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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전쟁의 마지막 길, 일본의 결호(決號)작전

by 소시민스토리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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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마지막 길, 일본 결호(決號)작전

미 잠수함에 의해 일본의 최첨단 항공모함 시나노가 격침당했다. 

 

 미 잠수함 전과, 시나노 격침

 

미 잠수함 전과, 시나노 격침

미 잠수함 전과, 시나노 격침 미 잠수함이 당시 일본의 최첨단 건조 기술이 집약된 항공모함 시나노를 격침시킨다. 시나노는 2차 대전 중에 만들어진 최고의 항모였고 취역 후 최단시간 침몰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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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이 임박했으며 미 함대가 어마어마하게 몰려올 것을 예상하고 잠수함으로 요격하자는 계획을 세우고 1944년 일본 해군은 전력 보강계획에 따라 수중 속력에 중점을 둔 고속형 잠수함을 건조한다.

소형 기준배수량 320톤급 파(波) 201형 잠수함은 일본 본토 연안 방어용, 대형 기준 배수량 1,300톤급 이(伊) 201형 잠수함은 일본 본토 해안 외곽 방어용으로 투입하려고 했는데 원자재 부족이 심해서 제대로 잠수함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잠수함은 건조 공법이 까다롭다. 원통형으로 만들어 밀폐성 등 공정이 복잡하다. 또한 숙련공이 부족했다. 미숙련공으로 인해 건조 기간은 늘어나고 성능은 떨어지고 제대로 잠수함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일본 열도를 따라서 미군 잠수함이 거의 포위하고 있었고 안쪽에는 1945년 말 B-29가 기뢰를 투하했다. 

일본 상선이 지나가다 미 잠수함과 기뢰에 속수무책 당하고 만다. 

상선이 막히자 물자 부족한 태평양전쟁 후반 일본 국민들의 생활고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대본영의 선전과 언론 통제 속에서도 어려운 전황을 체감하는 시기였다. 전쟁 초반 동남아에서 많은 물자가 쏟아져 들어올때는 호황기였다. 대만이 일본에 점령되면서 조선에 파인애플, 바나나가 유입되었다. 

 

태평양전쟁 초반 열대 과일로 일본의 승전을 실감했다. 전쟁 후반이 되자 열대과일은 커녕 먹고 살기도 어려운 지경에 이른다. 일본 도시락 일장기 모양처럼 반찬은 일본의 매실 절임 '우메보시'하나만 놓고 밥을 먹어야 했지만 그마저도 쌀이 부족해 풍족하지 않았다. 여성들은 전시 여성 표준복 '몬뻬'를 입어야 했다. 

요즘도 '몸빼', '냉장고 바지'등으로 유행한다. 

몬뻬는 섬유와 원단이 부족해 각종 명분 아래 전시 여성 표준복으로 지정되어 1942년 <몬뻬 보급 운동> 시행, 방공훈련 시 착용을 의무화한다.

 

태평양전쟁 후반 일본 언론의 상황

스기 야스사부로 생리학자, 의학박사는 월간잡지 <현대> 1944년 1월 기고문에 "일본인은 현미, 된장국,약간의 채소만 있으면 충분히 건강하게 살 수 있으니 건강걱정 하지 말라"는 내용을 싣는다.

이런 논조가 의학자 한 사람만의 주장은 아니었다. 1945년 7월 16일 <아사히 신문>기사를 보면 식용이 가능한 잡초를 소개하면서 국민들에게 잡초를 먹을 것을 권장한다. 

 

전쟁의 마지막 길, 일본 결호(決號)작전

태평양전쟁 시점 1945년 1월 마무리로 가고 있다. 루손섬 전투 중이지만 필리핀은 사실상 미군 수중이고 일본의 턱 밑까지 미군이 와 있었다. 

결호(決號)작전을 펼친다. 결호작전의 핵심은 야마시타 도모유키가 필리핀 루손섬에서 최대한 시간을 끌어  일본 본토 결전을 준비할 시간을 버는것이다. 대만, 오키나와 등에서 미군에게 최대한 출혈을 하게 하면서 시간을 벌어야 했다. 미군이 본토를 다가올수록 미군의 진을 빼놓자라는 작전이다. 

일본 본토도 준비한다. 1945년 4월 8일 대본영은 결호작전을 발령한다. 하지만 병력은 부족했다. 병력 부족을 채울 방안으로 1945년 3월 국민의용대 조직을 결의한다. 1945년 6월 23일 의용병역법이 제정된다. 

의무 병역 부과는 국민의용대 남성은 15~60세까지이며 여성은 미혼여성 17~40세까지 의무 병역이 부과된다. 국민 총동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일명 죽창부대는 1945년 6월 의용병역법 통과 후 '죽창 공격 훈련'이 본격적으로 시행된다. 1945년 6월 8일 일왕이 주관하는 최고 전쟁 회의가 개최된다. 7시간 격렬한 본토 결전 토론을 하지만 그 누구도 제시하지 못한 본토 결전 성공전략이었다. 결국 최고 전쟁 회의 결론에서 일본 본토 결전의 성공은 국민의 정신력과 특공 공격에 의존한다고 한다. 회의에서 아무도 항복에 대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영친왕 이은은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이며 일본 육군 제1항공군 사령관 재임기간은 1943년 7월부터 1945년 4월까지이다. 영친왕 이은은 11세 때 이토 히로부미의 손에 이끌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엘리트 코스인 일본 육사 졸업 후 1917년 12월 일본 육군 소위로 임관을 한다. 내선결혼으로 일본인과 조선인의 결혼을 시켰는데 덴노의 5대손 이상 일본의 방계 왕족 마사코와 1920년 결혼을 한다. 일본은 강제 합병을 하면서 조선의왕가를  일본 왕가 밑에 두고 '이왕가'로 부른다. 이왕가 밑에는 일본 화족(귀족)이 위치해 있다.

 

마사코는 이방자 여사로 부르기도 한다. 일본측은 식민지 근대화론의 사례로 악용했지만 조선측에서는 치욕스럽고 굴욕적인 사례가 된다. 이은은 본인이 의도해서 일본으로 간 것은 아니라고 판단되지만 행적은 갸우뚱하게 만든다. 1927년부터 1928년 이왕 대신 백작부부로 위장해서 일본 왕가를 대표해서 유럽 친선방문을 한다. 돌아와서 육군 제1항공군 사령관에 재임한다.

 

항공전과는 무관했던 영친왕 이은이었다. 1차 대전 이전에는 유럽에서도 상징적 의미로 왕족이 최고 지휘관에 오르고 실질적인 통솔과 지휘는 참모장이 수행하는 시스템이 있었다. 일본군에 남아있던 관례 중 하나였다. 왕가의 일원이 전면에 나서 결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상징적 의미로 사령관 자리에 앉혀 있었다.

실제 결호작전이 본격화되는 1945년 4월 사령관에서 물러나서 실전과는 거리가 먼 군사참의원 참의관으로 이동된다. 영친왕 이은의 평가는 유보되고 있다. 영친왕 이은은 종전 후 귀국을 희망했으나 대한민국 정부가 거부했다. 영친왕 이은의 생모는 귀비 엄씨로 이승만 전 대통령을 살려준 사람 이었다.

 

개화파였던 이승만은 1899년 고종 폐위 음모 가담으로 당시 24세로 감옥에 투옥된다. 탈옥하다 잡혀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이때 영친왕 이은의 생모 귀비 엄씨는 선교사의 부탁을 받고 이승만을 구해준다.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의 초청으로 1950년 2월 일본을 방문한다. 거기에서 이은을 만났었다. 하지만 나중에 이은의 귀국을 거부한다.

영친왕 이은은 건강이 악화되어 1963년 귀국했고 1970년 5월 창덕궁 낙선재에서 별세한다. 패망한 조국의 왕손로서의 그의 삶은 온전히 평가 받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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