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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한국의 휴대전화 역사

by 소시민스토리 2024.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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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휴대전화 역사

휴대전화가 처음 국내에 도입된 때는 1988년으로 국내 최초 휴대전화,  미국 M사 모델이었다.

무게는 771g이고 크기는 33Cm로 일명' 벽돌폰'이라 불렀다.

 

 

10시간 충전하면 통화가 30분이 채 안 됐고 한 대당 가격은 460만 원이었다. 당시 서울 주택 전셋값과 맞먹는 수준이었다. 당시 세계 휴대전화 1위와 2위는 핀란드 본사가 있는 노OO이고 미국의 MOOO였으며 우리나라는 수입에 많이 의존했다. 

 

 

최초의 국산 순수 휴대전화는 1988년 국산 1호 휴대전화, S사의 SH-100모델이었다. 서울 올림픽이 개막한 9월 17일에 제품을 공개했다. 무게는 700g, 길이는 40cm 일명 '냉장고폰'이라고 불렀다. 요즘 최신 스마트폰 무게가 170~200g 정도이므로 스마트폰 3~4개를 합친 무게다. S사의 SH-100 모델은 한 손으로 들면 팔이 아플 정도였고 소비자 가격은 무려 165만 원이었다.  당시 평균 임금은 64만 원이었고 월급을 3개월치를 합하면 살 수 있었다.

 

 

1998년 최초의 풀더형 휴대전화가 탄생했다.  폴더폰에는 당시 직원들이 새겨 놓은 비밀 문구가 숨겨져 있었다. 2008년도 한 누리꾼이 휴대전화를 수리하려고 분해하는 과정에서 휴대폰 뒤쪽 회로기판 위에 작은 글씨를 발견했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이라 적혀있었다. 해당 모델은 S사에서 1998년 국내 최초로 만든 폴더폰 SCH-800 모델이었다. 당시 연구진들이 약 2년간에 연구 끝에 작심을 하고 제품을 출시했는데 이때 우리나라에 외환위기가 닥쳐왔다. 당시 S사의 후발주자 모델이어서 선발모델보다 더 성과를 내야 하는데 불안한 마음에 스스로를 독려하기 위해서 메시지를 넣었다고 한다. 관계자에 따르면 모든 제품에 문구를 새긴 것은 아니고 생산초기에 잠깐 넣은 문구로 추정이 된다.  힘들었지만 끝까지 한번 해보자는 마음을 새긴 것이다. 

 

카폰(CAR PHONE)은 1984년 한국이동통신 서비스의 차량 전화 서비스팀이 국내 처음으로 상용화했다. 

카폰 한 대가격은 430만원으로 당시 소형자동차 가격 한대 값보다 더 비쌌다. 당시 포니 자동차가격이 300백만 원이었으며 카폰은 고위급 인사, 잘 나가는 비즈니스맨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카폰이 없는데도 차에 금색, 은색 카폰용 안테나를 붙이고 다니면서 허세를 부리는 사람도 있었다. 높은 가격과 명성에 비해서 성능은 떨어졌고 실생활에서의  활용보다는 부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시티폰은 1997년 출시되었으며 당시 사용하고 있던 삐삐와 함께 사용하면서 부유한 사람들의 필수품이 되었다. 개그맨 김국진의 CF와 "여보세요" 유행어가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시티폰은 공중전화 기지국과 조금만 멀어지면 안 터졌다. 공중전화 기지국 범위 안에서만 통화를 할 수 있는 한계점이 있었다. 또한 받을 수는 없고 내가 걸 수만 있는 전화여서 한계를 가지고 있어서 결국 3년을 못 채우고 2000년 1월 서비스를 종료하게 된다. 

 

 

1997년 개인휴대 통신 PCS시대가 열리면서 다양한 휴대전화가 등장했다.

단연 독보적인 것은 H사가 내놓은 '걸리버'였다. 방송인 로버트 할리씨가 구수한 사투리로 "걸리면 걸리니까 걸리버지예" 하면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걸리버라고 이름을 지은 이유는 단발기 기능은 거인급이지만 크기는 소인급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1994년부터 2011년까지 S사의 '애니콜'이 세계 휴대전화 브랜드 1위를 차지했다. 애니콜은 <영화> '애니깽'에서 유래됐다. 멕시코의 애네켄 농장에서 노동하던 조선인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90년대 초에 영화로 만들었다.  주연은 배우 장미희였다. S전자의 상무는 영화 애니깽 제작 소식을 신문에서 보고 브랜드 작명에 영감을 얻고 '애니텔'로 이름을 짓는다. 하지만 애니텔은 유사 상품이 있어서 사용 불가판정을 받고 '애니콜'로 이름을 바꿨다.  당시 선발주자로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M사를 겨냥해서 만든 브랜드였다.

 

1994년 10월 '한국지형에 강하다'는 슬로건을 가지고 애니콜이라는 브랜드를 정식으로 사용하게 된다. 

당시 한국을 선점하고 있었던 M사를 겨냥해서 만든 것으로 '우리 지형에는 우리폰이다'라는 개념으로 애니콜은 엄청난 광고와 홍보를 한다. 산악 지형이 많은 한국 특성상 난통화지역 개선이 경쟁력이었다.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고 세계적인 경쟁력을 함께 갖추게 된다.

 

 

1995년 기업의 문화를 바꾼 전설적인 사건, 일명 '애니콜 화형식'이 있었다.

당시 M사를 따라잡기 위해서 휴대폰 생산량을 늘리는 데 집중을 했는데 무리한 제품 출시로 인해 S사의 휴대전화 불량률이 11.8%까지 치솟았다. 1995년 3월 9일 S사의 故이건희 회장은 경북 구미 사업장 운동장에서 대대적인 애니콜 화형식을 지시했다. '시중에 나간 제품을 모조리 회수하고 공장 사람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태워 업애라'라고 하여 휴대전화 15만 대가 불길에 태워진다. 이날 2,000여 명의 직원들은 '품질 확보'라는 머리띠를 두르고 망치로 15만 대의 휴대전화를 박살내고 불을 붙였다. 당시 가치로는 총 500억 원 상당의 값어치의 휴대전화가 잿더미로 변한 대 사건이었다. 

애니콜 화형식을 계기로 해서 한때 불량률이 11.8%에서 2%대까지 떨어졌고  휴대전화 수출에 나설때 통상 저가전략으로 나서는 다른 나라와 달리 국내 기업들은 프리미엄 전략을 고수했고 고가 제품에 걸맞은 품질 개선을 이루어 낼 수 있었다. 

 

예전에는 휴대전화 번호 앞자리가 달랐다. 011,016,018,019 2G번호가 완전히 사라진 해는 2023년이다.

휴대전화 2G서비스가 27년 만에 국내에서 완전히 사라진 해는 2023년이다.

1990년대 도입된 2G는 음성통화만 가능했다. 문자 송수신이 가능한 2세대 이동통신(2G) 서비스였다. 

이동 통신사 K사는 2012년 3월에 , S사는 2020년 7월에 먼저 종료했고 L사가 2023년 6월에 서비스를 종료했다. 집계에 따르면 국내 2G 가입자가 5만 5백18명이 남아 있었는데 이중에는 L사의 019 번호를 쓰는 사람도 있지만 S사의 011, K사의 016,018을 가지고 번호 이동을 해서 2G 번호를 그대로 유지하던 이용객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019 번호에 대한 향수나 장롱에 두고 해지하는 것을 깜박해서 등과 같은 이유로 해지하지 않았다고 한다. 서비스가 종료되면서 2G는 기억 속에서 추억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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