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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레이테섬 지상전 미 육군의 제6군

by 소시민스토리 2024.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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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테섬 지상전 미 육군의 제6군

1944년 10월 20일 미 육군의 제6군은 레이테 해전이 끝나기 전에 앞서서 레이테 섬에 상륙한다.

태평양전쟁의 수많은 고립된 전장 중 잊힌 전투가 많다. 미 육군의 제6군의 레이테 전투는 잊힌 전투 중에 하나이다. 레이테 해전은 해전에서만 전투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엄밀한 의미로 레이테 해전은 'Battle of Leyte Gulf'로 레이테만 해전이다. 

 

 

태평양전쟁, 일본 해군의 레이테 해전 준비

 

태평양전쟁, 일본 해군의 레이테 해전 준비

태평양전쟁, 일본 해군의 레이테 해전 준비 필리핀 방어를 맡은 사령관은 야마시타 도모유키였다. 싱가포르 함락 이후 야마시타 도모유키는 조용히 숨죽여 지낼 수밖에 없었다. 도조 히데키와

bringbacon.tistory.com

 

 

레이테 전투는 'Battle of Leyte' 레이테섬에서 치른 지상전이다. 미 육군의 레이테섬 상륙은 수월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두달간 일본과의 엄청난 혈전을 벌이면서 미군의 루손섬 상륙 일정이 지연된다. 

 

 

미 육군은 700여 척의 수송선단을 이끌고 레이테섬에 상륙한다. 레이테 섬 상륙작전 목표는 명확했다. 레이테섬 상륙 목적은 차후에 루손섬을 공격하기 위한 작전 기지로 쓰기 위해서였다. 

레이테 밸리를 확보를 해서 비행장, 기지건설을 통한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한 목적이었기 때문에 일본군이 거세게 저항하지 않는다면 혈전이 펼쳐질 이유가 없었다. 

 

일본군 레이테 방어는 일본 육군 제35군이며 주력은 16사단이었다. 제35군은 일본 육군 제14방면군 필리핀을 지키는 야마시타 도모유키의 예하부대였다. 야마시타 도모유키의 제14방면군은 베트남 사이공 사령부 남방군 예하부대였다. 레이테에는 스즈키 소사쿠 일본 육군 제35군 사령관이 이끄는 병력이 있지만 수비병력은 약 2만 명이었다. 일본은 레이테에서  결전을 하려고한다. 야마시타 도모유키는 루손섬에서 결전을 하고 싶어 했다. 레이테는 해군이 싸우면 되고 육군은 관여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본영에서 레이테에서 육,해군 통합 결전을 결정한다. 야마시타 도모유키는 반대를 했고 1944년 10월 22일 데라우치 히사이치 일본 육군 남방군 총사령관이 있는 베트남 사이공으로 호출되어 불려 갔다. 루손에 있는 병력을 최대한 많이 레이테로 보내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래서 일본 육군 5개 사단 2개 여단을 레이테 섬으로 보내 병력을 증원한다.

 

 

오는 도중 격침되고 수송선은 가라앉고 하면서 병력을 잃기도 했지만 최종적으로 일본군 레이테섬 증원 병력은 총 4만 5천여 명이었다. 일본군은 레이테섬에서 단순 방어가 아닌 육군의 결전을 시도했다. 

 

특히 증원된 부대 중에서 1944년 11월 1일 상륙한 부대는 일본 육군 제1사단으로 가장 먼저 생긴 부대, 정예 부대다. 일본 육군 사단은 지역별로 편성한다. 일본 육군 정예 사단은 도쿄를 위수지역으로 하는 근위사단, 제1사단이다. 제1사단이 레이테섬에 투입된 것이다. 레이테 주둔 16사단도 일본 정예부대 중 하나지만 제1사단의 명성을 넘지는 못했다. 

제1사단을 투입했다는 것은 일본 군부에서 레이테섬에 최정예를 투입해서 결전을 치르겠다는 것이다. 

일본은 단순히 방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비행장을 공격하는 등의 적극적인 공세로 혈전이 펼쳐질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과는 달리 미군의 목표는 레이테 밸리를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레이테섬 상륙지점은 프랭클린 시버트가 이끄는 10군단은 위쪽으로 상륙하고 아랫쪽은 존 하지가 이끄는 24군단이 상륙하여 각각 서쪽으로 진격한다. 진격 속도가 처음부터 지연된다. 레이테섬 제해권과 제공권은 일본이 1944년 11월 초까지 확보하고 있었다.

 

 

도미나가 교지 일본 제4항공군 사령관이 이끌고 있었으며 역할이 컸다. 가미카제를 동원해서 미군이 건설하고 있는 레이테섬 타클로반 비행장을 공습해서 파괴하고 지상 착륙해 있는 미 항공기를 폭격한다. 

기상상태가 안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끊임없이 공격하자 미군은 당황하게 된다.

미군의 초반 제공권 확보 실패로 미 육군은 공중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11월에 들어서면서 우기가 시작되어 태풍, 비가 엄청 쏟아지면서 비행장 건설이 어려워지면서 원활한 항공 지원 보급이 불가능해진다. 

미 육군은 전반적으로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일본 제4항공군은 육군항공대이기 때문에 만주, 중국 전선 육군항공대가 투입됐다. 1944년 5월 만주 주둔 제2비행사단이 레이테섬에 투입됐다. 이들은 함대 공격은 능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격하기에는 부족했다.

하지만 육상 지원은 중국, 만주 전선 경험으로 지상공격에 일가견이 있었다. 

전투력으로 보면 미군이 우세했다. 미국 병력은 20만이었고 일본 병력은 6만 5천이었다.

일본은 1사단, 16사단 정예사단이지만 화력은 미국에 비해 열세였다. 일본이 자랑하는 정신력이 초반에는 빛을 발휘했지만 정신력도 전쟁 후반에  고립되면서 저하된다. 

 

미군은 밸리 비행장, 요충지 대부분을 확보했다. 하지만 오르모크는 점령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오르모크항은 일본군 증원 병력, 보급 물자가 상륙하는 지점이었다. 미국 입장에서는 오르모크항을 점령해야 일본군 증원을 차단할 수 있고 전반적으로 레이테 밸리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미군은 1944년 11월 3일 오르모크 포위 작전을 '월터 크루거' 미 육군 제6군 사령관이 계획한다.

10군단이 팔로에서 카리가라를 거쳐서 2번 도로를 타고 오르모크로 내려온다. 24군단은 두라그에서 아브요그를 거쳐 베이베이에서 올라가 오르모크로 간다. 오르모크 오른쪽으로 쭈욱 횡으로 엄청난 산맥이 형성되어 있다. 기동로는 위쪽의 2번 도로, 아래쪽의 2번 도로가 전부였다.  미 육군은 제32보병사단, 제77보병사단 추가 투입하여 총공격을 펼칠 계획이었다. 하지만 빠른 기동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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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육군 제10군단 24사단의 진격은 일본군의 길목에 막힌다. 당시 미군은 '브레이크넥 능선'이라 불렀고 일본군은 '야마시타 라인'이라 불렀다. 일본 육군 제1사단이 브레이크넥 능선을 공격해서 먼저 확보했다. 유일한 전술적 요충지를 일본군이 먼저 차지하다 보니 오히려 미 육군 제10군단 24사단이 수세에 몰린다. 

월터 크루거 미 육군 제6군 사령관은 24사단이 전멸할까 봐 우려했고 동쪽에서 증원된 1기병사단에게 초월 공격(후속 부대가 본 부대보다 앞서 공격)을 명령했다. 

 

미 육군 24사단과 1기병사단이 협공을 해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잘 뚫리지 않는다. 일본군은 치열한 역습을 했고 탈환이 쉽지가 않았다. 결국 한 달이 넘은 1944년 12월 14일 40여 일 만에 브레이크넥 능선을 장악할 수 있었다.

빨리 장악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기후의 문제였다. 계속해서 비가 내렸고 습했다.

발이 춥고 습한 비위생적인 환경에 노출되어 발생하는 참호족(1차대전 참호전을 하던 병사들에게 나타난 명명)에 걸려 엄청나게 고생을 한다. 이때 미군에게는 가장 큰 문제가 있었다. 보급로 2번 도로가 비 때문에 침수돼서 늪지대가 되었고 보급이 이루어지지 못한다. 기동로가 막혀 보급차량을 운행할 수 없었다.

 

나중에는 필리핀 주민들이 직접 물건을 날라 미군 보급품을 운송했고 보급의 속도가 늦어졌다. 

이러한 문제들로 미군의 공격기세가 세지는 않았다. 기동성을 살린 미군의 공격 장점이 발휘되지 못한 어려움이 있었다. 

일본이 진지를 구축하고 시간을 끌었다면 미군은 더 어려워졌을 것이다. 일본군은 반격하고 비행장도 공격하고 역습을 가하면서 산맥을 넘어 동쪽 끝에 위치한 타클로반까지 대규모 공세를 계획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끊임없는 공격으로 병력을 소모했다.

 

 

결국 지상군이 뚫지 못하자 1944년 12월 7일 미 77사단이 오르모크 상륙작전을 펼치면서 일본군은 저항하지 못하고 후퇴하게 된다. 일본군은 조직적 저항은 불가능했다.

1944년 12월 25일 레이테섬 지휘권을 미 육군 제6군에서 제8군으로 넘긴다. 미 육군 제6군은 새로운 전장 루손섬으로 상륙할 준비를 한다. 일본군은 레이테섬 서쪽 끝에 있는 캉기포트산(현재 부가부가 힐)으로 제1사단 1만여 명이 철수한다. 레이테섬 일본군 잔여 병력은 총 2만여 명으로 개별적인 저항을 지속하지만 조직적 저항은 끝이 났다. 

당시 대본영에서 "레이테 결전을 필리핀 전 지역으로 루손 결전까지 확대시킨다"라고 발표한다.

패배했다는 말을 절대 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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