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입시, 학력고사의 추억
학력고사 세대는 원서를 서점에서 구입해서 직접 작성하고 담임 선생님 사인을 받아야 했다. 성적이 안 되는 데 명문대 간다고 했다가 담임 선생님에게 꿀밤 맞는 수가 있었다.
학력고사 때는 체력장이 필수였다. 점수는 20점 만점이었다. 필기는 320점 만점이었다. 340점이 만점이고 300점 이상이면 서울 명문대를 갈 수 있었다.
학력고사는 원서접수부터 치열했다. 온 가족이 출동해서 마감 직전까지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눈치 작전을 펴면서 온 가족의 애를 태우다 마감 시간이 임박해서야 부랴부랴 결정하고 뛰어가서 원서 제출을 완료했다.
마침내 대망의 학력고사 날, 경찰 순찰차, 사이드카까지 동원돼서 수험생들을 실어 날랐다. 고사장 밖에서는 후배 1, 2학년과 선배들이 나와서 수험생을 격려했다.
시험이 시작되면 교문 밖에서는 수험생 못지않게 부모들은 자녀들이 좋은 성적을 올리기를 바라며 정성스러운 기원이 있었다. 어떤 학부모는 교문에 자녀가 철석 붙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엿을 붙이기도 했다.
수능역사 70년
한국이 국가차원에서 공식적으로 관리하는 대입제도는 1954년부터 시작된다.
1969~1981년까지 13년간 예비고사와 본고사가 있었다. 같은 날 예비고사가 치뤄지면서 전 국민이 한 마음으로 지켜봤다. 경찰차가 수험생을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1980년대 전두환 정부가 들어서면서 사교육을 없애겠다며 과외가 금지된다. <7.30교육개혁조치>라고 해서 과외도 없어졌고 본고사가 폐지된다.
1981~1993년 12년간 시험만으로 입시 성패가 갈리던 시기였다.
1994~현재 30년간 수능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입시제도가 이어지고 있다.
체력장
체력장은 예비고사와 본고사때부터 시작된다.
1971년 문교부가 국민학교 5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을 대상으로 체력장을 시행하게 됐고 1972년에 상급학교 진학시험에 반영되기 시작해서 1973년부터 대학 입시 제도를 도입을 한다.
대부분 학력고사보다 앞서 체력장을 치렀고 9월~10월 중에 체력장을 봤다. 어떤 학교는 5월에 학교 체육대회와 고3체력장을 같이 열기도 했다. 고교 진학연합고사, 대학 진학 학력고사에 20점을 차지했다. 예전에는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할 때 연합고사를 봤다. 연합고사 성적이 안되면 전수학교를 갔다. 지금의 외국어고등학교 몇 학교는 예전에 전수학교였다.
초기 체력장은 유럽 종목을 도입해서 참고했다. 체력장 종목은 윗몸일으키기, 턱걸이, 던지기, 도움닫기, 멀리뛰기, 100m 달리기, 오래달리기 등이 있었다. 1979년부터 시설과 검사인원이 부족해서 6개 종목으로 축소된다. 남자는 턱걸이, 1000m 오래 달리기를 했고 여자는 매달리기, 800m 달리기를 했다.
1973년 기준으로 만점을 받으려면 남자 1,000m는 3분 39초 안에 들어와야 했고 여자 800m는 4분 13초 안에 들어와야 했다. 체력장을 하다가 힘들어서 실신하는 학생들이 다수였다.
체력장 점수 20점에서 기본 점수는 15점이었고 응시 의사가 있으면 16점을 주었다. 대학입시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았고 각 학교에서 체력장을 했기 때문에 변별력이 없는 부작용이 있었다. 점수를 매기는 사람은 주로 후배들이었는데 슬쩍 점수를 높여주는 눈치가 있는 학생이 있었다.
1990년 체력장을 치르던 고등학생 3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사망이후 체력장에 대한 논란이 가중되었고 입시가 치열했던 90년대에는 학부모들이 학교학습에 방해가 돼서 내신을 깎아먹는 데 왜 하냐며 반발을 하기도 했다. 1994년부터 고교입시에서 사라졌고 1995년에는 체력장이 차례로 폐지가 된다.
학력고사 제도에는 선지원, 후시험이 있었다. 1982학년~1987학년까지는 선 시험 후 지원으로 학력고사 점수로 대학을 지원했다. 1988학년~1993학년에는 선 지원 후 시험으로 지망 대학을 먼저 지원하고 나중에 시험을 봤다. 전기대 떨어지면 후기대를 지원하고 떨어지면 전문대를 지원할 수 있었다. 수능정시와 다른 점은 수능은 가군, 나군, 다군 대학 3곳과 산업대, 전문대 제한 없이 원서를 접수시킬 수 있었다. 학력고사는 2~3군데 지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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