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레이테 진공작전 시작
일본은 필리핀해 해전 사이판 함락 이후 도조 히데키는 본인이 공헌했던 절대 국방권이 붕괴되자 사퇴 압력으로 자리에서 물러나고 고이소 구니아키가 일본 41대 총리가 된다.
일본 41대 총리가 된 '고이소 구니아키'는 레이테 해전을 다시 찾아온 기회라고 생각한다. 1944년 6월 미국의 시점으로 필리핀 해전 결과를 두고 미 육군과 해군은 논쟁을 벌인다. 논쟁의 핵심은 필리핀 탈환여부였다. 맥아더 사령관은 필리핀 탈환하고 싶어 했다. 1944년 6월 중순, 미 합동참모본부는 필리핀을 지나서 대만으로 간다고 맥아더에게 통보한다. 대만 공격을 결정한 미 합동참모본부는 4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헨리 아놀드 육군 항공사령관, 어니스트 킹 미 함대 총사령관, 조지 마셜 육군참모총장, 윌리엄 리히 육, 해군 최고사령관 참모총장이었다. 줄곧 맥아더 편을 들어주었던 조지 마셜 미 육군참모총장도 합동참모본부의 대만 공격에 동조한다. 요새화된 필리핀을 지나서 대만을 공격하면 전쟁을 빨리 끝내는 길이고 필리핀을 해방시키는 방법이라고 맥아더를 설득시키려 한다. 맥아더는 버럭 한다. 맥아더는 군사적으로 필리핀 공격 없이 대만을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대만공격의 배경과 의미
대동아공영권 유지를 위한 마지막 생명선이 남아 있었다. 보르네오, 싱가폴의 남방지대와 일본은 잇는 물자 수송로가 핵심이다. 마리아나제도를 미국에 빼앗기면서 필리핀에서 일본으로 가는 해상루트가 봉쇄되었다.
그러다 보니 남은 수송선은 미군의 폭격을 피해서 베트남해안을 따라 올라서 남진하해와 동진하해로 움직여서 대만과 중국본토 사이를 빠져나가 난세이제도로 올라가는 루트밖에 안 남았다.
※남세이제도는 일본 규수 남단에서 대만에 이르는 약 1,200Km에 걸쳐있는 여러 섬들이다.
미군전략가들이 판단하기에 이 루트만 끊으면 전쟁은 끝날것이라 판단한다.
그러면 더이상 남방자원지대와 소통은 불가능하며 일본 경제는 고사 상태가 될 것이다. 마지막 수송로 끊는 핵심은 대만을 공격하는 것이다. '어니스트 킹' 미 함대 총 사령관 겸 해군 참모총장은 마리아나 제도는 미군에 있으니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된다라고 주장하고 조지 마셜도 이에 동조한다.
더글라스 맥아더 미 남서태평양지역군 사령관은 다른 의견을 내놓는다. 그가 필리핀 탈환을 주장하는 군사적 이유는 미 해군과 동일하다. 필리핀 탈환 역시 남방자원 수송로를 차단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게다가 필리핀 점령없이는 대만도 점령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편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32대 미국 대통령은 직접 전략계획회의를 개최하려고 결심하고 하와이로 행을 결정한다.
대통령 방문은 보안 사항이며 하와이에는 태평양함대 사령관 니미츠에게 연락한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4년 7월 22일 새벽 12시 중순양함 볼티모어, 샌드에이고에서 출항해서 1944년 7월 26일 오후 3시 진주만에 도착한다. 최고 의전 담당관 니미츠 사령관은 다양한 환영 행사를 준비한다.
볼티모어함이 진주만에 입항할 때 부두에는 미 해군 수병들이 도열한다. 환영식이 펼쳐지고 루스벨트를 맞이하러 장군들이 총출동하여 리셉션이 시작된다. 맥아더는 도착하지 않았다. 최고급 검정 리무진 뒷좌석에 착석한 맥아더가 헌병기동대 카 에스코트까지 받으며 나타나자 장병들이 경례한다. 차가 멈추고 맥아더는 차에서 내려서 대통령에게 걸어갔다.
1944년 11월에 치러질 대선에 4번째로 도전한 루스벨트에게 건강 이상설이 나오기 시작했다. 전쟁 중이므로 최고의 장군들과 건강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대선을 위해 꼭 필요한 정치적 의도가 깔린 하와이 방문이었다. 루스벨트와 맥아더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맥아더는 뉴딜정책을 지지 않았다. 뉴딜정책으로 인해 군사 재정을 감축하는 것이었다. 육군 예산 삭감에 맥아더는 강력 반대했다. 루스벨트 입장에서 맥아더와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당시 공화당 전당대회 경선에 맥아더를 내세우려던 움직임이 활발하게 있었기 때문에 루스벨트 입장에서는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루스벨트는 하와이 방문으로 4선을 위한 건강 이상설 불식까지 염두해 둔 방문이었다. 어니스트 킹 미 함대 총사령관, 조지 마셜 육군참모총장을 빼고 윌리엄 리히 육, 해군 최고사령관 참모총장을 데리고 간다. 조지 마셜은 루스벨트 부재를 매워줄 대리인으로 신임하고 있었으며 어니스트 킹은 맥아더와 사이가 좋지 못했다. 루스벨트와 맥아더는 1937년 맥아더 사퇴 이후 7년 만의 만남으로 적절한 타협을 위해서 하와이를 방문한 것이다. 맥아더는 선거 유세에 본인을 이용하는 것 같아 기분이 상했다가 루스벨트를 만나니 얼굴색이 좋지 못하자 오래 못 갈 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겉으로는 하와이 회동이 화기애애하게 마무리된다.
1944년 7월 28일 오전 10시 20분 전략계획회의를 개최해 필리핀이냐 대만이냐 공세 루트를 결정하는 회의를 개최한다.
니미츠는 미국의 목적은 일본을 굴복시키는 것으로 침공은 해군이 맡아야 한다. 어니스트 킹의 논리를 대변해 준다. 논리적으로 볼 때 가장 빠른 길로 가야 하므로 맥아더의 육군이 필리핀 민다나오에 비행장을 건설해서 필리핀에 있는 일본군 비행장을 공습해서 무력화해야 시키고 필리핀의 민다나오 외에는 그냥 지나쳐서 내가 (니미츠) 이끄는 함대가 대만을 공격하는 것이 맞다고 브리핑한다. 그래서 육군의 2개 사단을 지원해 달라고 한다.
맥아더가 브리핑을 시작한다. 필리핀을 가리키며 필리핀을 공격해야 한다. 왜냐면 필리핀에 대한 도덕적 의무를 가지고 있다고만 이야기한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루손섬을 공격하면 엄청난 피해를 입지 않을지 묻는다.
맥아더는 "우리 육군은 손실이 크지 않을 것입니다. 멍청한 정면공격은 오직 평범한 지휘관이 한다, 각하의 지휘관들은 평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커다란 손실을 초래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대답한다.
개전 1941년 12월에 미 해군이 무능력하게 무너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필리핀을 떠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라는 이야기도 한다. 미 해병대, 미 해군을 은근히 비꼬는 것이었다. 결국 니미츠도 필리핀 공격의 의미에는 동조한다. 미국인들에게 필리핀은 일본군에 맞서서 꼭 탈환해야 하는 지역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결국 미군의 공세는 대만 대신 필리핀으로 변경된다. 맥아더 주장으로 필리핀 공격으로 방향이 틀어지고 대선을 앞둔 루스벨트는 정치적 위험을 피하고 싶어 했다.
제2차 퀘벡회담 1944년 9월 12~16일 일명 '옥타곤 회담'이 열린다. 처칠의 관심은 역시 유럽이었다. 하와이 회동할 때 유럽에서는 노르망디 상륙 후 연합군의 더딘 진격으로 처칠은 유럽 문제를 빨리 해결하려고 루스벨트를 만나러 퀘벡으로 온 것이다. 반면 루스벨트는 태평양전쟁 종전 계획을 설명한다. 유럽과 태평양에서 전쟁을 끝내는 전략 논의를 한다.
루스벨트는 처칠에게 할 말이 많았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독일이 무너지지 않고 미군 피해는 어마어마했다.
노르망디 상륙 1944년 6월 미군 M4셔먼 피해는 167대, 파리 탈환 1944년 8월 미군 M4셔먼 피해는 557대였다. 미군 월간 전차 손실률은 21%이며 전차병 생존율이 희박했다. M4셔먼 1대당 전차 승무원은 5명(전차장, 포수, 탄약수, 조종수, 무전수 겸 부조종수)이다. 1944년 9월 기점으로 전차병 숫자가 부족해서 4명이 탄다. 행정병까지 전차 승무원으로 차출하는 상태가 된다.
영화 <퓨리>에 그 상황이 담겨져 있다. 예상보다 유럽전선에서 미군의 피해가 컸다. 루스벨트는 처칠에게 유럽전선에서 영국군이 더 많은 역할을 해야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결정된 것이 '마켓가든 작전'이다.
1944년 9월 17일~25일 영국 제1공수대사단이 투입된다. 대규모 공수작전은 실패한다.
레이테 진공작전 시작
미군은 차후 작전을 위한 교두보가 필요했다. 루손섬을 공격하고 중국 해안의 일본군 항공기지 공습하고
타이완섬을 공격하는 것이 차후작전이다.
레이테섬은 면적이 7,214㎢ 으로 민다나오섬의 약 1/13로 크기가 작은 섬이다. 지리적 위치로 필리핀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다. 레이테 섬은 평탄하고 비옥하고 넓은 레이테 밸리가 위치해 있다. 대규모 루손섬 공략 작전을 지원하는 주요 비행장과 보급기지, 군사기지 건설을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 상륙작전을 하기 좋은 넓은 해안선이 펼쳐져 있다. 맥아더는 1944년 초반부터 레이테섬을 점찍어 두었다.
레이테 만으로 향하는 미 수송 선단과 호위함들 숫자는 어마어마했다.
1944년 항공기 생산대수는 일본은 약 2만 8,000기, 미국은 약 10만 700기였다. 미국의 생산능력은 어마어마했고 일본과 성능차이도 더욱 커졌다. 레이테 진공작전 병력 동원은 미 육군 제6군 20만 명을 상륙시킨다. 병력, 기지 건설 물자, 보급품, 함재기를 가득 실은 수송선단은 약 700척이었다.
미국의 레이테 진공작전의 흐름은 레이테만에 상륙하기 전에 먼저 1단계를 실행한다. 아직 남아있는 일본의 방어 역량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1944년 9월부터 거대한 미 함대가 움직인다. 윌리엄 홀시 제독의 제3함대가 있었고 토마스 C. 킨케이드 제독의 제7함대가 동원돼서 필리핀 주변 일본군 기지들을 하나씩 공격한다. 1944년 9월 15일 팔라우, 모로타이섬에 상륙작전을 동시에 개시한다. 이어서 미 항모 기동부대가 출격하여 오키나와 및 난세이제도, 대만의 일본군 항공기지를 공습한다.
1944년 10월 20알 레이테만 상륙 및 점령을 한다. 두 달 뒤 1944년 12월 20일 루손섬으로 진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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