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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태평양전쟁, 일본 해군의 레이테 해전 준비

by 소시민스토리 2024.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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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일본 해군의 레이테 해전 준비

필리핀 방어를 맡은 사령관은 야마시타 도모유키였다. 싱가포르 함락 이후 야마시타 도모유키는 조용히 숨죽여 지낼 수밖에 없었다. 도조 히데키와의 갈등이 있었다. 야마시타는 명장으로 알려졌고 소심한 도조 히데키는 시기를 했다. 야마시타는 1942년 2월 싱가포르 함락 직후 일왕에게 직접 승전보고를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도조가 이를 가로막는다. 말라야 작전을 성공시켰지만 도조의 견제로 관동군 제1방면군 사령관으로 만주로 가게 된다. 전투가 없는 한직에서 장기간 숨어 지내게 된다.  1944년 7월 도조 내각 총사퇴 후 '말라야 호랑이'라 불리는  야마시타 도모유키를 다시 필리핀에 투입된다. 1944년 9월 26일 제14방면군 사령관에 임명된다.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9월에 이미 미군의 필리핀 육상 기지 항공대 공습으로 타격을 입었고 필리핀으로 일본 육군 병력 증강 중이었지만 대만 항공전의 잘못된 전과보고로 인해 대본영이 레이테에서 해전을 하겠다고 결심한다. 필리핀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된다.  

 

일본의 판단 착오, 대만항공전

 

일본의 판단 착오, 대만항공전

일본의 판단 착오, 대만항공전 미국의 레이테 진공작전은 시작됐다. 일본이 예상한 것보다 더 빠른 시기에 무려 700여 척에 가까운 대함대를 이끌고 레이테만으로 몰려온다. 미군, 레이테 진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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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도 미국의 정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일본은 또 오판한다. 미군의 레이테 상륙은 선거 캠페인용 허세라고 인식한다. 루스벨트가 선거용으로 이용하는 것이고 미군의 전력은 레이테 해전이 불가능하니 일본은 함대 총출동해서 들이닥치면 승산이 있다고 어마어마한 판단 착오를 한다.

 

필리핀 탈환을 위한 미군의 1단계 사전공격을 민다나오 공습(1944.9.7~10), 비사야스 공습(1944.9.13), 모로타이 상륙(1944.9.15), 앙가우르 상륙(1944.9.17), 펠렐리우 상륙(1944.9.15),  마닐라 공습(1944.9.21~22), 오키나와 공습(1944.10.10)을 한다.

1944년 10월 17일 레이테만 해역의 기뢰를 제거한다. 특공부대가 투입돼서 작은 섬 3개 장악하고 등대 확보, 레이테섬 상륙지점을 정찰한다. 레이테섬으로 가는 해상로 교통정리를 한 것이다.

10월 20일 오전 6시에서 10시까지 상륙하면서 4시간에 걸친 함포사격을 한다.

 

 

2단계로 월터 크루거 중장의 제6군 상륙한다. 20만 명 이상의 병력이 동시에 상륙을 개시한다.

월터 크루거는 미 육군 제6군 사령관으로 병사로 시작해서 대장까지 오른 인물이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병사 출신 장성이다.

제6군 10군단 소속은 제1기병사단과 24사단은 약 6.4Km 구간의 북쪽 해안에 상륙한다.

제6군 24군단은 약 5Km 구간의 남쪽 해안에 상륙한다.

상륙 개시  1시간 이내에 교두보를 확보한다. 일본군 방어 병력은 제16사단뿐이었다. 미 24사단이 상륙한 북쪽 해안으로 일본군 야습이 있었지만 격퇴를 당한다. 일본군 저항은 내륙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1944년 10월 20일 오후 1시에 맥아더 장군이 등장한다. 마침내 2년 7개월 만에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왔다.

레이테섬 북쪽 해안 레드비치에 입성한다. 세르히오 오스메냐 당시 필리핀 망명정부 대통령과 망명정부 주요 인사와 동행했다. 1944년 10월 23일 필리핀 연방정부 회복 기념식이 거행된다.

필리핀 국민들은 맥아더 장군에게 호의적이었다. 일본의 정책은 필리핀 사람들에게 민심을 잃게 만들었다.

필리핀 기존화폐 대신 일본 페소를 발행했고 필리핀 주요 농작물 재배 품목을 교체했다. 다 실패하면서 필리핀 경제는 무너지고 굶주림에 시달리고 게릴라들이 일어섰다. 필리핀 농민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고 농민들은 끝까지 게릴라 부대에 있었다. 점령초기 일본은 '대동아공영' 선전을 하지만 민심에 어긋난 정책의 실패도 있었고 포로 정책에서도 실패했다. 일본제국의 실체가 필리핀에서 고스란히 보였다. 

필리핀은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높다. 미국 지배 시절에는 사탕수수 경제가 활성화되어 필리핀에서 재배된 사탕수수 90%는 미국으로 수출됐다.

일본입장에서는 사탕수수가 별로 쓸모가 없었다. 대체 작물로 대두(메주콩)와 면화(목화)를 강제적으로 심으라고 했다. 기후가 맞지 않아 흉작이 되었고 농민들의 민심은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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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레이테 해전 서막

 

1944년 10월 20일 미 육군의 제6군 레이테섬 상륙한다. 700여 척의  미 수송 선단과 호위함이 가득했다.

1944년 7월 9일 사이판 함락된 이후 일본은 7월 중순 대본영 육군과 해군이 합동연구를 실시했다. 

7월 24일에 일왕의 재가를 받은 육해군 이후 작전지도 대강을 보고서가 나온다.

보고서에는" 1944년 후반에 미군 주력의 진공에 대비해서 결전을 지도한다. 미국의 의도를 분쇄해야 한다.

적이 결전 방면으로 공격해 들어올 때는 육해군 전력을 극도로 집중시켜서 적항공모함과 수송선 위치를 파악해서 반드시 격퇴해야 된다. 만에 하나 미국이 상륙을 실시했을 때는 이 역시 지상에서 격멸한다. 이때를 놓치지 말고 육해군이 미리 협력해서 대기시켜 둔 반격부대를 총동원해서 미군을 해상과 지상에서 역시 격멸해야 된다." 이것이 바로 쇼호작전이다. 작전명 '쇼'의 의미는 승리이다.

 

작전목표를 두고 일본 해군 내부에서 분열조짐이 일어난다. 현장에서는  미 수송 선단 공격 임무에 반대한다. 미 항모와 결전을 해야 하는데 빈 껍데기 미 수송선단을 향해 일본의 강력함 전함들을 끌고 가서 싸우는지 반대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일본 해군 수뇌부 회의가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려 열띤 논의가 이루어진다. 

 

 

일본 해군이 가지고 있는 관습이 있다. 일본 해군은 1895년 웨이하이 전투에서 청나라 북양함대를 사실상 궤멸시킨다. 청나라의 북양함대는 약했다. 웨이하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섬나라 일본 해군의 자존심이 발현된 것이다.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 당시 청의 전권대신 '이홍장'의 무릎을 꿇이며 굴욕적인 조약을 한다. 10년 후 러일전쟁 때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엄청난 승리를 한다. 자신감을 얻은 해군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함 건조 경쟁시대에 해군을 주력부대로 키우며 함대결전으로 모든 것을 승리로 이끌려고 한다.

태평양전쟁 계획의 피날레 역시 함대 결전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 일본 해군이 승리한 19세기말 ~20세기 초는 함재기가 없던 시절이었으며  상륙전의 의미도 크지 않았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당시에는 상륙작전이 필요했고 항공기 싸움이 필요했다. 19세기부터 계속 뿌리내린 해군 마인드가 시대 상황은 변하는데 일본 해군이 가진 관습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 해군의 레이테 해전 목표가 모호했다. 

필리핀 마닐라 회의에서 결론을 내린다. 빈 껍데기 미 수송선단을 격퇴하러 항만으로 가다가 미 해군 주력함대를 만나면 미 수송선단을 격퇴하러 가지 않고 미 주력함대를 공격하겠다는 결론은 내린다. 전략 목표가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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