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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흥이 많은 민족, 한국의 노래방 문화

by 소시민스토리 2024.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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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이 많은 민족, 한국의 노래방 문화

흥이 많은 우리 민족은 노래와 춤을 즐긴다. 술 한잔 먹고 노래방에 가서 노래 부르는 것이 당연시되던 시절이 있었다.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나름 춤을 추며 스트레스도 풀고 나름대로 우정도 다지고 동료애도 다지면서 한 해 한 해를 보냈다.

 

노래방책으로 책을 펼치는 유형을 살펴보면 세대를 구별할 수 있다. 나이가 있다면 첫 장부터 넘겨서 노래를 찾고 젊은 세대는 맨 뒤쪽부터 책장을 넘기면 노래를 찾는다. 최신곡은 뒤쪽에 실려있다.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면 노래시켜놓고 노래 들어주지 않고 본인 노래 찾느라고 책을 막 뒤지고 있다가 겨우 찾는다. 노래방을 자주 간 사람은 자기가 자주 부르는 노래 번호를 외우기도 했다.

노래를 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함께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 중요했다. 노래방에서 꼭 슬픈 노래를 부르는 눈치 없는 친구나 동료가 있었다. 금방 흥겨운 노래로 분위기 살려났는데 갑자기 청승맞은 노래를 불러서 분위기를 확 내려놓으면 회사 막내가 다시 흥겨운 분위기 만드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회사 부장님이나 과장님이 노래를 부르시면 옆에서 꼭 탬버린으로 흥을 맞춰주는 것이 예의였다. 

 

 

노래방은 일본 가라오케에서 온 문화였다. 가라오케에서의 '가라'는 없다, 비어있다는 뜻이고 '오케'는 오케스트라의 줄인 말이다. 반주자들이 있던 자리를 비우고 그 자리에 기계를 놓으면서 일명 '가라오케'라는 말이 나왔다. 가라오케가 한국에 들어온 지 30년이 지나면서 '노래방'이라는 문화로 자리를 잡았다.

지금은 '노래방'으로 외국인에게도 익숙해졌다.

 

노래방 문화는 부산에서 최초로 시작되었다. 1991년 부산 어느 전자오락실의 사장이 컴퓨터 전문가였다. 가라오케 기계를 개조해서 사용자가 번호를 직접 눌러서 곡을 선택하고 화면에 곡을 따라 부를 수 있는 기계를 만들었다. 이 기계를 오락실 내에 설치하면서 한국식 노래방 설비가 처음으로 도입된다.

최초의 노래방은 시간제가 아니었다. 처음 부산에서 기계에 300원을 넣으면 영상, 반주, 가사가 나오는 일종의 지금의 동전 노래방 방식이었다. 당시에 한 곡에 300원은 비싼 금액이었다. 노래방은 부산에서 시작되어 마산, 창원으로 번져 나갔고 서울까지 올라왔다. 2년도 되지 않아 전국 주요 도시에 노래방이 확산되었다.

처음에는 전자오락실 개념으로 돈을 넣고 노래를 불렀다. 

 

노래방 반주 기계로 유명한 K사는 1980년대까지는 문방구용 오락기 제조사였다. 노래방 열풍으로 문방구용 오락기 제조업체가 노래방사업을 하면서 폭풍 성장하여 연 매출 700억 원대의 대형 기업으로 성장을 했다.

노래방이 한창 유행할 때는 법당까지 노래방이 설치가 되어 있었다. 노래는 친목이라 생각해서 장소를 불문하고 노래방이 설치가 되어 있었다. 90년대 초반 일부 법당에는 불자 간의 친목과 포교를 위해서 노래방 기계가 설치되어 신도들이 모여서 찬불가를 부르기도 했다. 은행, 관공서, 일반 직장에서도 세대 간의 차이, 계급차이를 줄이기 위해서 노래방 기계를 활용하는 곳이 많았다.

2001년에 남북간의 대화가 시도되면서 대중가요 5,000곡을 실은 노래방 기계를 북한에 지원물품으로 보내기도 했다.

 

 

노래방 문화가 유행하면서 노래를 못하는 사람을 위한 '음치 클리닉'이 대유행했다. 양동이를 뒤집어쓰고 연습하면 음치를 탈출할 수 있다는 훈련법으로 쇠양동이나 플라스틱을 뒤집어썼다. 자신의 목소리가 양동이 안에서 울려 퍼지기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를 5배에서 10배 이상 들을 수 있다.

학원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문화센터에서 경증은 10회, 중증은 6개월에서 1년 단위로 교육을 받으면 음치가 고쳐진다는 홍보를 했다. 

이렇게 모두들 노래를 잘하려고 애쓰다 보니 회식자리에서 노래를 못 부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이때 정말 음치가 노래를 부르면 모두들 좋아라 하며 박수를 치곤 했다. 

얼마나 노래 연습을 많이 했으면 해외 토픽으로 음치 클리닉 열풍이 실리기도 했다. 1991년에 영국의 로이터 통신이 한국에서는 음치가 탈모이상으로 심각한 문제로 간주되기 때문에 음치 치료를 위한 학원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보도했다. 

"노래를 못하면 시집을 못 가요, 아! 미운 사람!"이라는 노래가 있을 정도였다.

 

노래방이 처음에는 환영받지 못했다. 일본에서 들어온 가라오케 문화는 간판, 장식, 영상까지 일본풍이라서 한일관계에 영향을 받아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다. 

더욱이 노래방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청소년들에게 술을 팔면서 퇴폐업소로 바뀌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졌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정부는 90년대 초 노래방 심야영업을 금지시킨다. 만 18세 미만 청소년은 출입금지가 되고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면 보이는 투명 유리를 노래방에 설치하도록 했다.

 

노래방에 대한 사건 사고가 일어나자 정부가 규제하는 법을 만들면서 노래방 분위기가 달라졌다.

1998년부터 일정요건을 갖춘 노래방에 한정해서 밤 10시까지 청소년 출입을 허용했다. 

직장 회식 후 2차는 무조건 노래방으로 갔고 가족들이 갈 데가 없으면 노래방으로 갔다. 이렇게 유흥문화가 달라졌다.

일본식 가라오케와 한국의 노래방은 차이가  있다. 최초 노래방이 부산에 생겼을 때도 주류 반입을 금지시켜 가라오케 주점보다는 이용객의 범위가 확장됐다. 가라오케는 단순한 반주기능에 그쳤지만 노래방은 끊임없이 스스로 무대를 연출하도록 진화되었다. 90년대 중반에는 단순히 반주만 나왔다가 고음질 설비가 등장하고 템포가 조정되고 육성 코러스 아아아...가 추가되면서 코인 시스템이 사라지고 관리가 편한 시간제 시스템이 시작되었다. 노래방 사장님의 기분에 따라 30분씩 추가해주기도 했다. 단골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추가 시간을 서비스로 주지 않자 단골 노래방을 바꾸기도 했다.

 

노래방이 한국의 문화로 자리 잡으면서 많은 것들이 변화한다. 시대를 반영하여 TV에서 노래방과 관련된 프로그램이 많았다. 도전 1000곡, 쟁반 노래방 등이 인기가 있었다. 탬버린을 기가 막히게 잘 돌리며 춤을 추는 사람이 인기가 있었다.

노래방에서는 노래를 잘하면 오히려 점수가 높지 않았다. 목소리를 또박또박하고 큰 소리로 불러야 점수가 높았다. 가수가 본인 노래를 불렀는데 점수가 낮게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노래방 뮤비에 유명한 연예인이 나오기도 했다. 주로 발라드 노래에 등장해서 청초한 미모를 뽐내면서 걸어가거나 웃는 장면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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