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판단 착오, 대만항공전
미국의 레이테 진공작전은 시작됐다. 일본이 예상한 것보다 더 빠른 시기에 무려 700여 척에 가까운 대함대를 이끌고 레이테만으로 몰려온다.
다바오 오보 사건
일본의 항공력은 위태위태하다. 거기에 1944년 9월 9일 '다바오 오보 사건'이 일어난다. 윌리엄 홀시 미제3함대 사령관의 미 3함대 항모 기동부대가 탈라우드제도 공격 후 이동하고 있었다. 1944년 9월 9일부터 10일 오전 민다나오, 다바오를 예비 공습한다. 9월 10일 일단 멈췄다. 그런데 다바오에 있던 일본군 감시대의 보고에 '적 상륙주정 접근'이라고 보고한다. 보고를 받고 일본군은 다 철수한다.
일본 항모 항공대는 필리핀해 해전에서 소멸되었다. 필리핀 방어를 위해 남은 전력은 기지 항공대밖에 없어서 남은 육군과 해군 항공 전력을 모아서 필리핀, 대만, 본토, 오키나와를 잇는 육상 기지로부터 항공기 발진을 시켜서 적의 항모기동부대가 접근하면 습격을 해서 결정적인 타격을 줄 '쇼호계획'을 세웠었다.
쇼호계획은 권역별 4개 작전으로 쇼1호는 필리핀 지역, 쇼 2호는 대만과 오키나와 지역, 쇼 3호는 일본본토, 쇼 4호는 홋카이도 지역을 방어한다. 방어핵심은 필리핀, 대만, 오키나와였고 쇼 1호는 필리핀 제1항공함대, 쇼 2호는 대만, 오키나와 제2항공함대가 준비한다.
세부 비행기지에는 제1항공함대 제로 전투기 52형이 주둔하고 있었다. '다바오 오보 사건'으로 인해 미군 상륙, 공격으로 착각하고 마닐라로 약 100대의 제로전투기를 이동했다. 이동하고 보니 미군이 공격을 하지 않자 다시 세부로 이동한다. 100대의 비행기가 이동하고 다시 돌아오고 하면서 정찰비행을 하지 못한다. 그런데 1944년 9월 12일~14일 미군 세부섬, 네그로스 섬 등을 집중 폭격한다.
세부섬 기지의 일본 제1항공함대는 100대중 80대가 손실된다. 네그로스섬 바콜로드의 일본 육군 제4항공군은 항공기 65대가 손실된다. 세부만에 정박해 있던 약 20척의 수송선을 포함한 일본 함선 24척이 격침된다.
1944년 9월 1일 시점으로 계산해서 일본 제1항공함대 동원 가능 전투기는 세부섬에서 약 250대였다.
하지만 폭격으로 99기가 남았다. 미군은 또다시 9월 20일, 22일공격하면서 일본 제1항공함대는 사라진다.
네그로섬 바콜로드 일본 육군 제4항공군의 경우 항공기 총 200여 대 소멸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군은 작전을 변경하지 않는다.
일본군은 일본의 전투기 폭격기로 정면승부를 해서는 미군의 막강한 해군 항공대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겐다 미노루' 당시 해군 군령부 대좌는 진주만 공습, 미드웨이 해전 당시 제1항공함대 항공참모로 작전을 입안했고 1944년 해군 군령부 작전과에서 항공 담당이었다.
겐다 미노루는 밤에 공격하는 것과 가미카제의 힘을 빌리자는 아이디어를 낸다. 가미카제는 전통적인 의미로 태풍을 말한다. 우기 막바지인 10월 필리핀해 해상에서는 태풍이 자주 발생한다. 악천후에 미 항모 함재기 이륙이 불가하다. 그러나 육상 기지에서는 항공기 발진이 가능하다. 악천후에 육상 기지에서 일본 폭격기에 어뢰를 싣고 발진해서 미 항모를 뇌격하자는 아이디어를 낸다.
T공격부대로 이름을 짓는다. T공격부대는 육군과 해군 항공대 합동으로 편성한다. 해군 항공대만으로는 전력이 부족했다. 육군 폭격대 정예부대를 차출한다. 육군 파일럿에게 어뢰를 쏠 수 있는 뇌격 훈련을 실시한다. 육군 항공기에는 어뢰 장착 설비가 없었다. 일본 육군의 쌍발 폭격기 4식 중폭격기 Ki-67 히류에 기체 하부 개조를 해서 어뢰를 장착한다. 기체 하부에 랙으로 어뢰를 장착하고 열심히 훈련을 한다.
이때 일본 제2항공함대 지휘관은 후쿠도메 시게루였다. 해군 을乙 사건의 주인공이다.
일본도 드디어 T공격부대 항공기에 레이다를 탑재한다. 야전을 치뤄야 하는 T공격 부대원들에게 어두운 밤에 적함을 발견해서 희미한 불빛 속에서 뇌격을 감행해야 하기 때문에 밤눈이 밝아지는 멜라닌 색소 자극 호르몬을 주사한다. T공격부대는 대만과 일본 규슈 항공기지에 배치된다.
1944년 10월 12일 윌리엄 홀 시 미 3함대가 항공기 1,400대를 동원해서 대만으로 진격한다.
일본은 항공기 약 1,000대을 투입한다. 일제 강점기 기록을 보면 비행기 헌납 운동을 했다. 1944년 조직적인 400대 헌납 운동까지 전개해서 일제에 협력하던 김 모, 박모 재벌들이 현재 가치로 최소 10억~최대 103억을 개인 고액 헌금으로 일본 육, 해군에 비행기를 헌납했다. 조선, 대만 등의 헌납으로 태평양전쟁 동안 일본군 군용기의 약 17%를 생산했다. 나중에 처벌은 받지 않았다. 식민지 및 점령지에서 수탈하여 모아서 비행기를 만든 것이다.
1944년 10월 12~14일 대만항공전이 벌어진다. 일본은 나름 준비를 철저히 했다고 자부하며 1944년 10월 12일 첫 공격당시에 난타전을 벌인다. 그러나 우수한 파일럿 기량과 F6F 헬캣의 우위 속에서 일본 항공기는 100대가 격추된다. 본토에서 드디어 T공격부대가 출격한다. 때마침 태풍이 발생하여 1944년 10월 12일 해 질 무렵 T공격부대는 공격을 개시한다.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다. T공격부대 2파가 야습을 감행하지만 성과는 크지 않았다. 고도의 숙련도가 필요한 야간 뇌격작전을 감당할 수 있는 실력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일본 T공격부대 어뢰와 미군 대공포의 현란한 불꽃이 쏟아졌다. 1944년 10월 12일 해 질 무렵 T공격부대 1파 90대가 공격했는데 43대가 상실되고 T공격부대 2파 44대가 야간공격을 했는데 25대가 상실된다.
미 3함대는 대만항공전 이틀째 일부러 페이스를 늦추고 일본의 야간 공격을 기다리다 요격을 한다. 일본 항공기는 많은 수가 격침을 당한다. 여기서 일본은 판단 착오를 한다. 미 3함대가 페이스를 늦추자 미군이 일본의 공격으로 첫째 날 엄청난 타격을 입어서 둘째 날에는 공격이 약해진 것으로 판단한다.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일본은 대만항공전 세쨋 날 1944년 10월 14일 380대를 출격시킨다.
남아있던 항공대를 모아 늦은 오후에 총공격을 한다. 미군에 의해 244대가 격추된다.
일본은 어마어마한 오판을 한다. 야간작전으로 전과 파악이 불명확했다. 전과보고에 4일 동안 공격으로 미 항공모함 11척을 격침,8척 대파시켰다고 보고한다. 일본군 보고서만 보면 미 3함대 38 기동부대는 사라진 것으로 보고되었다. 일본은 잘못된 보고로 인해 의기양양해져서 비장의 T공격부대가 본 때를 보여줬다고 생각했다.
고무된 일본은 승전파티를 열었다. 승전 뉴스를 본토에서 내보내기도 했다. 승전을 알리는 대자보보 곳곳에 붙였다. 승리뉴스를 기다리던 일본에게는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1944년 10월 19일 대본영의 공식적인 전과 발표가 있었다. 신임 총리 고이소가 나와서 연설을 한다. 도쿄 히비야 공회당에서 대만항공전을 자축하는 전국대회가 개최된다. 이날은 미군이 레이테섬에 상륙하는 1944년 10월 20일이었다. 고이소 구니아키는 첫째 날은 진실을 몰랐지만 둘째 날은 진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T공격부대가 격침시킨 미군 전함은 단 1척도 없었다. 미 경순양함 휴스턴과 중순양함 캔버라가 대파되고 미 항공기 약 90대가 손실됐다.
반면 일본은 약 1,200대 항공기 중 약 300대가 손실되며 대만 항공전을 끝나버린다. 일왕에게 승전보고를 한 후에 성과 분석을 해 보고 잘못된것을 알게 되지만 지휘관들은 진실을 입밖에 내지 않는다. 이미 일왕께 승전보고를 올렸는데 불충을 저지를 수는 없는 것이었다. 대만항공전 종료 다음날 10월 15일 실태를 파악한 일본 해군은 육군에 제대로 알리지도 않고 현장에 있던 해군 제독들도 몰랐다. 이것은 레이테 해전까지 영향을 준다. 대만의 항공전에서 잘못된 전과가 기정사실화되자 다음 작전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대만을 충분히 타격했다고 판단한 미 3함대는 1944년 10월 14일 밤 필리핀 루손섬 공습을 위해 이동한다.
'잡학지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란색 장판이 유행한 이유 (0) | 2024.02.22 |
---|---|
태평양전쟁, 일본 해군의 레이테 해전 준비 (1) | 2024.02.21 |
미군, 레이테 진공작전 시작 (1) | 2024.02.18 |
80년대 초능력 열풍 (1) | 2024.02.17 |
70,80년대 주산 학원 열풍 (0) | 2024.02.1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