B-24)를 개발했다. 반면 독일은 쌍발 폭격기뿐이었다.
2차 대전이 발발하고 프랑스는 항복했고 독일이 영국을 공격하기 전에 상륙작전을 해야 되는 데 가장 위협적인 것은 영국의 공군력이었다. 그래서 제공권 우위 확보하려고 시작된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레이다, 방공망 등 영국 공군의 선전에 독일은 막힌다.
미국과 영국의 전쟁 목표는 독일의 무조건 항복이다. 항복을 시키는 방법에는 군대 궤멸, 정치 지휘부 제거, 국민 전쟁 수행 의지를 없애는 것이 있다. 독일 산업시설을 파괴하면 전쟁 수행 능력을 박탈할 수 있지만 지상군은 결국 수도까지 진격해야 하는 고민이 남는다. 이런 지상군의 진격으로 하는 영토 점령이 아닌 다른 방법은 모두 공군이 할 수 있다고 항공 이론가들은 주장한다. 잘못된 믿음이다. 잘못된 믿음과 관계없이 미국과 영국은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 전까지 나치 독일을 공격하는 유일한 방법은 전략 폭격이었고 유일한 공세 수단으로 독일에 대한 영국과 미국의 전략 폭격이 개시되었다.
영국은 전략 폭격의 중추 영국 공군 폭격기사령부를 만들어서 수행을 했고 1944년 2월 제8공군 투입을 해서 주력 폭격기 B-27 플라잉 포트리스를 사용했다. 오늘날 미 제8공군(The Mighty 8th)은 B-52, B-1B, B-2 스피릿을 운용하는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최강 폭격기 부대이다.
1943년 1월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루스벨트와 처칠은 연합군의 유럽 상륙은 일정을 연기하자고 합의를 한다. 대신 독일에 대한 영국과 미국의 전략 폭격을 합의한다. 영국의 독일 핵심 타깃은 독일 산업시설이었다. 하지만 독일의 공군력과 방공망, 대공포가 만만치 않았다. 결론은 고고도 폭격이었다.
영국 공군 폭격기사령부는 주간 고고도 폭격을 하다가 야간 폭격으로 전환한다. 하지만 야간 고고도 폭격의 문제는 효율성이 낮았다. 기상 상태가 양호해도 야간 고고도 폭격은 명중률이 미흡했다.
1942년 당시 항법 기술(야간)을 열악했다. 깜깜한 밤에 표적으로 안내할 유도장치가 없었다. 그나마 밤에도 물과 땅의 경계는 보인다. 해안선과 강줄기를 따라 비행하는 것이 그나마 제일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산업시설은 강 바로 옆에 없어 산업시설을 찾는 것부터 문제가 되었다.
지금도 항법장치가 없는 헬기는 고속도로 따라서 시계방향으로 간다.
2차 대전 당시 표적을 맞출 확률 자체가 낮았다. 당시 조종실력과 무기 발전사를 짚어보면 이해 되는 부분이 많다. 라이트 형제의 최초 동력 비행 성공은 1903년이고 전략 폭격은 불과 40년 뒤에 이루어진다. 미 육군항공대 사령관 헨리 아놀드는 1911년 라이트 형제 중 동생 '오빌 라이트'에게 비행 훈련을 받고 미 육군 조종사 자격을 취득했다. 항공 1세대가 아직 활약 중인 초창기라서 비행 기술이 높지는 않았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은 폭격기 효과를 높이는 융단 폭격을 시행한다.
융단 폭격(카펫 바밍 Carpet Bombing) 은 폭격기 여러 대가 모여 폭탄을 대량으로 투하하는 것이다.
아서 해리스의 별명은 '폭격기(Bomber) 해리스'였다. '휴 트렌차드' 영국 공군의 아버지, 1세대 항공 이론가'의 직속 제자였다. 1942년 2월 아서 해리스는 영국 공군 폭격기사령부 사령관으로 부임한다.
1942년 봄 영국 최신예 중폭격기 랭커스터가 실전에 투입된다. 랭커스터 항속거리는 약 4,000km였고 당시 영국에 있는 기지로부터 출격하면 대부분의 독일 도시를 타격 가능했다.
아서 해리스는 전쟁에서 이길 타개책을 모색한다. 생각을 공유하고 있던 영국 공군참모총장 '찰스 포털'은 1942년 2월 14일 지령 22호를 발령한다.
폭격의 주요 목표는 적국의 민간인이다. 특히 타깃은 산업 노동자였다. 지령 22호에 따르면 전략 폭격 목표지점도 산업시설에서 변경하여 인구 밀집 지역이었다. 이런 전략 폭격을 하면 적국의 국민들의 사기가 꺾여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는 영국의 믿음때문이었고 복수심도 있었을 것이다.
1940년 9월부터 독일은 영국 본토를 먼저 폭격했다. 때문에 지령 22호 독일 민간인 폭격을 영국 여론은 지지한다. 영국인들은 전략 폭격은 세련된 전쟁 수단이라고 지지한다. 영국 군인들은 죽지 않고 적을 파괴하고 있다고 느끼자 지지한 것이고 당한만큼 보다 더 효과적으로 복수하는 방법으로 인식을 했다.
나치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 본토가 전략 폭격으로 파괴되자 견딜 수 없었다. 당시 독일은 신형 전투기 개발 중이었는데 고속 폭격기로 만들라고 지시한다. 보복 수단으로 개발한 독일 신무기 V-1 순항 미사일, V-2 로켓이 만들어진다. 아돌프 히틀러는 오로지 영국에 대한 복수만 생각한다.
영국 공군 폭격기사령부 아서 해리스 사령관 체제의 1942년에는 영국 공군 폭격기사령부는 열악했다.
초라한 명중률로 전략 폭격 효과에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폭격기는 100대 정도였고 지원도 부족해서 아서 해리스는 전략 폭격을 입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대중의 적개심을 불 지필 궁리를 하다가 독일 민간인에 대한 폭격이 시행된 측면도 있다.
아서 해리스는 자주 설명회를 개최해 영국 공군 폭격기사령부가 올린 성과를 발표했다. 성과를 보여주는 불루북을 만들어 폭격으로 파괴된 독일 도시 항공사진을 담아 보여주면서 언론의 지지를 얻으려 애쓴다.
도시에 폭탄을 떨어뜨리면 도시가 불타오르는 극적 효과가 뛰어나자 촬영을 해서 영화로 만들어 보여주면서 전략 폭격의 효과를 선전했다. 그렇게 전략 폭격 효과를 보여주며 영국 여론의 지지를 유도했다.
폭격 후 조지 6세와 처칠에게 업데이트 된 블루북으로 보고한다.
아서 해리스의 또 다른 별명은 아군에서 붙인 별명 '도살자 해리스'였다. 무사 귀환과 상관없이 폭격기 승무원을 소모시켰다. 훈련이 부족한 폭격기 승무원들 조차 무조건 출격을 시켰다. 독일은 육군, 공군 방공대대를 운용하고 있었고 저고도 방공망을 탄탄하게 구축하고 있어 전략 폭격 초반 영국 공군 폭격기 피해가 증가했다. 영국 공군 폭격기사령부 승무원 12만 5천 명 가운데 약 44.4%가 전사했다.
연합군 피해를 가늠할 수 있는 독일 대공포 배치 숫자는 전쟁 전 1939년 독일 대공포 3,000문 이하였지만 영국 미국 전략 폭격이 시작된 1943년에는 독일 대공포가 15,000문이 배치된다.
1944년 독일 대공포 26,000문으로 증가한다. 독일은 폭격 예상지점마다 대공포가 집중배치되었다. 레이다 탑재한 독일 전투기가 야간 초계정찰을 해서 영국 폭격기를 발견하면 요격했다.
아서 해리스는 폭격 1회 출격마다 피해가 10% 미만이라면 괜찮은 성과라고 생각하지만 1회 출격 때마다 1/3씩 사라졌다. 폭격을 하러 출격할 때마다 무사히 귀환할지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했다.
영국 공군 중앙교회 앞에 아서 해리스 동상이 1992년 세워졌다. 전략 폭격에 희생된 독일 민간인은 최소 30만 명이었다.
전략 폭격 첫 민간인 대상으로 한 지역은 1942년 3월 28일 발트해에 인접한 독일 북부 항구도시 뤼베크였다. 발트해로 흐르는 트라베강과 운하로 에워싸인 뤼베크 도심은 지형, 지리적으로 최적의 타깃이었다.
12세기 ~17세기 일종의 무역공동체인 상인조합 동맹 '한자동맹의 수도'로 통했다. 무역이 활성화된 도시로 당시 유행했던 중세풍의 목조 건물이 가득해서 불을 내기에 좋은 도시였다. 당시 소이탄을 실험하기에도 적합한 장소이기도 했다. 뤼베크 폭격 성공 이후 인구 밀집 지역 폭격을 본격화한다. 동시에 독일 산업시설 폭격도 같이 실시했다. 전략 폭격은 수도 베를린을 포함해서 15개 도시를 집중 폭격했다.
1943년 7월 대표적인 집중 폭격은 당시 독일 제2의 도시 함부르크였다. 함부르크 폭격으로 희생된 민간인 사망자는 약 5만 명이었다. 1945년 2월 드레스덴 폭격은 하룻밤에 사망자 추정 10만여 명이 희생된다.
드레스덴은 독일 동부에 자리한 작센주 주도였다. 군사적인 가치는 없지만 역사학자들이 사랑한 도시였다.
'엘베강의 피렌체'라 불릴정도로 츠빙거 궁전과 예술품 등 수많은 문화 유적과 인구 36만 명을 보유한 도시였다. 1945년 2월 영국과 미국 전략 폭격을 교대로 4차례 공습했다. 1945년 드레스덴 대공습 이튿날 미 제8공군이 단독 폭격한다. 미 제8공군은 1944년 10월부터 드레스덴 단독 폭격 총 3차례 실시했다.
드레스덴은 폐허로 변했다.
1944년 말 전략 폭격은 효과적이어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당시 연합원정군 최고사령부 사령관도 전략 폭격을 영국 공군처럼 하라고 지시한다. 드레스덴 대공습 이후 미 제8공군은 영국처럼 무차별 작전을 하지 않았다고 항변한다.
독일 민간인 지역폭격에 미국이 참여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1943년 말 미국은 전쟁을 끝낼 준비중이었다.
하지만 바라던 대로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조급함이 있었다. 전쟁이 길어지면 여론은 악화된다. 전쟁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조급함이 민간인 지역폭격으로 귀결된 것이다.
또한 1944년 겨울 소련군 대공세가 있었다. 소련군 지원을 위해 베를린, 드레스덴 공습을 결정한다.
1943~1944년 영국과 미국 전략 폭격의 집중 타깃은 독일 항공기 산업시설 붕괴였다. 독일 항공기 부품, 조립공장을 폭격한다. 다음 타깃은 교통시설이었고 인구 밀집지역과 겹치게 된다.
영국은 독일인을 효과적으로 없애는 방법, 독일의 건물을 효과적으로 파괴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불 폭풍(Firestorm 파이어스톰)을 주목한다. 불 폭풍은 산불이 발생할 때 산불이 크게 나면 산발적으로 난 불이 합쳐지면서 활활 타오르면 연소하면서 주변의 산소를 빨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러면 점점 더 바람이 강해진다. 마치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며 산소를 흡입하면서 더더욱 불길이 커지고 어마어마한 불 바람과 불 폭풍이 형성된다. 연기가 하늘로 솟아오르고 고공의 차가운 공기에 닿으면 수증기가 응결되어 버섯구름(화재 적란운)이 된다. ※버섯구름은 비 대신 뇌우, 열풍을 동반한 구름이다.
불폭풍을 인위적으로 일으켜야 겠다고 생각한다. 1945년 5월 밀레니엄 작전에서 최대한 많은 폭격기로 많은 폭탄 투하를 했을 때 어떤 상황인지 테스트해보려고 1,000대를 동원해서 독일 쾰른을 대공습 한다. 하지만 쾰른은 석조 건물이 많고 비교적 도로가 넓었기 때문에 폭탄이 떨어져도 옮겨 붙지 않았고 기대만큼 효과가 없었다. 1943년 7월 8일간 함부르크를 폭격했다. 함부르크 작전명은 '고모라'였다. 성경 창세기에 타락한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 신이 징벌을 내린다. 불 폭풍을 일으켜 다 쓸어버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함부르크 폭격은 주도면밀하게 시행한다. 당시 독일의 레이다 방공망을 교란하는 작전을 시도했다.
길이 30cm, 폭 1.5cm 가량의 알루미늄 포일 조각, 윈도우를 잘게 잘게 찢어서 폭격 선도기가 먼저 9,200만 개를 살포한다. 레이다 탐지를 방해하는 금속 박편, (Chaff ) 채프의 원형이다.
알루미늄 포일 조각에 전파가 반사돼어 독일의 레이다 화면은 먹통이 되어 버리고 독일 방공망은 대혼란이 온다. 영국 폭격기가 어디로 가는지 식별이 불가능했다.
1943년 7월 24일 밤 00시 57분 함부르크 폭격이 개시되었다. 첫날 타깃은 유보트 기지, 조선소가 있는 함부르크 항구였고 폭격기 700여 대가 폭탄 3,000톤을 투하했다. 이때부터 카사블랑카 회담의 합의대로 영국과 미국이 폭격기 공습을 교대로 밤에는 영국군, 낮에는 미군 폭격기가 공습한다. 미 폭격기 편대는 통신, 수도 등 인프라 시설과 군부대를 정밀 폭격한다. 상수도 시설 파괴로 함부르크 화재 진압에 난항을 겪는다.
1943년 7월27일 영국 폭격기 787대가 다시 공습한다. 인근 도시 소방대까지 함부르크로 출동하여 화재 진압을 하고 있는 사이 1단계로 공습 첫날 피해 지역 주변에 고폭탄을 투하한다. 건물을 무너뜨려 소방대를 고립시킨 다음에 2단계로 노동자 밀집 주거지를 폭격한다. 고폭탄을 투하해서 주택 유리창을 산산조각 내버린다. 거리를 뒤덮은 유리 파편에 노동자들이 움직이지 못하고 소방대가 없어 화재 진압을 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소이탄을 투하한다. 함부르크 주거지는 목조 건물이 많은 도시여서 삽시간에 불길이 번진다. 앞서 출동한 지역에서 소방대는 고립되어 있어 화재 진압이 쉽지 않았다. 불길을 여기저기서 타오르고 이윽고 불 폭풍이 발생한다. 1,000도 화염이 치솟고 주변의 산소를 빨아들이며 상승기류가 형성되고 방공호 안의 산소가 고갈된다.
※독일은 1940년 베를린 공습 이후 독일 도시마다 방공호, 방공탑을 건설했다.
방공호 안에 대피했던 사람들은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질식사한다. 방공호 밖은 불지옥이고 방공호 안은 산소부족으로 죽는다. 하룻밤 사이에 함부르크 시민 5만여 명이 사망했다.
영국 내각과 의회는 독일 민간인 지역 폭격에 대한 합리화 절차를 밟는다. 민주적, 합법적 동의 과정에 물리학 박사 '프레드릭 린데만' 박사가 영향을 끼쳤다. 처칠의 친구이자 고문으로 수시로 회의에 동행했다.
프레드릭 린데만은 독일에서 태어난 독일계 영국인이다. 독일인 아버지 대(代)에 영국으로 이민을 가서 귀화한다. 영국 옥스퍼드대 물리학 교수 출신이며 베를린 훔볼트 대학에서 공부를 하기도 했고 당대 석학들이 참여한 세계 최초의 국제 물리학 학회, 솔베이 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
영국 상류층과 교류한 린데만의 별명은 '베를린 남작' 이었다. 괴짜 처칠의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는 말벗으로 유명했다.
린데만은 독일 국민의 사기를 꺾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독일인의 집을 없애는 것이라고 했다. 당시 독일 인구 약 6천만 명이었고 2천2백만 명이 58개 도시에 거주하고 있었다. 전략폭격으로 독일 58개 도시의 모든 집을 불태우면 독일 국민의 1/3은 절망감에 빠질 것이고 전쟁의지가 완전히 꺾일 것이다고 주장한다.
1945년 2월 13일 드레스덴 폭격이 개시된다. 동부전선에서 쫓겨온 독일 피난민들이 드레스덴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독일인들 사이에서 퍼져있는 '드레스덴은 영국의 옥스퍼드와 같은 유서 깊은 도시로 독일이 옥스퍼드를 폭격하지 않는 한 드레스덴은 폭격하지 않는다'는 소문으로 최소 20만 명의 피난민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공습이 시작되자 방공호를 찾아 길거리를 헤매다가 폭격에 쓰러지고 불 폭풍에 휘말리며 인명 피해가 급증한다. 드레스덴 공습에는 3,900톤의 고폭탄, 소이탄을 섞어서 동시 투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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