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과 금성 별들의 전쟁
한국의 전자산업의 비약적인 성장 그 시작에는 금성사가 있었다. 1959년 국내 최초의 라디오 A-501를 생산한다. 1962년에는 첫 수출에 성공한다. 금성사는 라이어에 이어 국내 최초로 선풍기, 냉장고, 세탁기 등을 개발하고 국내 전자 산업을 주도한다. 1966년 흑백 TV개발에도 최초로 성공한다. 여기에 도전장을 내민 사람은 삼성 이병철 창업회장이었다. 1969년 삼성전자공업을 창립하며 전자 산업에 진출하였다. 이후 금성과 삼성의 치열한 경쟁은 50여 년 이상 이어지고 있다. 두 기업은 국내 전자 업계 최고의 라이벌이 되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정봉이 아버지 (배우 김성균)는 금성전자 대리점장이었다. 잠바에 빨간색 금성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1980년대 럭키금성이었고 1995년 이후 LG로 회사명을 바꾼다.
금성사는 한국의 전자 산업의 최초라는 타이틀을 싹쓸이 하던 전자제품 회사였다. 1966년 국내 최초 흑백 TV를 개발했고 당시 19인치 흑백 TV는 소비자 가격으로 6만 8천 원이었다. 당시 도시근로자 (1966년) 가구당 월평균 소득이 1만 1750원이었다. 공급물량이 부족해서 돈이 있어도 쉽게 살 수 없었다. 신청을 하면 공개 추첨을 해서 당첨된 사람만 살 수 있었다. KBS 국영방송 시절 KBS에서 공개추첨을 했다.
1950~60년대는 금성이 전자업계에서 독보적이었다. 1969년 전자 업계에 삼성이 뛰어들면서 경쟁 심화로 사장들 간에 몸싸움까지 할 정도로 라이벌이 되었다.
삼성의 이병철 회장
1910년 2월 12일 경상남도 의령군에서 출생했다. 진주 지수공립보통학교를 다니다가 3학년 과정 편입후 6개월 만에 전학하여 경성부 수송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다. 서울 중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와세다대학교 정치경제학입학했다가 유학 생활 중 건강 악화로 조선으로 돌아왔다.
1938년 당시 자본금 3만원(현재 3억 원 가치)으로 대구 삼성상회 회사를 설립했고 삼성의 시작이었다.
삼성상회는 주로 청과물, 건어물을 만주, 북경지역에 판매했다. 삼성상회에서 직접 만들어서 크게 성공한 것은 별표국수였다. 국수 공장이 쉬지 못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기존 국수는 직접 면을 만들어야 했었는데 별표국수는 물에 삶아서 먹을 수 있으니 요리가 쉬워진 것이었다.
이병철 회장의 성격은 한 번 결심하면 끝까지 해내는 냉철하고 치밀한 승부사 기질이 있었다. 경영 철학은 '사업보국, 인재제일, 합리경영'이었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의 별명은 '돈병철'로 불렸고 당시 부자의 상징이었다. 하나의 사업이 성공을 거둔 후 새로운 사업을 진행했다. 별표국수를 성공시킨 후 1939년 삼성상회 성공에 힘입어 조선양조를 인수한다. 1953년 부산에서 제일제당을 설립한다. 국내 최초 국산 설탕 생산을 시작한다. 1954년 제일모직을 설립한다. 삼성이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만든 이유가 있었다. 삼백산업 (三白産業)을 육성하던 시기였다.
삼백산업(三白産業)은 1950년대 미국 등의 원조 자금 및 물자를 바탕으로 성장한 제분(밀가루), 제당(설탕), 면방직(면직물) 산업이다. 제당, 모직 사업을 시작하기 좋은 조건이었다.
금성 창업주 구인회 회장
1907년 8월 27일, 경상남도 진주시에서 태어났다. 진주 지수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병철회장은 전학을 갔지만 지수공립보통학교(초등학교)를 같이 다녔다. 3살 나이차가 있었지만 3학년 때는 같은 반이었다. 서울 중앙 고등보통학교를 2년 수료했다.
※지수 초등학교는 2009년 송정초등학교와 통폐합 후 이전 옛 건물은 기업가정신 교육센터로 활용중이다.
구인회 회장은 1947년에 락희화학공업사를 설립해 치약, 비누, 샴푸 등 생필품을 만들었다. 1947년 최초로 여성용 크림, 럭키 크림을 만들어서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둔다. 당시 국산 생필품 시장을 독점했다.
1958년 전자 쪽으로 관심을 돌린다. 부하 직원이 듣던 전축소리에 매료되어 라디오를 생산해야겠다고 결정한다. 금성사를 창업한 지 1년 만에 국산 제1호 라디오를 개발한다.
경영철학은 '남이 미쳐 안 하는 것을 선택하라, 국민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것부터 착수하라'였다.
신뢰를 중요시하는 성격이었다.
금성이 전자제품을 만들 때 1960년대 정부 정책과 잘 맞았던 시기였다. 정부는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내수 활성화에 힘쓴다. 정부 주도하에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시작했다. 정부 정책으로 인해 더욱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삼성은 왜 전자 산업에 뛰어들었을까?
삼성은 몇 번의 위기가 있었다. 이병철 회장은 1960년 4.19 혁명 이후 부정 축재자로 지명되었다가 풀려난다.
정부와 상호 이해관계를 조율하며 위기를 모면한다.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이 있었다. 당시 비료 산업을 삼성그룹 계열사 한국비료공업이 하고 있었는데 사카린을 건설자재로 가장하여 대량 밀수입한 사건이다.
사건 이후 한국비료공업을 정부에 헌납했다. 1972년 8.3 사채 동결 조치에 문제가 된다. 8.3 사채 동결 조치는 기업들에 대한 모든 사채를 동결해 일정 기간 갚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의 대통령 긴급명령이다.
1970년 정부가 대기업에 산업 진흥책으로 자동차, 조선, 전자를 제시하며 선택하라고 한다. 이때 삼성은 전자산업에 진출하기로 결정한다.
이병철 회장과 구인회 회장의 관계는 좋았다. 1957년에 이병철 회장의 차녀와 구인회 회장의 셋째 아들이 결혼을 한다. 구인회 회장이 하고 있던 전자 산업에 이병철 회장이 전자 산업 진출을 선언하면서 좋았던 사이는 금이 갔다. 이병철 회장은 사위 구자학 회장을 신임했다. 제일제당 이사, 호텔 신라 초대사장까지 하다가 삼성의 전자 산업 진출 선언 이후 사위 구자학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병철 회장이 사망 후 자녀들에게 유산을 물려주었지만 차녀에게는 유산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삼성의 도전에 금성은 쉽게 물러나지 않는다. 삼성이 전자산업에 뛰어들었던 1969년 금성은 상징적인 제품을 최초로 개발한다. 대용량 금성 백조세탁기를 선보인 것이다. 백조 세탁기가 워낙 인기가 있어서 동네 세탁소 이름은 죄다 '백조세탁소'였다. 국내 최초 세탁기 광고 모델은 당시 스타 최불암이었다.
1959년 금성사는 총자본금이 1천만 원이었고 직원수는 313명이고 매출은 5천만 원이었다. 10년 뒤 1969년 세탁기를 개발한 후 금성사 직원은 수는 6천 명이 되었다. 10년간 전자 산업에서 독주를 하면서 최초의 국산 세탁기를 개발하면서 위상이 강화된다. 이때 삼성이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당시 유명한 아남산업도 도전장을 내민다. 아남산업은 1970년대 한국기업 최초 반도체 생산을 성공했다. 전자공업협동조합에 59개 회원사가 있었는데 전자업계 삼성의 전자 산업 진출에 강력 반발했다. 이병철 회장은 대통령을 찾아가 전자산업의 장래성을 설명하며 국가적 산업이 돼야 한다고 강조하였고 즉시 전자산업 전반에 관한 개방지시가 내려졌고 삼성전자로 설립을 하게 된다.
1969년 전자 산업에 뛰어든 삼성은 엄청난 물량 공세를 한다. 1970~1974년 사이 삼성이 출시한 TV모델은 48종이었다. 1978년 TV 총생산량은 100만 대를 돌파했다.
1970년대 금성의 TV 생산량은 5만여 대였다. 1978년대는 118만 대로 늘어난다. 1978년 금성사 연 매출 1700억 원이었고 그중에 TV 매출만 600억 원이었다. 1978년 말 내수 시장에서 삼성이 1위를 쟁취한다.
1979년에는 삼성이 수출시장에서 금성을 앞서나간다. 사실은 정부는 생산품 전량 수출을 조건으로 삼성전자에게 허가를 내주었다.
내수시장은 발전했지만 세계 시장에서 전자 산업 후발주자였다. 1970년대 한국 TV는 저가 공세로 미국, 영국 시장을 장악하고 있어서 영국, 미국과 경제협상을 할 때 한국산 TV 수출제한을 협상할 정도였다.
1980년 8월 국내에서 컬러 TV 시판이 허용된다. 컬러 TV시대가 되면서 금성과 삼성의 경쟁이 더 심화된다.
금성과 삼성은 인력 스카우트 경쟁이 워낙 심해서 양사가 협약을 한다. 소속회사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퇴직한 자를 1년 이내 다른 전자업체에서 채용할 경우 부당 스카우트로 간주한다고 협약할 정도로 스카우트 경쟁은 엄청났다.
금성과 삼성 광고 전쟁
금성의 슬로건은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였다. 금성은 1980년대 이 슬로건으로 대히트를 친다.
광고 끝에 '기술의 상징'이 들어갔는데 흑백 TV 개발 후 금성이 사용해 온 카피였다. 삼성은 '첨단'이란 글자를 추가해 카피를 했다. 이에 금성은 '최첨단'을 넣어서 카피를 만들었다.
CM송 대결도 치열했다. 기업 이미지 광고도 치열했는데 80년대에는 금성과 삼성 모두 미래지향적인 광고를 했다. 두 기업은 광고비에 막대한 돈을 지출하며 광고로 인한 효과도 엄청나게 누렸다.
삼성은 1997년 IMF로 어려웠던 시절에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기업 광고를 내며 4개월 만에 기업 이미지 호감도 1위로 등극한다. 한편 LG는 히트 광고를 발표했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LG'를 부르며 친근하게 다가섰다.
1978년 말 삼성에 1위를 내준 금성은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그 이후 광고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면서 치열한 싸움이 됐다. 삼성은 제일기획, LG는 LG애드라는 광고회사를 앞세워 광고 전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1980년대 상공부가 광고 경쟁이 과열되자 중재 자리를 마련했지만 쉽지 않았다. 1980년대는 외국 기술력에 밀리던 국내 제품들이었다. 두 기업의 경쟁은 획기적인 산업 발전을 가져왔지만 한계에 봉착했다. 1980~1990년대 국내에 외제 열풍이 불었다. 특히 일본 제품이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미국 전자제품 상점에 최상위제품은 한국산이며 중동의 부호들도 한국산 전자제품을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TV, 세탁기는 한국이 장악하고 있다.
50여 년간의 삼성과 금성의 치열한 경쟁은 세계로 뻗어나가는 에너지로 이어졌고 한국의 경제 부흥에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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