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빨리빨리 문화
수출 100억 불 달성까지 걸린 시간은 일본은 16년, 서독은 11년, 한국은 7년이 걸렸다. 빨리빨리 문화가 만든 20세기 한강의 기적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초고속 압축 성장에는 국민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다.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가장 놀라는 것은 빨리빨리 문화다.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이 닳아 있을 때, 비행기 착륙하자마자 서서 내릴 준비할 때, 화장실에서 볼일 보며 양치질할 때, 영화 엔딩크레디트 안 보고 퇴장할 때, 노래방 취소, 시작, 간주 점프 버튼 누를 때 등을 보고 한국인의 빨리빨리 문화라고 느낀다.
상점이나 식당에서 카드 결제할 때 서명을 대충하거나 '대리 서명'을 하는 것을 보면 외국인은 깜짝 놀란다.
빨리빨리 민족 한국인은 원래는 느림보 였다. 빨리빨리 문화는 역사가 깊지 않다. 영국 여행가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1894년부터 1897년까지 조선에 네 번을 방문하고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책에서 기록을 했는데 '조선인은 게으르고 느리다'라고 기록했다. 조선인들은 급하지 않고 전통의상 한복도 빨리 뛰기에 부적합한 구조이다.
1960년대부터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빨리빨리 문화가 시작된다. 60년대 경공업부터 70~80년대 중화학공업 등으로 인해 빠르게 성장해야 했고 건물도 빨리 지어야 했다. 성과를 내기 위한 조급함이 빨리빨리 문화를 만들어 낸다.
80~90년대는 과속 단속카메라가 없던 시절이었다. 단속이 심하지 않은 야간 시간대 난폭운전으로 총알처럼 달리던 택시가 있었다. 총알택시 기사들 사이에서 "나는 이쪽 노선에서 빨리 가기 기록 3등 보유자"라는 유머가 있을 정도였다. 신도시가 생기면서 한 잔 하고 차는 없고 해서 총알택시를 탔다. 신촌역에서 일산까지 총알택시가 있다. 3~4명 승객을 모은 다음에 1인당 얼마씩을 받고 출발한다. 양재에서 분당까지 가는 총알택시가 있었다. 영등포에서 인천 가는 총알택시도 있었다. 뒷좌석 승객의 엉덩이가 붕 뜰정도로 달렸고 한 번 타면 두 번은 안 탄다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렸다.
빨리빨리 문화가 낳은 발명품, 인스턴트 커피
예전에는 커피를 탈 때 자신만의 공식이 있었다. 2:2:1은 커피 2, 프리마 2, 설탕 1을 뜻한다.
회사 비서들은 손님 접대로 커피를 탈 때 손님 커피 배합 취향을 물어보고 커피를 대접하려다 보니 단골 방문객의 커피 비율을 외우고 있었고 그 손님이 오면 외우고 있다가 커피를 타 주면 좋아라 하곤 했다. 비서의 임무 중 하나가 각 손님 커피 비율대로 믹스커피를 타는 것이었고 사장님의 커피 취향 비율은 반드시 외우고 있어야 유능한 비서라고 인정되었다. 이렇게 비율을 맞춰서 커피 타 마시는 것도 성에 차지 않았다. 한꺼번에 타서 빨리 마셔야 되는 한국인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한 D사의 인스턴트커피가 출시된다. 설탕, 프리마, 커피를 한 번에 넣어서 마실 수 있어서 대히트를 친다. 한국인의 급한 성미가 만든 빨리빨리 문화가 낳은 발명품이 인스턴트커피인 것이다. 한국에서 발명된 인스턴트커피는 곧 세계로 뻗어나갔고 인기 상품이 된다. 이후 여러 식품회사에서 다양한 믹스커피를 출시하게 되었고 고급스러운 입맛을 저격한 믹스커피 출시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어 각자 취향대로 입맛대로 골라 마실 수 있다.
빨리빨리 문화가 가지고 온 부작용
빨리하려다 대충 만들거나 잘못 만들게 된다. 1970년대까지 초가지붕이 있었는데 새마을 운동을 하면서 몇 년 안에 살아진다. 문화적 보존 가치를 고려하지 않고 현대식으로 탈바꿈했다.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면서 문화가 바뀌게 되고 빠르게 짓다 보니 안전문제에 소홀했다.
빨리빨리 문화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경부고속도로는 3년도 되지 않아 완공을 해서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 2월 1일에 착공을 해서 1970년 7월 7일, 2년 5개월 만에 완공한다.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빨리 만든 고속도로로 기록하고 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전에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15시간이 걸렸지만 경부고속도로 건설한 후에는 4시간 20분으로 단축됐다.
경부고속도로를 만들어야겠다고 영감을 준 도로는 독일의 아우토반이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 서독을 방문했을 때 아우토반을 달리면서 우리나라에도 물류 운반을 원활히 할 수 있는 고속도로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1968년 2월 역사적인 첫 삽을 뜬다. 당시에는 경부고속도로 개통을 반대하는 여론이 컸다. 당시 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부자들 외에는 없어서 활용도가 낮다고 생각했다. 430억 원 건설비로 428Km를 2년 5개월 만에 완공했다. 너무 빨리 완공해서 유지 보수비가 건설비보다 더 많이 들었다.
경부고속도로 개통일에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박정희 대통령 차를 추월했다고 소문난 배우는 故신성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일행은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중이었고 신성일 씨는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사실 추월한 것은 아니고 엇갈렸다. 며칠 지나서 경호실장과 신성일 씨가 점심을 먹었는데 전해 들은 이야기는 박정희 대통령이 저 차 주인은 누구냐고 물었고 경호실장이 영화배우 신성일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박정희 대통령이 "그 친구 오래 살라고 해"라고 했다고 한다.
경부고속도로 땅 소유주들은 평당 300원에 땅을 팔았다. 당시 쌀 한가마에 4,300원였다.
국책사업이어서 땅 소유자들은 어쩔 수 없이 희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2,040만㎡ 용지 매입을 일주일 만에 끝냈다고 한다.
경부고속도로 공사를 하면서 77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해마다 7월 7일이 되면 경북 옥천군 금강 근처에서 위령제가 열린다. 경부고속도로 공사 중 사망한 77분을 추모하기 위해 위령제를 지낸다.
당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기 위해 중장비가 165만 대, 철근 5만 톤이 들어갔다. 빨리빨리 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다 보니 희생이 컸다. 지금 누리고 있는 풍요로움은 빨리빨리 문화 속에서 노력한 이런 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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